데살로니가전후서(2) LCY 번역
‘데살로니가전서’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아래를 논하겠는데, 우리가 서신의 세번째 부분을 논했습니다. 바울은 그들 영적인 생명의 성숙함에 관심이 있었고, 우리가 거룩과 소망을 논했으며, 삶 속의 거룩을 실천해야 했고, 마치 혼인과 직업처럼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약점을 논하려는데 – 소망입니다. 그들은 믿음과 사랑은 충만했는데, 하지만 소망은 부족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바로 이렇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설교가 소망의 설교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소망은 영혼의 돛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데, 소망은 바로 마음속의 희망이고, 믿음은 소망하는 일에 자신이 생기고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증거가 있습니다. 소망은 미래와 연관이 있는데, 제가 세상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한 견해를 논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헬라인들이 사망에 대한 견해를 보겠습니다. 제가 몇 사람의 말을 인용하겠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에스컬레스이고, 그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은 후에 부활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히아게티가 말하기를 ‘산 사람은 소망이 있는데, 하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의 짧은 인생이 일단 막을 내리면 바로 끝이 없는 밤이 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영원히 잠들고 일어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헬라의 어느 한 무덤에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나는 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후에는 존재하느니라. 지금은 또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묘지명을 썼습니다.
제가 전에 사람이 사망하여 권하는 이러한 한통의 편지를 보았는데, 위에 이런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치의 방법도 없느니라. 그래서 당신들은 서로 위로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헬라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을 놓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생각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는 영향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이미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성도는 복을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 핵심은 하나님 아들이 하늘에서부터 강림하는 것을 기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두번째로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어느 성도가 이미 죽었고, 정말로 불쌍하고, 그들은 복을 놓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이 성도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을 교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도 고민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크리스찬 친척이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영원히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이미 존재하기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너희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과 같이 이 일을 위해 상심하지 말라. 내가 너희들에게 비밀 하나를 알려주겠는데, 이는 사실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니라. 하지만 내가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사람이 가장 먼저 그와 만날 수 있겠느냐? 바로 이미 죽은 자들이니라. 그들은 앞 자리에 앉을 것이며,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모두 공중에서 주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놓치지 않았고, 그들은 첫번째로 예수님을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모르겠네요. 여기에서 이미 죽은 크리스찬들은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였으며, 여기로 돌아올 수 있고, 여기에서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아니고 땅에서 새로운 몸을 얻게 될 것인데, 이는 크리스찬으로 말하자면 하늘에는 단지 하나의 대기실만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에게 잠시 거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그 죽은 자들은 땅으로 돌아올 것이며, 예수님이 땅으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들이 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과 만나게 될 것인데, 여러분은 듣고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진심으로 믿느냐입니다. 당신이 만일 죽으면 장래에 이 땅에 올 수 있습니까? 당신이 첫번째로 그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의 조부가 뉴캐슬의 산니콜라스 묘지에 장사되었는데, 그의 묘지에 글자 몇 개를 새겼습니다. 성경에서 취한 것이 아니고 순도회의 옛 성가에서 취한 것인데, 보는 사람마다 이는 어떤 괴상한 사람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 아래에 이런 몇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모임이구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매우 특별하시지요? 그는 공중에서 크리스찬들의 대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땅에는 그렇게 큰 체육장이 없겠고, 이 모임은 반드시 공중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때면 천천만만인이 참석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너무 시끄러운 경배를 싫어하면 그날에 오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렁찬 나팔소리와 천사장이 죽은 자들을 부활하려고 웨치는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바로 이런 광경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죽은 사람들 위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먼저 도착할 것이며,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도 먼저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공중에서 주와 만나게 될 것이며, 그로부터 영원히 그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이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어쩐지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수님이 다시 오실 때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과만 합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아닙니다. 죽은자가 먼저 부활하겠고, 먼저 그와 합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만약 제가 아직 살아있다면 저의 조부가 앞 자리에 앉아 계실 것이고, 그가 저보다 먼저 와서 있을 것이며, 저의 부친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저는 조금 늦게 그들과 합치게 됩니다. 사실 그때면 죽은 자든 산 자든 모두가 이기는 자이입니다. 