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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11 고린도전후서 P1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46

고린도전후서(1)




 

시험은 사람마다 모두 만나는 것인데, 바로 지난날에 대한 특별한 그리웁이며, 자신의 인생이든 혹은 시대 전체이든 특수한 시각으로 지난 황금세울을 바라보니 지난 날이 현재보다 아름다워 보이고, 지난날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탄식이 나오지요.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은 교회 역사의 어느 시기를 회고하며 그 시기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며, 그 때 그 시기를 다시 세우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웨일스 부흥 시기를 회고하는 것을 좋아하여 1904년의 대부흥 성황을 다시 언급하며 그 시기가 진짜로 좋다고 느끼지요. 어떤 사람들은 18세기의 감리회 부흥을 회고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영국 사람들은 청교도 시대를 회고하기를 좋아하며, 청교도 시기가 다시 오기를 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교 시기를 회고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16세기에 성행했던 중생파를 다시 열중하는데, 이 교파가 당시에 영국의 많은 크리스찬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더욱 일찍이 있었던 교부 시대나 혹은 신약 시대를 회고하기를 좋아하며, 신약시대의 교회는 반드시 가장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밖에서 오는 압력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제가 먼저 한가지 점을 말씀드리겠는데, 밖에서 오는 압력은 교회를 파괴하지 못합니다. 이는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할 뿐인데, 오히려 교회 내부의 문제가 교회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때를 보겠는데, 이 교회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건립한 교회 중에서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데, 이 문제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멋있는 두 권의 서신서가 없었을 것이고, 고린도전서 13장의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노래가 없었을 것이며, 고린도전서 15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찍이 예수 부활 후에 나타난 성경입니다. 당시 많은 목격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사복음서의 기록보다도 더욱 일찍했습니다.

바울이 이 서선서를 기록하여 다행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회 내부가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성도들이 당을 맺고, 각자가 서로 다른 전도인을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음란 악행을 범해서 교회의 사람들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 성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 어떤 남자가 어머니와 불정상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아마 장모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교도들까지 지적했던 근친상간 관계였습니다. 그들이 성찬을 받을 때에 항상 술에 취했고, 그리고 교회에서 성찬을 받을 때 먼저 온 사람이 떡을 많이 먹을 수 있고, 술을 많이 마실 수 있으며, 성도들이 모두 와서 성찬을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미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는데, 여러분은 그 상황이 상상됩니까? 우리라고 하면 이 교회를 벌서 떠났을 것이며, 이 교회가 너무 엉망이니 절대로 가지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각종 급진적인 여성주의가 있었고, 정말로 해 아래에 깨끗한 일이 없었습니다.

좋아요. 이제 우리 고린도 교회를 한번 보겠습니다. 우선 이 도시를 한번 보겠는데, 지리 위치가 이 도시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린도 교회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도시는 좁은 협곡에 위치했고, 이 협곡은 헬라 육지와 벨로폰네소스를 이어 주었으며, 이것은 아주 좁은 지역인데, 여기에는 아주 큰 뜻이 있습니다. 배가 여기까지 온 후, 만약 큰 배이면 반드시 고린도에 물건을 내려야 하고, 물건을 몇 마일이 떨어진 진 육지로 이동하고, 다시 다른 배에 싣고 동쪽으로 향해 항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교적 작은 배이면 부두로 끌어 올려 바퀴에 놓고, 뒤로 질질 끌고 난 후 다시 출항하는데, 배가 왜서 돌아서 가지 않겠습니까? 지중해에 한 구역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인데, 남미의 합은각과 같이 매우 위험하여 될수록 피해야 했고, 특히 겨울 폭풍우를 만날 때 그 각을 더욱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배가 여기까지 온 후, 만약 물건을 내리지 않는다면 물건을 육지로 옮기는데, 바로 물건을 실은 배까지 함께 육지로 옮기고, 그리고 다시 출항합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중요한 항구였는데, 사실 고린도는 행안과 2마일 떨어져있는데, 자신들의 항구인 리키온이 있습니다. 두개의 성벽이 2마일 밖의 항구부터 고린도 성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는 항구를 통하는 길을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 밖에 산 하나가 있는데, 아코코린도산이며, 만약 그 산 꼭대기에 바라보면, 사실 이 산의 높이는 2000피트밖에 되지 않는데, 하지만 이 산에서 40마일 밖의 아덴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현대 도시로 고대 도시를 비유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여기는 위딩버그 같고, 저기는 라스코 같고, 미안해요. 저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여기는 수준이 비교적 높은 대학 도시이고, 이 곳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각종 예술 활동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는 항구 도시이고, 조선업이 있습니다. 글래스고 사람들이 여기에 거주하고 있고, 위딩버그 사람들이 여기에 거주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대충 느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덴과 고린도는 서로 경쟁하는 대상이고, 스코틀랜드와 같습니다. 이 두 도시는 좁은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곳은 대략 이런 형식입니다.

