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10 로마서 P2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47

로마서(2)                                                       *기디언 LCY 번역




사실 우리가 앞에서 ‘로마서’를 모두 강의하지 못했는데, 지금 제가 이 강의를 완성하겠습니다. 제가 로마 교회 내부의 어떤 문제들을 논했는데,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서신 전체의 관건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문제 해결하려고 방법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각종 교의와 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했지만 주요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긴장된 관계 해결을 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과 이방인인 심각한 대립 관계가 되었습니다. 성전에 높은 담벽이 있었고, 담벽 넘어 이방인의 뜰과 안뜰이 있었고, 벽에 ‘이방인 출입금지’라고 공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한 번은 잡혔는데, 바로 어떤 사람이 그가 이방인을 데리고 안뜰로 들어왔다고 무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육적으로 이방인을 안뜰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하지만 영적으로는 20년간 끊임없이 이렇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기를 ‘중간에 막힌 담벽이 이미 무너졌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성소로 들어갈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계속해서 전한 메시지이며, 결국은 그가 이방인을 데리고 안뜰로 들어왔다고 무고당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바울이 잡혔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매우 관심했던 한 가지 사건이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예수님을 믿었는데, 하지만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 모두는 죄인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는 믿음으로 칭함을 받을 것이고, 너희 모두는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고, 너희들 사이에는 차별이 없으며, 너희 이방인들은 다시는 방종하지 않기를 권하노라. 유대인들도 다시는 율법주의를 지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8장은 성령님의 자유를 논하였습니다. 9-11장은 유대인의 역사를 논했는데, 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논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비밀 하나를 알려드리겠는데, 장래 어느날에 유대인 모두는 돌아올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멋있는 한 가지 비밀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면 그들이 전에 범한 죄를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의 실제 인용되는 부분으로 말하자면 12-16장에서 행위의 문제를 논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긴장 행위만을 논하였습니다.
무슨 행위가 쌍방 관계를 긴장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음식이었습니다. 음식이 첫 번째로 명확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 엄격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우상을 섬겼던 음식을 언급했고, 그가 이 문제를 논한 것은 유대 크리스찬들이 우상 숭배했던 음식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방 크리스찬들은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매 주마다 특별한 날이 있다는 것을 논했고, 그는 쌍방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방 크리스찬들은 주일 지키는 규정이 없었고, 주일을 지키는 규정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사실 일요일은 안식일이 아니고, 일요일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 후의 제8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주 후의 첫 번째 날이고, 일요일은 하나님이 일을 한 주의 첫째 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휴식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응당 토요일에 예배를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사역의 위치에 돌아오심을 기념하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그가 부활 주일에 하신 것이며, 우주 전체를 다시 새롭게 창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창조를 시행한 엿새 중에서 먼저 천지를 지으셨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오히려 먼저 사람을 지으셨고,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을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주 후이고, 그래서 일요일은 모든 크리스찬들이 가장 바쁜 날이며, 일요일은 휴식하는 날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장 바쁜 날입니다. 일요일은 다른 날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일요일에 부어주셨고, 그래서 일요일은 크리스찬들의 축일입니다.
초대 교회는 300년 동안 일요일에 더는 쉬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아침 11시와 저녁 6시 반에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인 규정이 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아침 일찍 4시, 5시 혹은 저녁 9시, 10시에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크리스찬들이 토요일에만 휴식했고, 이방인들은 7일마다 하루를 휴식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규정대로 10일마다 하루를 휴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예들은 근본상 휴식일이 없었으며, 초대 크리스찬들 대부분이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300년 동안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을 때 그 긴장감은 상상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특별한 날인 토요일을 지키고, 이방인들은 오히려 지킬 특별한 날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것은 개인적 결정이니라. 무엇을 하든 모두 주를 위해 하라. 만약 누군가 특별한 날을 지키고 싶다면, 이것은 가능한 것이고, 주를 위해 지키기만 하면 되느니라. 만약 누군가 주를 위해 매일을 지키고 싶다면 이것도 가능하느니라.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개인적 의견이 확고해야 한다고만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마찬가지로 교재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하게 감동 주었다면 이는 당신이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하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모든 크리스찬들에게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은 외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많은 규정이 사실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닌데, 우리는 반드시 어떻게 평화 공존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쌍방 긴장 관계 사이를 처리해야 했고, 심지어 서신 마지막까지 항상 이 문제를 논했습니다. 
