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2)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하지만 ‘고린도후서’를 강의하기 전에 제가 반드시 한가지 중요한 일을 언급하겠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의 도시이기 때문에 비록 로마 제국에 속해있지만 여전히 헬라어를 깊이 받아들이고, 헬라 사상, 그리고 헬라 철학의 영향도 깊이 받았지요. 마치 우리 서방 문명이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민주정치’ 같은 단어가 바로 헬라어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민주정치’ 같은 것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민주정치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상이 바로 헬라 사상에서 온 것이며, 그리고 스포츠 운동도 헬라에서 온 것입니다. 바울이 한 두개의 예를 든 외에는 성경에는 스포츠 운동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포츠 운동은 이 나라에서 이미 한가지 종교 신앙이 되었고, 스포츠 운동은 헬라의 벨로폰네소스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것들이 모두 헬라에서 온 것들입니다.
헬라 사상은 몸과 영혼은 항상 분간하고, 그들은 이를 절재로 한데 섞어 동일 사물로 논하지 않는데, 이는 가장 엉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헬라 사상에 몸은 지위가 없고, 그들은 몸과 영혼은 서로 다른 일로 생각합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의 생각이 이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이고, 우리의 임무는 단지 영혼 구원이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히브리 사상은 이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몸과 영혼ㅇ르 한 몸으로 보고, 사람은 몸으로 호흡하는 영혼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은 몸의 구원이기도 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히브리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주요 문제는 그들은 몸과 영혼은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내면의 일만 추구하는데, 사실 몸도 영혼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몸과 영혼 모두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 사상은 사람이 한번 죽으면 몸은 죽고, 영혼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영혼은 썩지 않는 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썩어질 영혼이 썩지 않는 육체에 거주하면 사망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몸이 매우 중요합니다. 크리스찬은 영혼이 썩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그것은 헬라 사상입니다. 우리는 몸이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데, 그것은 히브리 사상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육체에 대한 많은 견해들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몸과 영혼을 서로 다른 일로 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세가지를 하는데, 첫번째 방법은 바로 몸을 방종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몸이 무엇을 했던지 영혼에 영향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인데, 바로 방법을 대서 생활에서의 욕망을 제거하는데, 하나의 금욕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자신의 몸을 숭배하는 것이며, 몸의 완벽한 조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풍속이 서방 문화에 전해 들어왔고, 헬라 조각상들 모두는 벗은 몸이며, 운동 선수들도 벗고 시합을 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육체를 숭배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육체를 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너희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몸을 대하는 방식이 너희 영혼에 영향을 줄 것이며, 성찬 받을 때 술에 취한 것이 이미 너희 영적 삶에 영향을 주었고, 그리고 기생집을 드나드는 것이 그리스도와 창녀를 연합한 것과 같으니라 너희 몸이 현재 이미 그리스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몸에 대해 불 정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믿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것은 몸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몸에 대해 여전히 불 정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몸도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중에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기도문이 있는데, 나의 몸이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게 하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정상적으로 배출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온몸이 쾌적하게 하여 주셔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런 기도가 너무 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크리스찬들의 화장실을 보았습니다. 벽에 성경 말씀을 적어놓고, 옆에도 성서들로 쌓여 있는데, 이러면 저더러 화장실에서 일 보는 것을 잊게 하고, 오히려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몸을 위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나중에 당신이 늙어서 배출 기능이 상실되면, 몸이 건강할 때 하나님께 제대로 감사하지 않는 것에 후회할 것입니다. 그것은 히브리 사상이며, 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몸은 성령의 전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모두 몸과 관계 있고, 몸에 대한 방식, 머리털의 길고 짧는 것 모두는 영적의 일부분입니다. 당신의 영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몸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상이 몸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를 가져다 주었고, 현재 많은 크리스찬들이 헬라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영적인 은사가 사실 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경배는 응당 내적으로만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며, 어찌 몸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지요. 두손 높이 드는 것은 너무 이상하고, 응당 영혼으로 경배를 들여야 한다는 바로 이런 관념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은 몸의 동작이고, 외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내적과 영적인 것만 중시합니다.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설마 몸으로 경배하는 것은 영적이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당연 영적이지요. 이것은 히브리 사상입니다. 그들이 경배할 때 하나님 향해 손을 들고, 주님 앞에서 춤을 추는데, 그들은 몸은 바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조용히 앉아 있고, 몸은 그냥 그대로이고, 입으로만 경배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고린도전서’의 중점입니다. 어떤 영적인 은사는 육체에서 나타나고, 기적, 치유 모두는 육체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영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까? 사람의 몸에 하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육체에서 나타나고, 외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것을 강의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의 주요 문제가 바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이고, 고린도 사람들은 독신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욱 거룩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바로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어거스틴 후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성관계는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 사상과 완전히 반대되는데, 왜냐하면 이미 결혼한 사람이어야 유대 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독신인 사람은 근본적으로 제사를 담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신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영적인 은사입니다. 하지만 이런 독신은 매우 다른데, 독신은 기혼보다 거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상입니다.