고고학자들이 고린도에서 많은 유적을 파 내었는데, 특히 1858년 지진 후의 많은 유적들이 드러내었습니다. 이 사진에서 우리 우선 작은 지도를 상관하지 않고, 고린도의 주요 도로가 아직도 바울 시대의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오늘날 이미 모두 파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심판 받던 그 심판대를 찾았고, 또한 많은 유적들을 찾았는데, 그 중에는 유대 회당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하게 많은 고적들을 파내었는데, 모두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과 부합되었습니다. 산이 여기에 있고, 해발 2000피트이며, 산 위에서 40마일 밖의 아덴을 볼 수 있으며, 항구가 이쪽에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는 당연히 맨손으로 배를 육지로 옮기지는 않지요. 그들이 이 깊은 협곡에 고린도 운하를 팠고, 유람선까지 통행할 수 있고, 현재 유람선은 지중해 동쪽에 있어 직접 운하를 거쳐 건널 수 있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네로가 이 운하를 파려다 못했는데, 이 운하는 19세기에 가서야 성공적으로 파서 헬라 북부의 펠로폰네소스에서 줄곧 잘라왔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도시의 배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이는 사실 두번째 고리도 성입니다. 고린도는 두개의 도시를 건립했는데, 첫번재 도시의 년대가 오래 되었고, 매우 부유하고, 이교 풍속이 매우 성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경배하고, 그리고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인 에브라데티를 경배했습니다. 여기에 원래는 큰 절이 하나 있었고, 절에 2000명 되는 여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기생이며, 당시 경배 의식이 매우 자극적이었는데, 바로 절에 와서 여 제사장들과 음행했습니다. 이로 만들어낸 영행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많은 토해인들이 항구에 접안했습니다. 저는 제가 이미 똑똑하게 강의했다고 봅니다. 사실 여자를 고린도인이라고 욕하는 것은 그녀를 창녀라고 욕하는 것과 같고, 그리고 고린도 동화라는 단어도 그리스어의 동사가 되었는데, 뜻은 바로 잡교를 가리키며, 그래서 고린도 도시의 명성은 참으로 부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여 제사장들이 있어서 현지의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여자들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바우리 왜서 고린도전서에서 남녀 관계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도시 고린도가 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이 BC150년 경에 고린도 도시를 파괴했고, 후에 그리스도가 탄생 얼마 전에 그들은 이 도시를 재건하였고, 재건하여 다른 주민들이 옮겨 들어왔는데, 이 주민들의 신분이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노예였고, 현재 다시 새롭게 자유를 얻었을 뿐이며, 어떤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몸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노예였던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 성에 와서 거주했는데, 이는 여기의 지리 위치가 양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는데, 결국 여기가 다시 한번 도덕적으로 부패한 항구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는 여기에 귀족이나 혹은 지식분자들이 매우 적었다는 표시이고, 여기의 대부분은 자수성가한 부자들입니다. 모두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며, 이는 또한 고린도 교회에 어떠한 성도들이 있게 되었는지를 결정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존귀한 자가 많지 않고, 가문이 좋은 사람이 많지 않고, 너희 모두는 보통 사람들이고, 너희들은 하층 사회 사람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들은 장사를 아주 잘 하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노력을 의지했으며,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며, 전에는 노예였고, 현재는 항구에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배경들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들의 사회 배경, 그리고 도덕 배경이 조용히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출신이 비천한 사람은 통상적으로 매우 세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자수성가해 부자된 사람은 통상적으로 매우 세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렇지요? 그들은 자신이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모두 자신이 천하를 얻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신이 좋은 사람은 오히려 겸손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 오히려 매우 세력적입니다. 이런 세력의 마음 상태가 있으면, 전도인들을 비교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교회가 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이 배경이 점차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줍니다.