당신이 만약 먼저 죽었으면 앞 자리에 앉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죽을 필요가 없게 되며, 아무도 당신을 도와 관 치수를 재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자든 산 자든 모두 이기는 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오해는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짜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였으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가 올 때는 마치 밤중에 도적이 오는 것처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예상치 못한 뜻밖에 오고, 사전에 경고가 없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기를 이는 예수님이 수시로 올 수 있다는 것으로 표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가르친 것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오늘 밤에는 다시 올 가능성이 없고, 또한 다음 주거나 혹은 올해는 다시 오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제가 살아있을 때 다시 오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군가 저의 관 치수를 재려고 도우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크리스찬들은 직접 새로운 몸으로 바뀌는 것을 소망했고, 그리고 새로운 몸이 33세에 되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33세로 다시 돌아가기를 기다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몸이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나이는 절반 줄어들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관해서는 도대체 수시로 다시 올 가능성인지 아니면 먼저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말하는 뜻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해 의외라고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밤중의 도적’이라는 이 단어는 크리스찬을 겨냥해 말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을 겨냥해 말한 것이고, 심지어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크리스찬을 말한 것입니다. ‘도적’이라는 단어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도적 당할 것이 있다는 표시이며, 도적이 밤중에 와서 도적해 갑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두운 밤에 살고있지 않고, 낮에 살고 있느니라. 너희가 깨어있기만 하면 의외로 느끼지 않을 것이고, 그가 어느때에 다시 오는지를 알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편지 한 통을 써서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의 뜻을 심각하게 오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는데, 정말로 잘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저의 책을 조금 선전하겠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해석’이라는 책입니다. 12월이면 출판되는데, 제가 더욱 두꺼운 책을 써서 이 주제를 계속해서 토론할 예정입니다.
모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바울의 뜻은 너희가 깨어있기만 한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의외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아실 것이며, 당신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징조에 유의하실 것입니다. 그 징조들이 나타날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어두운 밤에 살고 있는 비크리스찬과 자고 있는 크리스찬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매우 의외라고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항상 깨어있는 사람들은 의외라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밤에 다시 올 가능성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가 다시 오시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징조를 유의하면 의외라고 느찌기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느날에 다시 오시는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 준비해야 합니다. 의외라고 놀랄 사람은 비크리스찬들과 자고 있는 크리스찬들인데, 하지만 우리는 의외라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끝내는 말을 기록했는데, 그러나 느낌상으로 강의할수록 더욱 힘이 넘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5장의 마지막 이 짧은 구절에 귀중한 말들이 많이 있는데, 앞 부분과 상관은 없습니다. 바울이 마치 한때 일어난 것 같았고, 그들과 이것을 말하고 싶고 저것을 말하고 싶었는데, 매우 많은 말들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처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5장의 후반부에서 많은 권면의 말을 했는데, 우리가 순서대로 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그가 전도인을 논했는데, 제가 데살로니가 도시의 한가지 일을 잊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크리스찬들이 처음으로 민주 정치와 만났는데, 왜냐하면 이 도시에는 자신들의 민주 정부가 있었기 때문인데, 민주적인 기풍이 매우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의 부녀들이 해방 받은 것이 헬라의 다른 곳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이 도시가 민주 정치를 매우 중요시 하였기에 결국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민주 정치의 한가지 약점입니다. 지도자에 대한 존중이 쉽게 사라졌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바울이 민주 투표에 열중하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전도인을 존중해야 한다. 만약 그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들은 너희들을 인도할 방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민주 정치도 아니고 독재 정치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가 이런 상황인 것을 제가 보았는데, 그러나 교회는 민주정치도 아니고 독재정치도 아니고, 교회는 신권 정치이며, 성령이 통치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충만을 통한 전도인과 성도를 통치합니다. 교회는 민주정치도 아니고 독재 정치도 아닙니다. 전도인이 독재자가 아니고 성도들도 민주를 주장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특별히 전도인을 존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어서 그가 성도들에게 많은 충고를 했으며, 그가 세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다섯가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말했는데, 마치 기관총이 연달아 발사하는 것처럼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빈둥거리지 말고, 핍박을 받았을 때 무서워하지 말고, 연약하지 말고, 인내하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누어 논했는데, 바로 성부, 성자, 성령님 세 분이며, 그가 먼저 성령을 논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 선지자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예언을 쉽게 멸시합니다. ‘선지자의 강론을 멸시하지 말고, 성령의 감동도 소멸하지 말라. 그러나 범사에 헤아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헤아림을 받지 않은 예언을 자주 들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 방면에 관한 매우 실제적인 충고인데, 성령님이 당신의 교회에서 일을 하면, 당신은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마시고, 선지자의 강론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버리십시오.