교회에 만약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으면 관계는 바로 긴장해 집니다. 현재 갈수록 많은 유대 기독교 교회가 있는데, 여러분 아십니까? 현재 런던에 메시야 교회가 있는데, 그들이 전에 저를 담임 장로로 초청했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당신들이 뜻밖에서 이방인을 담임 장로로 초청한다니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들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제가 현재 사역이 매우 바쁩니다. 그래서 이 책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초청에 감사합니다. 왜서 저를 찾으려고 했습니까?’라고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교회에 유대 성도만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됩니다.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일요일에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말하자면 콘스탄틴 대제가 주를 믿은 후 기독교를 국교로 결정했는데, 저는 이것이 기독교에 대해 매우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크리스찬이 되고, 모든 가게가 일요일이면 문을 닫고, 일요일이면 모두가 휴식하고, 이러면 크리스찬들이 늦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옛날의 방법대로 돌아가서 새벽 4시와 저녁 10시에 예배를 드린다면 누구가 진정한 크리스찬인지 속히 나타날 것이고, 예배만 드리는 크리스찬이 누구인지 속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에서 로마의 많은 크리스찬을 계속해서 논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로마에 많은 크리스찬들이 있는데, 그들은 당시 매우 힘든 사회 상황 아래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더하여 교회 내부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도 있었는데, 이 상황을 이해한 후 우리가 다시 ‘로마서’를 읽으면 이것이 바로 관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요 여러분, 이어서 ‘로마서’의 메시지를 논하겠는데, 반시간만 남았습니다. 제가 응당 무엇을 강의해야지요? 읽으세요. 읽으세요. 계속해서 이 책을 읽으세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가지고 ‘로마서’를 읽는데, 그들은 무궁무진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몇 가지를 언급하겠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보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주의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좋지 않습니다. 자주 뛰어 넘는데 매우 이상하지요? 왜냐하면 이 단어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가 관건이고, 나타나는 숫자가 가장 많습니다. 총 153번 이상이고, 평균 46절마다 한 번 나타납니다. 만약 여러분이 숫자 게임을 좋아하시면 세어보세요. 하지만 그것은 관건이며, 중점은 하나님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당신들 교회의 초점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주’가 나타난 수를 함하면 두 번째로 높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저는 이렇게 합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65번, ‘주’는 43번, 두 개를 함께 합하면 108번인데, 그것은 두 번째로 높게 나타난 단어입니다. 나타난 숫자가 세 번째로 높은 단어가 있는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율법’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어떤 책의 관건은 어떤 단어가 나타나는 숫자에서 왔는데, 이로 보고 중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때는 오해하는데,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괜찮은 지표입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는 번번이 나타났으며, 바울은 끊임없이 율법을 논했는데,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율법주의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이 풍조를 저지하고 돌아와서 교회를 주도해야 했습니다. 만약 전 교회가 유대인이라면 안식일과 음식 먹는 규정을 지키는 것을 어떻게 해도 됩니다. 하지만 현재 교회 대부분이 이방인이고, 유대인들은 다시 새롭게 교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율법 지키는 방면에서 반드시 심중하게 해야 했으며,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바꾸려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라는 단어도 아주 많이 나타났습니다. 낡아빠진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교회에 새로운 목사 한 명이 왔어요.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간 후 집식구들이 그에게 목사님이 무엇을 강의했냐고 묻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목사님이 죄를 강의했고, 목사님이 죄를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를 응당 반대해야 합니다. 바울도 죄를 반대했습니다. ‘죄’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타났는데, 하지만 그는 로마 성의 죄만을 말한 것이 아니고, 크리스찬들 중의 죄를 말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크리스찬이든 비크리스찬이든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대하고,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제가 한 번 종합해 보겠는데, 여러분들이 제가 종합한 것을 들어보세요. 크리스찬은 믿음으로 칭함을 받는데, 하지만 장래에는 행위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이 죄를 범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그가 편지를 한 대상은 크리스찬이지만 바울은 이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 자주 나타나는 단어는 ‘믿음’인데, 우리가 이 단어를 많이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의’인데, 조금 후에 많이 논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40번 나타났는데, 그들이 원래는 죄에서 연합되었고, 지금은 믿음에서 연합되었으며,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다음 관건적 단어는 ‘의’입니다. 