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면 원칙을 가져 오는데, 그것은 고린도 사람들은 사랑의 참뜻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은 일에 사용하는데, 우리도 동일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영적인 은사를 논할 때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이 많은 교회와 상관이 없는데, 이는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이런 은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읽는데, 그것은 헛 읽는 것입니다. 사실 12장은 영적인 은사를 논하고, 14장도 영적인 은사를 논하는데, 이것은 일련의 주제입니다. 12장에서는 무엇이 영적인 은사인지를 논하고, 13장은 영적인 은사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논하고, 그리고 14장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입니다. 영적인 은사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하지만 모두는 영적인 은사, 방언 등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보고도 못 본 체하는데, 하지만 백지흑자에 아주 명확하게 기록했으며, 바울이 너희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에 사랑을 표달하는 단어 몇 개를 보겠습니다. 그들은 글씨를 우리보다 더욱 신중하게 사용합니다. 우리는 무슨 물건이든 모두 사랑이라는 글씨 하나로 묘사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단어로 서로 다른 사랑을 묘사합니다.
세가지 측면의 사랑이 있는데,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애정인데, 정욕으로부터 비롯되고, 외면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두가지 단어로 이 사랑을 묘사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면적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입니다. 정면적인 애정의 단어는 EROS인데, 비카디의 애신 조각상이 EROS로 명명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응당 AGAPE로 명명해야 맞습니다. 샤브츠버리 백작의 무한한 사랑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큐피트가 아니고 응당 자비로운 천사여야 합니다. EROS 이 단어에서 erotic ‘성애’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성애를 표달하는 부정적인 단어는 epithumia인데, 가장 부패한 정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Eros가 반드시 부정적인 뜻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Epithumia가 오히려 강렬하게 부정적인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epithumia로 잘못된 성관계나 혹은 잡교를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성애적 행위, 이런 사랑은 서로의 흡인력 위에 건립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을 이끌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는데, 이것은 순수히 육체와 연관이 있으며, 몸과 연관이 있으며, 순수히 느낌을 의지합니다. 조건이 있는 사랑인데, 조건은 바로 상대방이 반드시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일단 흡인력이 사라지면 우리가 상대방에 대한 정욕이 바로 사라지게 됩니다. 아마 많은 혼인들이 이런 기초 위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흡인력이 일단 년령과 함께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정욕에서 오는 성애입니다.