이어서 그가 하나님을 논했는데, 하나님이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가 오실때까지 너희를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편지의 끝에서 말하기를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거룩’을 강조하는데, 여러분이 입맞춤과 거룩한 입맞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차이는 바로 2분인데, 우리는 이 두개의 차이를 아실 필요가 있으며,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고 애정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로 편지를 끝냈습니다. 이것은 열정이 있는 한 통의 편지이며, 친절함, 격려가 충만하고 그리고 위로가 충만한 편지입니다. 바울의 어투는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몇 개월 후에 기록한 ‘데살로니가후서’의 어투는 매우 냉담하게 변했고, 거리가 매우 멀어졌습니다. 그들에 대해 불만했으며, 기분이 매우 언짢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것일까요?
바울이 이 두 통의 편지를 쓴 사이 기간에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나쁜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첫번째 편지에서 논한 일들을 두번째 편지에서도 거의 모두 논했는데, 중간의 그 단락 변호만, 그 자신의 인격 부분은 더 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데살로니가후서’ 시작에서 여전히 그들을 한바탕 칭찬했는데, 그들이 핍박을 당할 때도 여전히 믿음을 지켰다고 칭찬했습니다. 상황이 그들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고, 원래 바울을 미워했던 자들이 지금은 그들도 미워하기 시작했는데, 바울은 그들이 믿음을 지켰다고 축하했습니다. 그들이 극히 큰 불공평을 당했는데,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보장하기를 공의 하나님이 나중에 그들을 위해 반드시 신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더러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 여섯개가 있습니다. 크리스찬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나중에 그렇게 그들을 대할 것입니다. 이 여섯개 단어는 바로 멸함, 제거함, 심판, 환난, 보응과 영원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로하기를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나중에 이런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이 크리스찬들을 핍박한 사람들을 크게 보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크리스찬을 핍박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끝장은 너무 무섭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현재는 사람들의 불공평한 대우에 맞서고 있는데, 하지만 그들이 나중에 하나님 공의의 심판을 대면해야 합니다. 사람은 두가지 결말만 있는데, 첫번째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영원히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시시각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이 궁극적으로 두가지 결말만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여러분은 비교적 이 세계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두가지 문제가 여전히 존재했는데 바로 그들의 소망과 거룩이었습니다. 그는 이 두가지 문제를 다시 논했는데, 하지만 순서가 상반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교차선을 그렸습니다.
그가 두번째 편지에서 그들이 미래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논했으며, 그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진상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조금 후에 누구의 잘못인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은 그들의 거룩인데, 그가 두번째 편지에서 직업 방면만 논했으며, 다른 사건은 이미 거의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직업 방면에서 더욱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무슨 소망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직업을 버리는 크리스찬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다음은 무엇을 하시라는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들의 소망을 보겠습니다. 원래는 미치지 못했는데, 그러나 또 너무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가 이미 오셨다고 믿고 있었거나 혹은 곧 바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그가 오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에 대해 과격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일상 생활의 일에 대해 무관심했고, 그들은 무엇이든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어떤 청년이 편지로 저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텐데 성경 학교에 가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타서 응당 더욱 많은 영혼들을 구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특히 속히 곧 다시 오신다고 강조하면 사람들은 직업을 응당 내려놓고 나가서 선교사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 압력을 아십니까? 사실 그런 생각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위조 서신을 받았는데, 편지에 예수님이 곧 바로 다시 오시니 그들더러 모든 일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는 바울이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번째 편지에서 마귀는 메시지를 전한 사람을 공격했는데, 지금은 마귀가 오히려 메시지를 공격하여 여러 사람을 속여 쩔쩔매게 하였습니다.
제가 현재 마침 ‘계시록’을 가르치고 있는데, 베신스토크의 한 교회에서 사순재기의 저녁 경배를 인도하고 있고, 그들더러 ‘계시록’을 보도록 인도합니다. 제가 ‘계시록’을 대면하면서 두 종류의 크리스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번째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두번째는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첫번째 크리스찬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 감히 들고 읽지를 못했고, 두번째 크리스찬들은 너무 극단적으로 매일 저녁까지 읽었습니다.