아래 이 중요한 글은 ‘의’이며, 특히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러분이 마틴 루터가 어떻게 주를 믿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가 원래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매우 미워했고, 이 단어는 그를 무섭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밖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나무 한 그루가 번개에 맞아 넘어지고 그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의 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옥으로 가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의는 정말로 너무 무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깨끗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후에 어느날에 그가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깨닫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의를 독차지 하지 않고, 그리고 이 의로 우리를 심판할 것이며, 그는 우리와 나누려고 합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 의의 좋은 소식이고,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데, 중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물론 문제가 매우 다릅니다. 다른 곳이라면 이방인의 문제는 불의이고, 유대인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종류 사람이 주를 믿는데 비교적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 들어가기가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한번은 침례회 부녀 연맹에 가서 설교를 한 기억이 나는데, 저는 그런 단체를 그다지 자유롭게 대면하지 못하는데, 마치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지워진 것 같습니다. 어떤 키가 크고 예절도 밝은 여사님이 저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오늘 오후 강사님이십니까?’라고 하여 제가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그럼 무슨 주제를 강의하십니까?’, 제가 ‘은혜’라고 하니 그가 ‘괜찮을 것 같네요’라고 하였고, 그리고 제가 강대에 올라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은혜에는 두 가지 측면의 함의가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나쁜 일을 한다고 천국에 들어가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의 모든 여사님들이 저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들은 이것을 좋아했으며, 들으니 매우 멋있었습니다. ‘둘째 은혜는 좋은 일을 한다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하니 그들이 듣고 바로 얼굴을 붉혔고, 그들은 이런 것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것이 바로 은혜의 뜻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설교 끝난 후 위원장이 제 앞에 왔고, 그는 저를 찾았습니다. 그가 묻기를 ‘설마 제가 한 선한 일은 다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여 제가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헛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당신 개인에게는 도움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그럼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네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저와 말을 하지 않았고, 또한 다시는 저를 설교에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더러 편하지 않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 의는 당신에게 자신의 선행을 위해 회개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회개를 듣고 자신의 악행만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고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의 선행을 위해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행을 위해 회개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배설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마찬가지로, 선지자 이사야의 비유는 여인을 묘사하는데 비교적 합당했고, 그리고 바울의 비유는 오히려 남자를 묘사하는데 비교적 합당하였습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자신의 의가 마치 피투성이의 더러운 천에 오염된 것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의가 아마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영국의 감옥에서 일파만파의 영적인 부흥을 겪고 있는데,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영국 감옥에서 크게 일을 하고 계시며, 그가 감옥에서 복음 전하는 사람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전국 각지에 모두 감옥 밥을 먹었던 전도인이면 사람을 매우 흥분케 할 것이지 않습니까? 저의 한 친구가 주를 믿은 후 과거에 한 가지 죄를 경찰에 가서 자수했는데, 결국 그는 법원에 갔습니다. 하지만 자수했기 때문에 판사는 그에게 경량형을 2개월 선고하였습니다. 그는 투옥되어 복역했으며, 안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모두가 그를 ‘주교’라 불렀습니다. 2개월 후 그는 그가 훈련한 제자들을 반드시 떠나야 했고, 그리고 그는 또 가서 다른 한 가지 죄를 자수해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에게 말하기를 ‘전 영국의 부흥가 중에서 나만 영국 여왕의 전액지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전국에서 이름이 있는 부흥가인데, 여러분이 그의 이름을 응당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로 보아서 죄를 범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로 훨씬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또 기억이 나는데, 전에 캐나다 전국 티비 방송의 사장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잘 생각하지 않고 저에게 방송에서 20분 동안 자유롭게 환담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저는 하나님 나라를 논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듣고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말하기를 ‘우리는 광고로 밥을 먹는데, 반드시 관중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저는 이것을 논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논하기 가장 종하는 주제이며, 또한 예수님도 가장 좋아하는 주제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럼 좋아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제가 카메라에 20분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의했고, 스튜디오 안 전화기에 관중들이 전화를 걸었는데, 첫 번째로 걸려온 전화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안녕하세요. 