다른 하나 사랑의 단어는 philadelphia인데, phil 사랑과 Adelphia 형제라는 두 글자로 구성되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호감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이끌림이 아니고 좋아한다는 묘사인데, 기본적으로는 뜻과 취향이 서로 맞는다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친구들과 좋은 것은 뜻과 취향이 서로 맞기 때문이고, 이런 감정의 친밀함이 마치 형제 정 같습니다. 두 남자나 혹은 두 여자 사이의 우정이기도 합니다. 제가 하는 김에 언급하겠는데, eros 사랑은 남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epithumia는 두 남자나 혹은 두 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바로 동성애입니다. 하지만 philadelphia는 우애 같은 느낌이며, 뜻과 취향이 서로 맞고, 서로 아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지성이며, 제가 학술적인 교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사상적인 교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의뢰하는 느낌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의뢰하며, 상대방의 생각을 의뢰하고, 그리고 품격과 흥취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사랑 단어의 묘사는 헬라인들이 매우 적게 사용하는데, 이런 사랑이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AGAPE의 사랑은 관심, 바치는 사랑이며, 이런 사랑은 다른 사람을 관심하고, 이런 사랑은 상대방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랑은 관심을 갖게 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에 주의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랑은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았다면, 그 사람을 관심하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임 장소 같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뜻과 취향이 서로 맞고, 서로 좋아합니다. 관심을 갖고 돌보는 것은 누군가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와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왕따당한 사람과 말을 하려고 결정합니다. 그것은 agape 사랑이고, 관심을 갖는 사랑이며,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이기도 하고, 사랑하려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세가지 사랑 중에서 단 한가지 사랑만이 의지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는 두 사람이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지 못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억지로 연애하게 명령해도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더러 서로 관심을 갖고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슨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그가 매력적인 곳이 없고, 그가 나에게도 흡인력이 있어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고, 심지어 나에게 감사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문둥병자를 치료하는데, 그가 나에게 감사하든 하지 않든 치료하는데, 이는 당신이 거룩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는 이 단어를 매우 적게 사용하는데, 이는 이런 사랑이 있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애정과 우래는 아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인데, 하지만 주동적인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적고도 적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매력이 있기 때문에 아니고, 우리가 귀엽기 때문에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서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까?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좋은 국민이기 때문에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을 택하여 돌보셨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노예 무리였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관심으로 사랑’이 ‘사랑’보다 더욱 친근합니다 agape. 고린도 사람들이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자기를 버리는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첫번째는 성애이고, 두번째는 우애인데, 이것이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는 것은 가장 위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관심으로 사랑해 주셨는데, 이것은 사랑의 가장 높은 층차입니다.
교회에 만약 agape 이런 거룩한 사랑이 없다면, 영적인 은사가 나타날 때에 반드시 분열을 야기할 것입니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영은의 일 때문에 분열되는데, 그들이 거룩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영적인 은사가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거룩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믿고, 범사에 소망이 있고, 범사에 인내합니다. 만약 당신이 거룩한 사랑이 있다면 영적인 은사를 선하게 사용할 것입니다. 거룩한 사랑이 없다면 위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영적인 생명이 성숙하면 반드시 거룩한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과 거룩한 사랑이니, 성애는 존재하지 않고, 우애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니라. 많은 교회의 분위기가 포근한데, 이는 모두가 뜻과 취향이 서로 맞기 때문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음악으로의 경배에 있어서 뜻과 취향이 서로 맞기 때문에 팀이 구성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룩한 사랑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랑은 비록 취향은 다르지만 여전히 서로 관심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데, 이것은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좋아요. 여러분, 이젠 제가 ‘고린도전서’를 총결 짓겠습니다. 이 샌드위치 사이의 속은 교회에서의 여러가지 문제들이고, 그리스도 지체의 원칙, 그리고 사랑의 원칙을 인용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편지의 처음과 끝에서 두가지 매우 기본적인 일을 논했는데, 첫째는 그들이 십자가를 점점 잊고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서, 왜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영혼이 구원될 수 있나요? 또 육체와 연관이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대햐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고,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만약 십자가를 떠나면, 많은 일들 때문에 분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 묻기를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아볼로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베드로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왜서 각자가 일반인의 지도자를 옹호하는가? 