주 예수가 다시 오시는 사건은 오해하기가 매우 쉬운데, 이점은 마귀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당신을 막지 못하면 당신더러 사도에 빠지도록 해치는데, 그것은 그의 계교입니다. 그는 이 계교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공격했고, 그가 사람을 찾아 편지를 취조하여 말하기를 주 예수가 곧 바로 다시 오실 것이니 너희들은 모든 직업을 내려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버렸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곧 바로 다시 오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한가지 일을 논했는데, 이 황당한 거짓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예수님은 곧 바로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들과 말한 한가지 큰 일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그 사건이 먼저 일어나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는 바로 적그리스도를 말하였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 먼저 올 것이라고 하였고, 이 사람은 율법을 아예 존중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라고 자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바울이 이 사람을 악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성경에서 짐승 혹은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반드시 먼저 오고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이 곧 바로 다시 온다는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첫번째 편지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를 언급했는데, 예수님이 곧 바로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들이 반드시 먼저 발생해야 하고, 깨어있는 사람들은 먼저 이 징조를 보게 될 것이며, 징조가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그가 다시 오시기 전의 네가지 주요 징조를 가리켰습니다. 징조를 말씀하고 나서 그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 징조를 보았다면 내가 곧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가지 징조 중에서 저는 이미 한 개 반을 보았는데, 하지만 아직 두개 반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진행되는 속도로 보면 이 징조들이 아마도 속히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징조들이 반드시 나타나야 예수님이 곧 바로 오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속히 오시기를 기대해야 하는데, 하지만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문제였고, 그들은 위조된 바울의 편지 한통을 받았고 편지에 위조된 바울의 싸인이 있었으며, 편지를 쓴 사람이 그들더러 속히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오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사건을 반박하며 말하기를 그 악한 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그때면 우리 크리스찬들은 그 악한 자를 반드시 볼 수 있을 것이고, 무서운 일 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추측하는데, 하이산이 아니고, 그다페가 아니고, 고바치프도 아니고, 많은 추측이 틀렸습니다. 저는 가장 나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네요.
신약성경이 한가지 역사관을 지지하는데, 제가 지금 여러분을 위해 역사 철학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다른 관점들이 많은데, 만약 조심하지 않으면 신분이나 티비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예를 몇 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주 볼 수 있는 역사관 하나를 보겠는데, 바로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헬라인들이 역사에 대한 관점인데, 역사는 끊임없이 순환하고, 끊임없이 되풀이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이 흥하였다고 다시 쇠퇴하고, 역사는 종점이 없고 계속 빙빙 돌기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헬라인들이 역사에 대한 관점입니다. 헬라인들은 이 관점으로부터 또 다른 관점 하나를 파생했는데, 오늘날에 매우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들은 역사가 연속적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고 되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위 아래로 파동은 하고,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으며, 한번은 전쟁하고, 한번은 화평하고, 한번은 통화팽창하고, 한번은 통화 긴축이 되고, 위 아래로 파동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앞으로 나아가지만 종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헬라 관점에서 파생된 한가지 관점입니다.
다음 이 관점은 역사는 점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20세기 초에 매우 유행했던 관점입니다. 역사가 비록 확고하지 못하고 흔들거리지만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점점 진보하고,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990년 때 영국 수상이 말하기를 ‘위로, 위로, 위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라고 했습니다. 매우 듣기 좋고, 기본면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위로, 위로, 위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이런 관점은 역사는 점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초에 자주 듣던 단어 하나인데, 바로 진보, 진보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유행했던 것은 상반된 관점인데, 상황이 갈수록 엉망이라고 생각하였으며, 21세기에 자주 듣던 단어 하나는 생존을 구하는 것이었고 진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관인데, 유대인, 크리스찬과 공산당이 공유한다는 것이며, 이런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있었습니다. 말세 역사관은 상황이 갈수록 엉망이라 생각하여 끊임없이 내리막길을 걷다가 밑바닥까지 왔으며, 그리고 갑자기 좋은데로 전환되었고 또한 계속해서 좋아졌는데, 이런 관점을 말세 역사관이라 하고 성경의 관점이며, 유대 선지자들의 관점이며, 다니엘의 관점입니다.
상황은 갈수록 엉망이고, 그리고 갑자기 좋아지는데, 이것 또한 공산당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 크리스찬과 공산당의 관념 차이는 누구가 관건입니까? 공산당은 사람이 관건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공산당의 꿈은 이미 빠르게 퇴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을 믿었고,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투쟁이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악화될 것이며, 그리고 사회에 더는 계급 분간이 없게 되고, 범죄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관념은 마르코스라는 유대인에게서 왔고, 유대인과 크리스찬들도 이 관점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가 관건인가에 다른 답들을 가지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관건이 하나님이라 하고, 크리스찬들은 관건이 예수님이라 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바로 대세를 반전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역사관이 비록 ‘계시록’에서 더욱 분명하게 묘사했지만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도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적그리스도라는 이 악한 자가 나타나기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을 가볍게 보고 또한 하나님이라 자칭합니다. 마귀가 전에 적그리스도의 자리를 예수님에게 주려고 하였는데, 하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의 말을 듣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왕국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더러 그를 대신하여 적그리스도가 되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함이지 적그리스도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절했습니다.