저는 창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토론토시의 양요가에서 매춘을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제가 방금 당신의 방송을 보았는데, 제가 한 가지 문제를 묻고 싶어요’라고 하여 제가 그녀에게 ‘무슨 문제입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저는 어떻게 하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그에게 ‘당신이 왜서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까?’라고 하니 그가 ‘제가 자신의 인생에 진정으로 대면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할렐루야 내가 전한 복음이 맞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좋은 사람이 당신의 메시지를 좋아하면 당신이 전한 복음은 반드시 틀렸을 것이고, 만약 나쁜 사람이 당신의 메시지를 좋아하면 당신은 맞게 강의한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복음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며, 자신을 의지하여 의가 될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의를 얻어야 하며,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아닙니까? 하지만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 그리고 부륜사에 투입하여 자선 사업을 기다리는 사람들 한테는 오히려 나쁜 소식이고, 그들은 복음 받아들이기를 매우 어려워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많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악에서 돌아서는데, 하지만 선행에서도 돌아섭니다. 저는 전도인들이 선행을 위해 회개하라는 것을 그다지 들어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선행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당신더러 자신이 매우 좋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는 참으로 매우 슬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구하기만 하면 그가 주실 것이며, 이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비참하게 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인도와 복을 달라고만 구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정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주여, 이 죄인을 긍휼이 여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듣습니다. 그러면 천국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긍휼히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긍휼’을 언급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공의 주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에게서 의를 가져가라. 너희 자신의 의는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의의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의 문제는 불의이며, 그들은 의를 강망해야만이 그리스도를 받고 싶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문제는 너무 많은 의가 있으며, 그들은 스스로가 좋은 사람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논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구속의 하나의 과정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회수한다고 논했을 때 여러분 모두는 웃었어요. 저는 지금 비교적 자주 회수하는 것으로 구원을 해석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알기 때문입니다.
‘구속’이라는 단어와 가장 가까운 것은 ‘폐기물 이용’인데, ‘안전’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만 구하는 것을 제가 발견했는데, 복음의 중점은 다른 사람에게 안전을 주는 것이 아니고 폐기물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입니다. 어떻게 회수하고, 사람을 쓰레기 더미에서 어떻게 구출하여 다시 새롭게 회수하고, 다시 새롭게 하나님께 사용되는가입니다. 회수 과정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지난 주 일곱명이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러면 제가 그에게 ‘이 일곱명은 이제야 구원의 길을 디덛고, 구원은 하나의 과정이며, 아직 완전히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 남방 흑인 목사님의 기도에 깊은 동감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주여, 저는 하나의 반성품일 뿐입니다. 저는 장래의 완성 모습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있는데, 하지만 주를 찬양하며, 저는 그 전의 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는 아직도 구원의 길에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의 ‘구원’이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현재 구원의 길에 있으며, 장래에 반드시 완전하게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성경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구원하러 올 것이며, 우리는 아직 완전하게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육안으로 보고 있는 저는 아직 완전히 구원 받지 못했고, 저는 장래에 새로운 몸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나는 장래에 33세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60세가 된 사람에게 말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33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촉박한데,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여기에 계신 젊은 분들은 아마 흥미가 없을텐데, 상관없어요. 우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희머리칼이 있는 분이 몇 명 있는데, 제가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인 것 같네요.