모든 교회가 똑같습니다. 모두 각양각색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믿은 후에 자신의 배경에서 바로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배경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갑니다. 이러면 문제를 가져오게 되는데, 하지만 영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회 문제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영국의 교회가 사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도덕문제입니다. 사람마다의 도덕 표준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함께 놓으며, 어떤 크리스찬들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살마들은 마셔도 괜찮다고 하며, 서로 다른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어던 곳은, 예를 들어 노르웨이인데, 크리스찬들의 아편 중독이 심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크리스찬들이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고 하고, 이는 도덕적 행위의 차이입니다. 대다분은 원칙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사귀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이 상황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이든 가장 큰 두가지 전쟁은, 첫째 교회더러 세상과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세상을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게에, 이것은 전도인들이 가장 자주 보는 두가지 큰 문제인데, 고린도 성이 특히 이 방면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번째 성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두번째 성은 로마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는데, 첫번째 성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두번째 성은 로마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두번째 고린도 성은 도덕적으로 여전히 부패했고, 모든 것은 로마 율법대로 행했는데, 이는 율법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뜻밖에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에서 법정 소송 상황이 매우매우 보편적이었고, 이런 풍속이 교회에 침해들어왔으며, 성도까지도 법원에 다녔으며, 그들 서로가 법정 소송을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자수성가한 자들, 자수성가해 부하게 된 자들이 법정 소송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했는데, 여러분들은 아주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도시가 재건한 외에 다른 또 복잡한 상황이 하나 있는데, 당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네통의 편지를 썼지만 두통의 편지만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음 얘기할 것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사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이고, ‘고린도후서야말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네번째 편지인데, 다른 두권의 서신은 분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분실된 것이 오히려 좋을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한통은 바울이 너무 급하게 썼는데, 그는 아마 후에 그 편지를 기록하여 매우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 자신도 인정하는데, 당시 너무 급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다른 한통은 너무 엄격해서, 그는 자신의 어투가 너무 엄격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실된 것은 급한 편지와 엄격한 편지입니다.

제가 정리해서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는데, 정말로 복잡합니다. 하지만 제가 될 수 있는 대로 똑똑하게 얘기할게요. 바울이 고린도에 세번 갔었는데, 첫번째,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입니다. 하지만 그가 네통의 편지를 기록했는데, 첫번째 편지, 두번째 편지, 세번째 편지, 그리고 네번째 편지였습니다. 그는 동시에 편지 보내는 사람을 그 곳에 보내서 그 곳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디모데더러 두번째 편지를 보내게 했는데, 바로 현재 성경에 있는 고린도전서입니다. 아주 복잡하지요? ‘고린도전서가 두번째 편지라는 것만 기억하시고, ‘고린도후서는 네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었는데, 하지만 디모데의 성격이 무서움이 너무 많았고, 결국 그가 떠날 때 교회의 상황은 더욱 엉망이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바울에게 보고하기를 상황이 더욱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방법에 대해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디도는 성격이 비교적 강합니다. 우리가 디모데전후서디도서를 나눌 때 이를 다시 논하겠습니다. 디도는 성격이 강했고, 하지만 디모데는 무서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의 임무가 실패한 후 바울이 다시 디도를 보내었는데, 디도는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두 곳에서는 소식이 끊임없이 왕래가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미 고린도를 떠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봉사했으며, 예루살렘도 한번 갔었고, 지금은 에베소를 돌아왔습니다. 에베소와 고린도는 두 곳 사이에 있어서 소식을 끊임없이 왕래했습니다.

우리 이제 처음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바울이 첫번째 고린도에 가서 18개월 머물렀고, 교회가 정상 궤도에 이르르니 떠났는데, 하지만 이 교회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 고린도에서 나쁜 소식을 전한 것을 들었는데,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으며, 그래서 바울은 급하게 편지 한통을 써서 그들을 교정시켰습니다. 후에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에베소에 왔는데, 그들이 더욱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바울의 첫번째 편지가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합니다. 급하게 쓴 편지여서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며,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첫번째 보낸 편지로 인해 강렬한 반등이 있었습니다. 혹 고린도후서6-7장이 이 편지의 일부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측 뿐인데, 우리는 진상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들어보면 급해서 기록한 것 같고, 서둘러 교정했는데, 그러나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움푹 들어간 차체를 수리하는 것처럼이며,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해머로 뒷면에서 움푹 들어간 곳을 세게 쳐서는 안됩니다. 이러면 차체를 격파시킬 수 있는데, 정확한 방법은 움푹 들어간 부위의 주위를 가볍게 두드려야 합니다. 한 면을 가볍게 두드리고, 한 면은 중간으로 이동시켜서 움푹 들어간 곳이 원형으로 획복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을 더욱 엉망이 됩니다.