이 역사관이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역사가 끝나는 순간에 적그리스도라는 이 악한 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라고 자칭할 것이며, 그때면 이 세계는 마귀가 세 가지 화신으로 통제하는데, 바로 마귀, 적그리스도와 가짜 선지자입니다. 이 세 가지 화신은 성부, 성자, 성령을 대신하고, 이 세 가지가 세계를 통제할 때 역사는 바로 끝나게 됩니다. 이때 여러분은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이 오셔서 대세를 반전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에서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예수님이 곧 바로 오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상황이 먼저 악화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더러 침착하고 당황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또 말하기를 이 악한 자가 지금 이미 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데, 하지만 그의 영향은 현재 아직 속박을 받고 있으며, 아직 모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래 어느날엔가 하나님이 속박을 없애면 세계는 매우 무섭게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이 시간은 매우 짧으며, 매우 짧다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에서 삼년 반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42개월이거나 혹은 1260일인데, 여러분이 무슨 단위로 측량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시간은 매우 짧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만약 이 일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이 마치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질서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직업을 논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매우 엄한 말투로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빈둥거리는 자들에게 주지 말고, 일하기 싫어하는 크리스찬들에게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번째는 게으르거나 나태하는 것은 한 가지 죄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잠언’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하지만 여러분들의 교회에서 이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까? 두번째는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인데, 우리가 격려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제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반드시 분명하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 임무가 있는데, 첫째는 크리스찬들 도와 일을 하게 해야 하며, 두번째는 일하기 싫어하는 크리스찬들을 돕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데, 한 청년이 어느날 점심 12시에 저를 찾아와서, 저와 대화하려고 앉았습니다. 계속해서 밥상의 점심을 보며 배고픈 얼굴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참지못하고 저에게 묻기를 ‘당신이 언제 점심을 먹습니까?’라고 하여 제가 ‘당신이 떠나면 바로 먹으렵니다’라고 하니 그가 ‘제가 당신과 함께 먹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제가 ‘안되요. 성경에서 내가 당신에게 식사를 대접해주면 안된다고 했어요’라고 하니 그가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데살로니가후서’를 보여주면서 ‘당신은 직업 학생이고, 당신은 이미 9년된 학생이에요. 당신이 매번 한 과목을 끝내고 나면 또 다른 과목을 공부할 깃이고, 당신이 평생 납세자의 돈으로 책을 읽을 거에요? 일 찾아서 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사회가 당신에게 투자한 것에 환원하려 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정말로 미안해요. 성경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게 하지 말라고 하였어요’라고 하였습니다. 후에 그가 갔고, 매우 기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개 1년 후 우리 집의 벨이 울렸는데, 그가 또 왔어요.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오늘은 저에게 밥을 줄 수 있을 거에요’라고 하여 제가 ‘우리 집에 있는 것을 당신이 모두 먹을 수 있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교회가 마음이 약해서 안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실제와 부합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 크리스찬들더러 예수님이 곧 바로 오신다는 핑계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라. 그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자신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일터에서 충성을 다하며 그를 위해 일하는 것을 보려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비유를 읽었을턴데, 모두 이 중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약 예수님이 곧 바로 오신다 생각하여 충성을 다하면 제대로 준비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당황한 연고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그가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전히 충성을 다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준비된 자입니다. 여러분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이 돌아와서 종에게 그의 돈을 어떻게 처리했냐고 묻든지 혹은 신랑이 장가를 오는 이야기든지 모두는 주인이나 혹은 신랑이 오랜 후에 온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가 시간을 연장한 것은 당신이 잘 준비했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가 다음주 화요일에 오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반응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그가 100년 이내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충성을 다하였습니까? 당신은 그가 당신에게 주신 일을 여전히 잘하고 있습니까?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고 당신이 일하는 태도를 보려는 것입니다. 그는 충성을 다하는 택시 기사를 원할지언정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선교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격을 성취하는 것보다 낫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햄의 아내가 주방에 쪽지 한장을 붙였는데, 거기에는 여기에서 매일 주를 위해 세번 일을 하느니라고 씌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봉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리즈에 한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서 빗자루와 삽을 한쪽에 놓고 하나님께 복을 구했습니다. 