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저의 몸은 아직 구원 받지 못했으며, 저의 몸에 일부분이 아직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답하기 매우 어려웠던 문제에 부딛혔었는데, 한 사람이 우리 길복 교회에 처음 왔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왔다는 것을 제가 알았고, 그가 있는 곳이 우리와 멀지 않아서 제가 가는 길에 차로 그를 집에 데려다 주고 싶었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 그가 저의 차에 탔고, 저는 그를 집으로 태워 주면서 그에게 모임이 어땠냐고 물었고, 우리 교회는 처음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그렇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모임이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괜찮았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그에게 ‘당신 느낌에 설교가 어땠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당신이 방금 예수님이 당신더러 당신의 죄에서 벗어나게 구하여 주었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맞아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라고 합니다’라고 하니 그가 ‘그가 당신의 어떤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는지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와우! 이 문제는 대답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저는 매우 부끄럽게 인정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첫 번째 죄는 사실 아직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비크리스찬을 통하여 저에게 ‘네가 나더러 너를 구워하지 못하게 하느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티켓 한 장을 주려는 것 뿐만 아니고,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려는 것 뿐만 아니고 그는 우리를 구하려고 오셨으며, 그는 우리를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우리를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죄를 없애고 세상 사람들더러 중생하게 합니다. 몇 명이나 당신은 이미 당신의 죄에서 구출되었다고 말 수 있습니까? 당신은 구원의 길로 가고 있고, 이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바울이 서신에서 언급한 몇 가지 단어를 보겠는데, 하지만 그는 아래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학자가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제가 설명하겠는데, 만약 여러분이 보고서야 무슨 뜻인지 알것이라 하고, 만약 여러분이 ‘로마서’의 해석을 읽으면 이 세 가지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즉 의롭다 침함, 거룩과 영광을 받음입니다. 저는 이 단어들을 매우 싫어하는데, 이는 라틴 영문이며, 라틴 영어는 모두 매우 길며, 음절이 많고 추상적이어서 저느느 싫어합니다. 그래서 좋은 전도인은 참 영어를 사용합니다. 참 영어는 ‘피, 눈물, 수고와 땀’입니다. 라틴 영어는 오히려 ‘희생, 고통, 수고와 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위의 어느 단어가 비교적 알기 쉽다고 생각합니까? 말은 땀을 흘리고, 남자는 땀을 흘리고, 여자는 땀을 흘리고, 각각 서로 다른 단어로 묘사했습니다. 
아래 세 가지 단어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우리 함께 봅시다. 우선은 의롭다 침함인데, 뉴기니에 영어 성경 역본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여기의 어떤 분은 뉴기니에 다녀오셨지요? 저는 여러분이 어디에 앉아 계시는지 모릅니다. 이 영어 성경 역본은 사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의롭다 칭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하지만 그들은 ‘의롭다 칭함’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하였느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매우 멋있지요? 여러분의 얼굴 전체가 밝아졌는데, 왜냐하면 번역을 정말로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그 사람은 이미 괜찮다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떻게 말하든지 나의 책에 그는 이미 괜찮으니라는 것입니다. 의롭다 칭함은 바로 이런 뜻이며, 매우 아름다운 복인데, 하지만 이것은 구원 받는 첫 걸음 뿐입니다.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며, 이 형벌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괜찮으니라. 너는 나의 자녀이니라’고 합니다. 세상 다른 종교는 모두는 선행만 하면 하나님과 화목한다라고 하였는데,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너는 이미 괜찮다고 말합니다.  
제가 영국 북부에서 온 사람 한 명을 알고 있는데, 그는 그 곳의 소년 감화원의 원장입니다. 감화원에 한 남자아이가 있는데, 그는 계속 감화되지 않으며, 그는 양면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했으며, 모든 방법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소년은 매우 반항적이었습니다. 하루는 저의 친구가 그 소년을 사무실로 불러서 ‘나는 이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너를 감화하려고 했고, 이젠 마지막 한 가지 방법만 남았는데, 하지만 먼저 너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내가 너를 나의 아들로 입양하려 한다. 네가 나의 성을 따라야 한다. 만약 네가 또 말썽을 일으키면 나의 성을 더럽히는 것이고, 너를 이 감화원에서 떠나게 하여 우리 집에서 있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은 머리를 들고 그를 보았습니다. 그가 소년에게 ‘동의하냐?’라고 물으니 소년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소년은 이제부터 고쳐서 새롭게 되었다면 제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인데,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시작하여 확실히 고쳐서 새롭게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더러 먼저 의롭게 하려고 했고, 또한 우리더러 거룩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먼저 죄의 형벌을 없애야 한다. 너는 이미 내가 입양해서 한 가족이 되었고, 지금부터 더럽히는 것은 나의 이름이다. 너는 감화원을 떠나야 하고, 율법을 떠나 은혜로 들어가 입양될 것이라는 이것이 구속의 시작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면 이미 완전한 구속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한 시작점으로 가는 것 뿐입니다.