바울이 잘못된 것을 고치려다 오히려 역효과를 얻었습니다. 글로에 집 사람들이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와서 바울이 바로 회신을 했고, 그리고 다른 세명도 고린도 교회가 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편지에 많고 많은 의문을 제출했고, 그들은 영적인 은사를 이해하고 싶어했고,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이해하고 싶어했지만 그들이 자신의 문제는 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문제 묻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문제는 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글로에 집 사람들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스데반, 브드나도, 아가이고, 의문이 가득한 편지 한통을 가지고 와서, 이로써 바울이 두번째 편지를 썼는데, 즉 현재 성경에 있는 고린도전서입니다. 이를 디모데더로 가져가게 했고, 그리고 이 서신에서 많은 문제를 회답했습니다. 또한 글로에 집 사람들의 나쁜 소식도 논했습니다. 이 편지는 바로 고린도전서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만약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데, 바울은 문제에 답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가 들은 나쁜 소식을 논하고 있습니까? 이래야 명확할 것 같네요. 그렇지요? 그래서 바울이 첫번째 편지를 보내고 난 후 받은 소식은 그들의 상황이 오히려 더욱 엉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걱정이 정말로 무거운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두번째로 그들을 방문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얻었고, 모든 일이 순리롭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같이 어떤 때는 아무리 해도 잘 안됩니다. 결국 바울은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는 더는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떠났습니다. 이때 그가 세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더러 보내게 했는데, 그러나 이 편지는 후에 분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10-13장이 이 편지의 내용과 조금 비슷한 것 같은데, 이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성경의 어휘가 매우 강렬하기 때문인데, 바울의 구절구절마다 풍자의 어투가 가득하였습니다. 선생님들은 모드 알고 있는데, 참기 힘들 때는 풍자한 어투를 사용하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풍자한 어투로 말하기를 매우 쉽습니다. 아무튼 어휘가 강렬한 세번째 편지를 디도더러 가져가게 했는데, 그것은 디도가 문제 해결하는데 있어서 뛰어나기 때문이었고, 바울은 자주 디도더러 남아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디도의 태도는 단호했고, 실사구시적이며, 그들더러 잘못을 고쳐 새사람이 되어라고 명령했습니다. 디모데의 성격은 오히려 담대하지 못했고, 그는 온유한 어투로 말하기를 부탁합니다. 방법을 생각하여 문제를 해결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디도는 말하기를 더는 잘못 나가지 마세요. 속히 고치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디도는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전해온 좋은 소식인데, 교회의 상황이 매우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기뻐서 네번째 편지를 썼고, 다시 디도더러 가져가게 했는데,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세번째인 마지막으로 그들을 방문했는데, 이는 한번의 기쁜 방문이었습니다. 그가 첫번째로 가서 이 교회를 세웠고, 두번째 가는 것은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했고, 불쾌하게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그의 말을 근본상 먹어들이지를 않았고, 세번째 가니 다시 모두 크게 기뻤습니다.

보십시오. 단지 교회 하나가 바울더러 이렇게도 속을 타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두통의 편지를 썼는데, 하지만 우리에게 이 두통의 편지를 주셔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두통의 편지 내용은 매우 다르며, 첫번째 편지는 실제적인 문제를 논했고, 두번째 편지는 그가 모욕 받은 것을 논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모욕에 대해 속으로 매우 분노했고, 바울더러 받아 들이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그들은 정말로 너무 했습니다. 그래서 한통은 실제적은 문제를 논했고, 한통은 개인적으로 모욕 받은 것을 논했습니다. 첫번째 편지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논했고, 두번째 편지에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논했습니다.