그들이 너희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정기적으로 성찬을 받아 십자가를 기념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힘을 기념하느니라 너희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은 너희 전도인이 아리나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일반적인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부에 분열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바울파이고, 어떤 사람은 베드로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의회라고 하고, 순회파 등이라고 하는데, 제가 더는 이름을 지명하지 않겠고, 아주 많습니다. 이 분열 중에서 작은 무리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관점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제가 가끔은 큰 도시를 가는데, 예를 들면 제가 버밍엄으로 갑니다. 이런 상황이 사실 많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버밍엄 이 큰 도시에서 ‘정통적인 버밍엄 기독교 교회’라고 이름을 붙힌 작은 교회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버밍엄에서 유일한 기독교 교회처럼 말하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다른 종교에 상표를 붙입니다. 자신들만이 정통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하는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는 마음 상태가 아마 완전히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 중에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이 베드로파라고 하는 것과 똑같이 나쁘니라. 너희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렸느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절대로 잊지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고린도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논했는데, 이는 그들이 헬라 사상의 영혼은 썩지 않는다는 설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이 부활한다는 것을 믿기가 매우 어려웠고, 천국이 만약 육체가 있다면 천국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하얀 옷을 입고 공중에서 떠다닌다고 생각하여 공포적인 신기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우리는 장래에 새로운 몸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피와 살이 있는 몸이고, 만질 수도 있고, 부딛힐 수도 있으며, 나는 새로운 몸으로 바꾸려는 것에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새로운 몸이 있었고, 그는 물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아침 식사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래에 그렇습니다. 장래에 새 하늘 새 땅도 있을 것이고, 장래에 우리는 새로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 새 땅에서 거주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헬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해 많은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어떤 사람이 예수 부활을 친히 목격한 것을 가장 일찍이 기록한 문헌입니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는 몸, 몸입니다.
좋아요. 제가 지금 ‘고린도전서’를 반드시 끝내고, ‘고린도후서’를 속히 논해야겠습니다. 제가 ‘성경’ 전체를 강의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개론만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매 권마다 체험하고, 여러분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리고 읽으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고린도후서’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구조가 없는 서신입니다. 개인적인 많은 심경을 드러냈고, 거의 자서전과 비슷하며, 바울은 자신의 생애를 논했습니다. 만약 첫번째 편지는 성도들 대해 기록했다면, 두번째 편지는 바로 전도인을 위해 기록했는데, 교회 전도인들은 응당 정기적으로 ‘고린도후서’를 읽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보고 느낀 점을 논했고,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보고 느낀 점을 논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와 바울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 관계에는 두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번째 단계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전도인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에 대한 하나의 테스트입니다. 우리가 버킹엄셔 성 베드로 교회를 떠난 후에 한 여사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말하기를 ‘사랑하는 목사님, 당신이 떠난 후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게 변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너무 귀여워요. 여러가지 다른 해석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주 지혜로운 것입니다. 전도인이 떠난 후 교회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 가에는 전도인의 사역에 대해 가장 큰 테스트입니다. 그가 계실 때 어떠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가 떠난 후에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교회는 두가지 단계를 겪었는데, 첫번째 단계는 좋은 전도인들이 왔습니다. 아볼로가 왔고, 베드로가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직 좋은 전도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왔습니다. 그들이 전도인을 비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네가 보기엔 누구 설교가 가장 좋았더냐? 나는 전에 전도인이 좋았어. 나는 지금 전도인이 좋아. 나는 다음 전도인이 좋을 것 같아. 어떤 의견이든 다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주의해야 하는데, 전도인을 절대로 비교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단계는 좋지 않는 전도인이 왔습니다. 이 전도인들은 고린도 교회에 오면 ‘특별한 사도’라고 자칭하는데, 이 직함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 같든 사도가 와서 너희들을 덮어주는 것이 매우 필요할 것이야. 그래서 우리가 와서 너희들의 사도가 되어 줄게’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똑 같은 상황인데, 새로운 전도인이 오면 전에 전도인을 비평하고, 바울을 비하하고, 자신을 자랑하기 좋아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전도인을 만나면 전에 목사를 비평하는데, 반드시 조심하십시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기 좋아해서 다른 사람을 비평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상황을 만났고, 이 특별한 사도들이 와서 고린도 교회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많은 악렬한 비평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에서 이 두가지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전반부에서 바울이 비평을 당하는 것을 논했고, 이어서 우리가 함께 볼 것인데, 사실 ‘고린도전서’에도 논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다른 전도인과 비교했는데, 하지만 ‘고린도후서’에서는 이 나쁜 전도인들이 자신들을 바울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바울을 비평하였습니다. 