이어서 구원 받는 두 번째 부분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에서 벗어난 후 흐틀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지금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다시는 죄의 관할을 받지 않습니다. 거룩과 의롭다 칭함은 똑같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 자신이 의지함으로 거룩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믿음이 필요하고, 시시각각 믿고 의지하여 장래 어느날엔가 모든 과정을 끝내고 영광을 받게 되고, 죄의 시험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시험이 없으며, 여러분은 그 상황이 상상됩니까?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그야말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원래 이렇습니다. 신학자가 이 의가 우리에게 온다해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하 칭함을 받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의 불의를 덮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귀속되면 바로 그리스도를 쓰는 것입니다. 이젠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 그리스도만 볼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졌고, 이 의가 우리에게 속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누어 줄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우리만 덮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에게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가 그 밑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 이 의는 우리에게 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도 의인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모든 과정을 끝내면 영광에 서 있게 되고, 하나님 본체를 보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더러 그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그래서 구속이라는 주제를 사용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하도록
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로마서’의 대강을 보겠는데, 제가 더는 상세히 논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서 대략적으로만 소개하겠습니다.
‘로마서’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명확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는 이 세 가지 미덕을 계속해서 언급했으며, 특히는 ‘베드로전서’입니다. 하지만 처음 4장에서는 모두 믿음을 말했고, 이어서 5장에 ‘소망’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나타났으며,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과거를 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능력을 보는 것이며, 하나님이 곧 무슨 능력이 있으신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서만 아니고, 유대인에게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12-16장에서 세 번째 글자인 사랑이 나타나고, 목전의 상황을 관심하고,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아래 이 대강이 필기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 저는 이미 모든 힘을 다해 가장 간단한 대강을 생각해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저에게 아직 더욱 길고 더욱 상세한 대강이 있는데, 하지만 제가 그를 감히 꺼내지를 못하겠네요. 왜냐하면 우리가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제가 로마서의 구조를 강의하여 여러분더러 전체 개념이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나누는 방식을 비교적 좋아해서 제가 강의하려는 내용을 분석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큰 항목을 나누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큰 항목을 다시 작은 항목으로 나누는데, 어떤 때는 여러 층으로 나누고, 마치 A항목의 첫 번째 처럼입니다. 그리고 아래로 다시 작은 항목 몇 개를 나누고, 그리고 작은 점 몇 개를 나누는데, 이런 방식으로 나누면 성경 구조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댕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먼저 시작과 끝나는 문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논하였는데, 그는 그가 말하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을 직접 점출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바로 성부,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여기에서 또 모든 대상에게 문안을 했는데, 바로 로마의 크리스찬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끝나는 곳에서 그의 메시지를 논하지 않았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논하였는데,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로마서 15장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메시지를 들었고, 나의 생활 방식을 보았고, 또한 기적도 직접 보았느니라. 나는 완전히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였기에 너희들에게 명확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였기에 복음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전할 수 있었느니’'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날 알바니아입니다. 그의 방법은 메시지, 행위와 기적을 통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메시지, 선행과 기적을 말하는데, 메시지, 행위와 기적 이들 중에서 두 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는 귀로 듣는 것이라는 것을 주의하셨습니까?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이 귀로 두 번 듣는 효과인데, 하지만 눈으로 두 번 보고 귀로 한 번 듣게하는 것은 매우 좋은 전달 방식입니다. 사람은 복음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보려고 기다립니다. 그들은 복의 효과를 볼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보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복음의 효과를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이 바로 이렇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생활 방식과 기적으로 그가 전하려는 복음을 드러냈는데, 우리 모두는 그를 응당 본받아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안했는데, 먼저는 전체에게 문안했고, 그리고 개인에게 문안했는데, 장 전체가 문안이었습니다. 