좋아요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 두통의 편지 차이점을 알게 되면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편지의 초점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놓았고, 성도들이 응당 있어야 할 행위를 논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편지의 초점은 전도인에게 놓았는데, 전도인들이 응당 있어야 할 행위를 논했습니다. 그래서 두통의 편지 내용에는 확실히 명확하게 달랐는데, 여러분들이 읽으면 바로 주의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는데, 첫번째 편지에는 실제적인 문제를 논했고, 두번째 편지에는 개인적으로 모욕 받은 것을 논했습니다. 첫번째 편지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논했고, 두번째 편지에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논했습니다. 이는 여러분들이 이 두권의 서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자세히 고린도전서를 보겠습니다. 좋아요 여러분, 우리 우선 이것을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먼저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는 하나의 샌드위치처럼 먼저 밖의 빵을 보지 않고 안에 있는 속을 보겠습니다. 이 샌드위치의 밖은 십자가에 박은 못과 부활인데, 십자가에서 못박힘부터 부활이 끝나기까지입니다. 지금은 먼저 이 두개를 보지 않고, 중간의 부분을 보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바울이 두가지 사건을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글로에 집 사람들이 가져온 나쁜 소식이고, 두번째는 세 사람이 가져온 한통의 편지인데, 편지에 많은 의문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래서 샌드위치 가운데의 속은 한가지뿐이 아니라 바울은 들은 나쁜 소식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리고 편지의 의문에 회답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한가지 일을 해결하고 다시 다른 한가지 일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뛰어넘어 논했습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그가 들은 나쁜 소식을 논했는데, 여러분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일련의 이문에 회답했는데, 대략 절반은 그가 들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그리고 다른 절반은 그들이 제출한 의문에 회답했습니다.

바울이 들은 나쁜 소식들은 모두 교회에서 확실히 발생한 문제들이었고, 성도들 당을 짓는 것도 포함되었으며, 음란의 죄를 범했고, 성도가 법정에서 서로 고소하고, 우상 숭배의 바람이 일으켰고, 남녀 사이 관계가 있었으며, 특히 남녀가 교회에서의 역할이었고, 그리고 사람들이 성찬을 받을 때 술에 취했었습니다.

당시의 성찬은 정식 식사였는데, 만약 오늘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 길복 교회에서 가끔씩 이런 성찬을 거행하는데, 각 테이블마다에 위에 모두 컵 한 개와 떡 한 조각씩 있고, 식후에 컵과 떡을 전해 줍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모두 함께 정식 식사를 끝마치고 성찬을 받았는데, 하지만 후에는 정식 식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주요로 고린도 교회가 이 방법을 남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성찬을 떡 조금과 술 조금으로 간략했습니다. 사람들이 떡을 모두 먹지 못하게 하였고, 그리고 술에 취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남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전통을 분실했는데, 여러분은 이 점을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성찬은 본래 애찬이었고, 한끼 정식 식사였습니다. 정식을 먹고 난 후 함께 예수님을 기념하였는데, 만약 이 방법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에서 정식을 먹으면 일반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하면 할수록 더욱 풍성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가족 소그룹 모임의 저녁까지도 하면 할수록 더욱 풍성하려고 하고, 모두가 먹는데로 변했고 기도할 시간이 없어졌는데, 우리 모두는 이런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이러한 문제를 듣고, 이로써 편지를 써서 그들을 교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도 편지로 결혼과 이혼에 관한 일, 그리고 재혼에 대해 물었는데, 중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혼은 범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혼이 범죄라고 하였는데,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그들이 우상 숭배했던 식물에 대해 물었는데, 이는 그들이 산 음식은 이미 우상 숭배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그들이 사온 음식은 이미 우상 숭배했던 것이었는데, 오늘날 뉴질랜드 양고기 같은 것들이지요. 뉴질랜드 양고기가 유럽 시장에서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뉴질랜드의 양고기 해외 판매 시장은 주요로 중동으로 변했는데, 양고기는 아랍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육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동은 뉴질랜드 양고기의 큰 시장으로 변했으며, 그래서 그들이 양을 잡을 때 반드시 먼저 회교 의식을 거행하고, 기도 후에 양을 잡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뉴질랜드 양고기 대부분은 이미 회교 의식을 걸쳤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이것이 바로 당시 고린도가 부딛힌 문제였습니다. 도살장의 양은 잡기 전에 먼저 이미 우상 숭배가 되었고, 그리고 다시 시장으로 보내 팝니다. 이는 크리스찬더러 마음으로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우상 숭배했던 음식을 먹어도 됩니까? 아니면 채식으로 부꾸어야 합니까? 이 고기 제품은 이미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것은 그들이 대면했던 하나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결혼, 이혼과 재혼의 관한 일을 물었고, 또한 우상숭배했던 음식도 물었으며, 그리고 특별히 영적인 은사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들의 교회에 각종 영적인 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할 수 있었고, 예언을 할 수 있었고, 또한 능력을 행 할 수 있었고, 각종 영적인 은사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마다 모두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또한 모두가 영적인 은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도 많은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에는 육적인 정욕도 가득했는데, 은사와 육적인 정욕이 아마도 동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영적인 은사가 있다해도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이로써 합당한 은사를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문제를 물었고, 바울이 편지에 영적인 은사를 논했습니다.