바울이 잘 못하고, 그들이야말로 진짜 사도이니 여러분들 모두 구원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변덕스럽다고 하고, 계획을 자주 바꾸고, 그가 겁이 많고, 편지만 쓰고 감히 그들을 보러 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편지 쓸 때만 대담하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하지만 마주쳤을 때는 매우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우리 사도의 증거가 없고, 추천 편지가 없다고 비평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은 올 때 대학 증서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증서로 교회를 조금씩 비워냈는데, 이 사람들이 일부 면허증을 가지고 와서 표구하여 벽에 걸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됩니까? 그들은 바울이 자격 점검을 경과하지 않았고, 추천 편지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나는 추천 편지가 필요없고, 너희들이 바로 나의 추천인들이고, 너희들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대상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사역을 테스트 해 보려면 자격 점검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혹은 무슨 훈련을 받았는가가 아니고, 그가 키워온 사람들이 어떤가를 보면 그의 사역의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너무 신비하다고 비평했고, 솔직하지 못하다고 했고, 그의 태도가 냉담하여 관심이 없다고 비평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기억하십니까? 거기 사람들도 비슷한 비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언변이 좋지 않다고 비평했으며,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하이드 파크 일각의 비누통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기억납니다. 그의 발언이 표준적이지 못하고, H 발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그다지 조리가 있지 않고, 문법이 또 번번이 틀렸습니다. 대학생 두명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 사람의 틀린 문법을 비평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주를 믿는 사람이 되었고, 우수한 전도인이 되었는데, 지금은 그의 이름이 집집마다 다 알 정도입니다. 그 사람의 틀린 문법이 그를 비평의 영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언변이 나쁜 것을 매우 쉽게 비평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그리고 가장 엉망인 것은 그들은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평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강의를 잘 하지 못한다는 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강의를 잘하면 매우 높은 비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여가 오락은 티비를 보는 것이 아니고, 외지의 철학자가 하는 강의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강사일수록 수입도 높은데, 대처 부인처럼 틀림없이 금값이일 것이며, 수입이 높을수록 이 강사는 좋다는 표시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아서 틀림없이 강의를 잘 못할 것이고, 그래서 그는 무료로 강의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외로 이런 말을 하고, 바울은 이런 비평에 대면해야 했고, 자신을 위해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의 말투는 진지했고, 감정이 충만했습니다.
‘고린도후서’의 앞 7장은 바울 마음속의 말이었고, 그가 간곡히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내가 당연히 사례비를 받지 않지요. 나는 사람마다 무료로 복음 듣기를 원하기 때문이에요’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건설한 공사는 결국 모두 테스트를 경과해야 하고, 풀과 나무이든 혹은 보석 같든 모두가 똑같으니라 나는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중하게 공사를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고, 내가 닦아 놓은 기초는 바로 그리스도이며, 너희들이 그리스도 위에 건설한 공사는 테스트를 받을 것이고, 어떤 사람의 것은 잿더미로 변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감정이 충만한 서신이고,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조금도 숨김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들 보러 갈 때 겁이 있는 태도라고 하는데, 내가 두번째로 너희들 보러 갈 때 겁이 있는 태도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고 변호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많은 멋진 말들을 기록했는데, 제가 아주 빠르게 두 단락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우선 제4장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또 다른 한마디의 보귀한 구절이 전도인을 특별하게 격려하는데 바로 제6장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다른 사람의 걸림돌이 되기를 원치 않느니라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각종 환난, 가난, 곤고를 견디고, 우리는 채찍에 맞았고, 갇힘과 난동과 잠을 자지 못함과 배고픔을 견뎠고,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참음과 인자와 더욱 성령의 진실한 사랑과 진리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나타내느니라 우리는 정의를 무기로 삼아 적을 공격하고 자신도 지키느니라 우리는 존경을 받았고 모욕과 질책도 받았고 칭찬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우리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참되느니라 우리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느니라 우리를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 모두 잘 살아 있느니라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사람을 매우 놀라게 하고, 읽으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그의 사역을 비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1-7장가지의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10-13장을 1-7장까지를 비교해 보면 매우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뿐만 아니라 매우 엄격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풍자스러운 어투로 바꾸었는데, 이 사람들이 가짜 사도였고, 들어와서 교회를 통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극한 살상력을 만들어서 그의 어투가 더는 온유하지 않았습니다. 방금 읽은 그 구절에서 말투가 매우 온유했지만 여기에서의 어휘는 강렬했습니다.