시작과 끝나는 문안을 논했으니 이젠 바울의 세 가지 단계의 주요 변론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주요 단계마다에 세 개의 작은 단계를 나누었는데, 이 내용은 억지로 귀납해낸 구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읽어보면 이 구조가 상당히 명확하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고 조리가 분면한데, 그의 논점을 하나하나씩 제출했습니다. 그가 붓을 대기 전에 이와 같은 대강을 먼저 작성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 대강은 전체 구조와 잘 맞았습니다. 앞 여덟장에서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 전한 것을 논했는데, 그는 항상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 빚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느낌이 있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우리가 다른 종교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권리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권리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진 빚이라는 것을 알아야 빚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빚을 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것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이며, 우리는 단지 빚을 갚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왜서 당신에게 복을 주십니까? 만약 당신이 암병을 치료하는 밀방을 알게되면 당신이 모든 환자에게 알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이 암병을 치료하는 밀방을 사람들에게 알릴 권리가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는 그들에게 빚을 졌고, 나는 말할 책임이 있느니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그의 복음 메시지 중의 중심이 바로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가 로마와 세계 다른 종교에서 나타났고, 또한 사회에 대한 분노에도 나타났느니라. 하나님의 분노 증거는 바로 세상에서 인류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데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변태되었는데, 이런 현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욕심이 끝이 없게 되었고,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변태적인 관계를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한 분노가 그의 의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여 이 의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우리더러 그의 의를 얻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이중적인 대신 뜻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돌리는 것을 매우 즐거워 하며 말하기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이미 옮기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한 가지 목적만 있는데, 바로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죄가 없었는데,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있게 되었습니다. 왜서일까요? 우리더러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더러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래는 정말 너무 수지가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모든 죄를 나에게 주어라. 내가 나의 의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의를 우리에게 주었고, 일단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이 의는 바로 우리에게 오게 되는데, 정말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의는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완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성령의 생명을 의지해서야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셨고, 우리더러 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관념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부노,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령의 생명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성부, 성자, 성령님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였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이어서 또 말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분노가 범죄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임하였으며, 하나님의 분노가 유대인의 의와 이방인의 불의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도움이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생명을 쫓아야지 율법주의나 방종을 쫓아서는 안되고, 성령의 자유와 생명을 쫓아야만이 죄와 죽음의 악성 순환에서 벗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9-11장에서 주제가 ‘의’에서 이스라엘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이 다시 세 가지 점을 들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에는 나머지 백성만 남게 되며, 모든 유대인이 진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머지 백성을 계속해서 보류했고, 하나님이 칠천명을 보류했는데, 이 칠천명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많은 유대인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를 믿는 나머지 백성들을 계속해서 보류하였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 크리스찬들이 계속해서 있었으며, 비록 숫자는 매우 적었지만 있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현재 유대 크리스찬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적어도 5만명이 되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로 ‘할렐루야, 우리가 미래의 상황을 예견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 나머지 백성들이 있는데, 아쉽게도 10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현재 그들이 복음을 끊임없이 막을 것이고,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는 과거 2000년 동안 반유대 풍조 때문이고, 다른 방면은 그들의 자존과 자의를 어겼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율법주의를 지킬수록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갈수록 어려워 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은 제가 사람들과 이스라엘을 갔었는데, 아마도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저와 동행했던 분도 계실거에요. 죄송해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시간이 이미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미래에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로마성에서 언행을 응당 어떻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권하였는데, 마치 납세 같은 것, 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등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 장절대로 귀납한 대강이 여러분들이 바울의 논술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릴 수 있는데, 여러분이 ‘로마서’를 잘 읽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읽고 연구하기에 가장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어떤 사람은 곧 닥쳐오는 핍박과 감금을 대면할 때 ‘로마서’를 외워 자신이 그런 지경에 대면할 예비를 한다면서 이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서 그들더러 어느 때나 나를 따라오게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긴 서신이며,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그리고 뜻이 깊은데, 하지만 만약 자세히 읽고 연구하면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고, 무궁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에수를 위해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