바울이 어떤 때는 문제의 해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부분의 구절들이 조금 난제입니다. 거기는 바울이 그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저기는 바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인데, 이 구절들이 비교적 난제이며, 쉽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 보겠는데, 예를 들어 바울이 어떤 곳에서 말하기를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겠어요 아니면 바울이 그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전체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편지에 제출한 것으로 보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를 보면 그들이 묻는 것인데, 남자가 아내를 취하지 않는 것이 비교적 좋으니라. 바울이 다음에 말한 말이 결혼을 동의한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디가 그들의 말을 인용했는지입니다. 또한 예를 들어 바울이 말하기를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말을 인용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자신의 관점일까요? 그가 이 편지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을 하라고 했기 때문인데, 난점을 보셨습니까? 제가 제출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석과 고린도전서 인용에 조심하시라는 것이고, 반드시 아주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한 말을 인용하는 줄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가 먼저 그들의 말을 인용했고, 그리고 더하여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그러나 다른 부분의 구절들은 매우 명확합니다.

다음 제가 말하려는 것은 고린도전서를 인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목조목 글자대로 하는데, 이렇게 하면 오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습속을 맹목적으로 따르면 안되고, 바울의 원칙을 응당 찾아야 하고, 그리고 다시 우리의 상황에 인용시켜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제가 고린도전서이외의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는데, 오늘날 뜻밖에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예수님이 우리더러 교회에서 세족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고 믿고, 가끔은 교회에서 선포하기를 다음 주일에는 세족 의식이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결국 모두가 교회 오기 전에 발을 깨끗이 씻고 오는데, 이것 보세요. 세족이 하나의 의식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성경의 뜻을 글자대로 인용했다고 봅니다. 제가 알려드리겠는데, 예수님이 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겠어요. 그가 왜서 이렇게 하셨는지를 여러분 아십니까? 답은 그들의 발이 너무 더러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하는 원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흙길로 다녔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발이 더럽고 냄새가 나면 안되잖아요. 밥을 먹을 때 발을 밥상 밑에서 숨기지도 못하지요. 당시는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기 때문입니다. 왼손으로 뻗치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었는데, 나의 발이 바로 옆 사람의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발을 다른 사람 앞에 놓였을 때 반드시 발을 먼저 씻어야 했습니다. 집에서 두번째로 직위가 낮은 종은 자신의 신을 벗는데, 직위가 가장 낮은 종이 그의 발을 씻어 줍니다. 바로 이런 순서대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하였으며, 직위가 두번째로 낮은 종이 되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발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발을 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가 크리스찬들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낮아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뜻은 사람더러 세족 의식을 거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도와 세차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길에서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것은 자동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만약 그때의 방법을 전부 베껴 쓴다면 진정한 원칙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으며, 그를 하나의 의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의 본래 뜻은 사람더러 겸손한 태도로 서로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봅시다. 여자들은 모자를 써야 하나요? 이것은 크리스찬더러 상황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좋은 예입니다. 제가 반드시 말씀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고린도전서에서 모자를 근본상 논하지 않았고, ‘모자라는 단어가 근본상 나타나지 않았고, ‘머리를 가리다라고는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에서 단지 한번만 나타났고, 그리고 그 말은 이렇게 했습니다.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응당 수건을 써야 한다고 근본 언급하지를 않았고, 모자를 써야 한다는 것은 더욱 없습니다. 여기에서 사실은 머리털을 말하고 있고, 여기에서 남자의 머리털은 응당 여자의 머리털보다 짧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짧은 머리만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긴 머리도 논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원칙은 교회에서 당신의 뒤에 앉은 사람이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응당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더욱 깊은 원칙은 남자 여자가 분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모자나 혹은 머리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원칙은 아주 간단한데, 당신이 남자를 보았을 때 응당 그으 머리를 생각할 것이고, 여자들 보았을 때 응당 그의 머리털을 생각하게 됩니다. 