제 생각에 가장 좋기는 한 단락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이러면 여러분들이 다른 초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단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내가 이 특별한 사도들보다 못하다는 것에 정말로 감히 믿기지 않는구나 나의 언변이 비록 좋지 못하지만 내가 한 말 모두는 진리이고, 너희도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과 내가 한 말들을 명확히 알고 있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공짜로 전하지 말았어야 한 것 같구나 그래서 너희들에게 경시당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함은 너희를 도우기 위함이니라 사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 그들이 나를 위해 헌금한 것은 나더러 공짜로 너희를 섬기라고 한 것이니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냐? 하나님은 절대로 이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느니라 하지만 나는 이 일에 대해 자화자찬하기로 결심했느니라 특별한 사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더러 너희들을 속이는 어떠한 기회도 없게 할 것이니라 특별한 사도? 그들은 근본상 가짜 사도이고, 행동이 간사하며, 그들은 스스로 사도로 봉했고, 그들의 순단에 나는 조금도 신기함을 느끼지 않는다.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을 위해 그들의 결말을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만일 사람이 너희 자유를 빼앗아 가고 너희 돈을 삼켜도, 너희를 모욕하고 심지어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나는 부끄럽게 느껴지느니라 나는 그들처럼 용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큰 믿음이 있느니라 어리석은 나도 이런 믿음이 있느니라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이러한 비교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웃기는구나 그러나 너희들이 나의 경험을 보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유대인들에게 매번 서른아홉개의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느니라.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만약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우리의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하지어다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여러분이 큰 소리로 읽어야 하고, 감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 가짜 사도들을 고소하면서 자신을 위해 변호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이 교회를 돕기 위해서이고, 또한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후서’도 샌드위치처럼 가운데에서 헌금을 강의했는데, 바울이 기근에도 헌금한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고린도 사람들더러 다시는 자신을 주의하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관심하게 하면, 그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편지를 절반 썼을 때 그들더러 기근을 위해 헌금하라고 권고하기 시작했습니다. 8-9장은 크리스찬의 헌금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헌금을 가르치고 싶으면 ‘고린도후서’의 이 두 장으로 가르치십시오.
이상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첫번째 편지에는 바울이 그들에 대한 불만을 논했고, 두번째 편지에는 그들이 바울에 대한 불만을 논했는데, 그들은 바울을 다른 전도인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악렬한 전도인과도 비교하였습니다. 이 나쁜 전도인들이 교회에 와서 교회를 통치했고, 그들은 자신을 높이 세웠고 바울을 비평하였는데, 바울이야 이 한 수를 놓치지 않지요.
제가 강조하겠는데, 바울이 여기에서 이렇게 많이 강의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위해 변호한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위해 변호했습니다. 메시지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메시지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의 효과를 몰래 파괴합니다.
여러분, 돌아가셔서 이 두 권의 서신을 잘 읽어보십시오. 큰 소리로 낭독하시고, 감정을 표달해 내십시오. 염불하는 것처럼 아니고, 마음 속으로 읽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크게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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