그가 청소한 거리는 전 리즈에서 가장 깨끗하고, 그것이 바로 전면적인 봉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일 내용보다 당신이 일하는 태도에 비교적 신경을 씁니다. 당신이 가정 주부이든 혹은 컴퓨터 조작인이든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서는 일반적으로 봉사를 등급으로 나누지요. 가장 고급스로운 것은 선교사인데, 당신이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면 당신의 사진을 교회 복도에 붙입니다. 다음은 복음 전하는 사람이고, 다음 목사이고, 의사와 간호사도 앞 순위에 있는데, 필경 그들의 직업이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선생님은 조금 뒤쪽이고, 택시 기사는 매우 뒤쪽인데, 이런 생각은 근본상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노동력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앞에 배열되었으며, 바로 손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나의 손으로 하는 일에 견고하게 하여 주십시오. 저의 손으로 하는 일에 주께서 견고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목수였고, 바울은 당시 장막을 짓는 사람이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고,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주를 위해 작업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반드시 말씀드리겠는데, 중점은 항상 소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사에서 40년을 일하면서 자신이 주께 봉사하지 못했다고 감탄합니다. ‘당시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진정한 크리스찬 사역 했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 모두는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는 당신과 함께 세계를 치리할 것이고, 그는 믿음직한 사람을 찾아서 법원을 치리할 것이고, 그리고 은행 등을 치리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너희 성도가 성도를 고소하는데, 장래 어느날엔가 너희들은 세상을 심판하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하는 태도로 자신을 예비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가 우리에게 맡겨준 일을 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자신을 잘 예비해서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정말로 그 흑인의 영가를 여러분에게 들려주었으면 하는데, 아쉽게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의 후렴에서 말하기를 ‘그가 다시 오시면 내가 면화 따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늘이 열리고, 왕이 나타나며, 그가 다시 오시면 내가 면화 따는 것을 볼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는 ‘그가 다시 오시면 내가 면화 옆에 꿇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 봉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바로 거룩이며, 바로 전면적인 사역입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전면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맞아요. 제가 응당 모임 시작해서 여러분에게 물었어야 했습니다.
좋아요. 여러분은 제가 한 가지를 빼놓고 강의 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번 우리가 너희를 위해 항상 기도한다고 하였으며, 너희들도 나를 위해 기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후서에서 또 한번 너희들은 나를 위해 기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 사이 두고 있는데, 하지만 우리는 너희들을 잊지 않았고, 너희들은 나를 잊지 않았느냐?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나는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너희도 나를 위해 기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하신 선교사 바울이 의외로 ‘나는 너희들의 기도가 필요하니 나를 위해 기도하기를 마치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많은 서신에서 모두 이렇게 말하였는데, 하지만 여기에서 순서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여기에서의 기도 중점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위해 기도하여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위해 항상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비록 두 곳에서 헤어져 있지만 그래도 서로 도울 수 있고, 우리는 서로를 기도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소개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작은 기쁨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한 두주 전에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편지 봉투에 저의 주소가 있었고, 그리고 헬라 우표 한장이 있었고, 데살로니가의 크리스찬이 저에게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녹음한 비디오테이프가 뜻밖에도 데살로니가까지 전해갔고, 저 멀리까지 갔습니다. 데살로니가 크리스찬들이 이 비디오테이프를 보았습니다. 이 편지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잘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실수로 그들에게 두개를 보냈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를 카빌라라는 곳에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사도행전 16장 11절에서 말한 네압볼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녹음한 비디오테이프가 네압볼리까지 전해집니다.
후에 그들이 한 개를 알바니아로 보냈는데, 거기는 로마서 15장 19절에서 말한 일루리곤입니다. 그래서 비디오테이프가 알바니아로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로 보낸 비디오테이프가 네압볼리와 일루리곤 사람들도 보았는데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그들이 편지에서 저의 헬라어 발음을 웃었어요. 왜냐하면 현대 헬라어의 발음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의 헬라어 발음을 웃었어요. 제가 발음이 표준적이지 못하다고 웃었어요. 이것은 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정말로 너무 멋집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나눈 메시지가 그 곳까지 전해졌고, 우리가 뜻밖에도 데살로니가 크리스찬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 비디오테이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이 메시지를 당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에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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