머리털로 남녀 분간이 명확해 집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중점은 머리입니다. ‘머리가 여기에서의 중점이고, 남자는 반드시 짧은 머리를 해야 하고, 머리 부분을 노출해야 하고, 여자들의 머리는 너무 짧게 하면 안되고, 이로 머리 부분을 덮어야 하는데, 바로 이런 원칙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칙은 남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분별되어야 하며, 결코 성별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당시 지으신 남자와 여자이고, 남자의 신분과 여자의 신분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으신 성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꾀병을 부리는 것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로 변하고 싶거나 혹은 여자가 남자로 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경배해야 하고, 피조물의 신분으로 그를 경배해야 하며, 그리고 남녀를 반드시 분간해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여자는 여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며, 우리는 남자의 신분과 여자의 신분으로 함께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남녀의 차이를 지우려고 온 마음을 다해 힘쓰는데, 이런 풍속은 남몰래 교회에 들어오게 되어 오늘날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본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원칙은 모자나 혹은 머리털에 있지 않고, ‘머리에 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털로 그들의 머리를 덮어야 하고, 남자들은 그의 머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를 보면 그의 머리가 보여야 하고, 여자를 보면 그의 머리털이 보여야 하고, 여자들의 머리털은 그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각도에서 이 구절을 보겠는데, 여자가 모자를 써야 하는가를 논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의 원칙은 머리를 하거나 혹은 머리를 덮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사회에서 매우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아프리카 사람이 저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의 머리털이 남자들의 머리털과 똑같아요. 머리가 곱슬곱슬 한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알려주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응당 원칙을 붙잡고, 교회에서 어떻게 남녀 분별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중성적인 사람이 아니며, 이것은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남자 여자를 지었고, 그러나 이 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남녀의 사실에 대해 반항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는 남자가 필요하고, 남녀가 다르며, 남녀 서로가 필요하며, 서로 보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눈에 동등한 가치가 있고, 존엄과 직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녀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으며, 책임과 작용이 있습니다. 남녀는 하나님이 지으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할 때 중성적인 신분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의 신분으로 경배해야 합니다. 창조주가 우리에게 성별을 주셔서 찬양해야 하고, 뿐만 아니라 서로 주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 원칙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현대인이 고린도 사람처럼 남녀 사이의 차별을 지우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차별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우리더러 서로 보완하게 하였고, 서로 끌어당기게 합니다. 하나님은 대남자주의를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기사 정신은 가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남녀가 행위에서 분별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남자와 여자의 신분으로 그를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응당 기꺼이 만족하며 해야 하며, 우리의 성별을 창조하신 주님께 감사해야 하고, 바로 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비난할줄만 알고 말하기를 오 저 여자는 모자를 쓰지 않았네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자주 틀리는 인용 두가지가 있는데, 이 두가지 모두는 교회에서 보았습니다. 첫째, 고린도전서 11장을 영적인 아닌 몸에 인용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교회에서 모자를 썼지만 남편에게 순종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 뜻을 아시겠습니까? 여자가 교회에서 모자를 쓴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남편에 대해서는 오히려 얼굴 표전으로 사람을 부렸는데, 그들은 성경을 영적인 것에 아니고 몸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몸에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틀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몸이 있고, 우리의 영은 바로 몸체 안에 거주하고 있고, 그들은 영적으로만 남자가 머리라고 인정하는데, 이는 틀렸습니다. 당신의 행위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는 당신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몸으로 하나님께 경배 드리고, 몸을 산제물로 드려 하나님께 경배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몸과 영적에 모두 인용해야 하고, 이 머리가 되는 기본 원칙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행위에서 나타나야 하고, 이로써 사람들 알게 해야 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남자 여자들입니다.

좋아요. 우리가 여기에서 먼저 멈추겠습니다. 사실 고린도전서에 많은 주제가 있어서 나눌 수 있는데, 하지만 제가 위에 있는 이 예를 써서 표면에 따라 억지로 해결한 결과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려는 원칙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오늘날에 어떻게 인용해야 맞는지를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