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1)
저는 여러분이 신약에서 어느 책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모르겠는데, 저는 우리가 방금 읽은 그 책을 가장 좋아합니다. 정말로 너무 좋아합니다.
저는 ‘갈라디아서’를 제일 좋아한다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 짧은 서신에 대한 견해가 전혀 딴판이며 의견이 아주 양극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아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이를 아주 싫어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를 몇 개 들어보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갈라디아서는 성경에서 가장 좋은 책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서신에 속하고, 나는 이를 아내를 맞을 것이고, 그는 나의 케이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캐슬린이라는 수녀를 아내로 맞은 것을 여러분 아고 있습니까? 소명은 케이티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 책을 아내로 맞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이 서신이 개천의 돌멩이 같다고 했고, 마틴 루터는 다윗처럼 거인을 맞이하였고, 그리고 이 돌멩이로 거인의 앞 머리를 힘차게 공격했습니다. 매우 특별한 묘사인데, 당시 골리앗이 놀라서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그는 꿈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벤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매우 좋아합니다. 성경외에 이 갈라디아서 주석이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양심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벤 요한이 마틴 루터가 쓴 ‘갈라디아서 주석’에 대한 칭찬입니다. ‘갈라디아서’가 벤 요한에게 깊은 영향을 준 외에 또한 요한 웨슬리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요한 웨슬리가 다른 사람이 ‘갈라디아서’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갑자기 매우 따뜻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것은 1738년5월24일 저녁 8시 45분 아덕문 거리에서라고 합니다. 현재 여기는 바클레이스 은행이 있으며, 그러나 벽에 당시의 경과를 설명한 패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기독교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하지만 모든 크리스찬이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을 매우 싫어하며, 이 책은 ‘십자가에 못박힌 서신’이라고 하거나 혹은 ‘가시 수림’이라고도 하거나 혹은 ‘폭탄’이라고도 합니다. 서신의 매 한 마디가 폭탄 같다고 하며, 그래서 일반인이 좋아하는 책이 아닙니다. 왜서일까요?
제가 다섯가지 원인을 썼는데, 첫째는 어떤 사람들은 내용이 너무 감격적이라고 합니다. 서신에서의 어투가 왕성하고, 반드시 쉽게 연소되는 사초지에 썼을 것입니다. 이 편지의 어투가 매우 강렬한데,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 있는 종교를 싫어합니다. 어떤 서 인디안 여사가 런던 동부의 한 교회에 왔는데, 그는 목회자가 설교할 때 반응하는 것에 습관되어, 목사님이 설교할 때 그는 시도 때도없이 ‘강의를 잘합니다. 아멘,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후에 관리원이 오셔서 그더러 조용해야 한다고 하고, 모임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지만 저는 성도입니다’라고 하니 관리원이 ‘당신은 응당 여기서 믿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 말은 아마도 맞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왜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영국에서 공립 학교의 가르침 모두는 감정을 교회에 가져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침착해야 하고, 이지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저자는 오히려 매우 감격적이었고, 그에게는 열정이 가득했으며, 그리고 또한 분노도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 있는 종교를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개인적인 색채가 너무 개성이 뚜렷하고, 짙다며, 자전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개인적인 마음을 다른 서신보다 초월하여 드러냈으며, 또한 그의 개인적 건강 문제도 논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육신에 질병이 있다고 그들에게 간구했으며, 또한 전에 회중 앞에서 베드로와 의견이 맞지 않다는 것도 논했습니다. 그는 회중들 앞에서 반드시 베드로가 잘못하였다고 지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도까지도 공개적으로 의견이 다를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이 의견이 다를 때 오늘날 우리가 늘 급하게 부의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시를 감히 하지 못하고, 항상 충돌을 피면하려고 급했는데,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진리가 위협을 받으니 베드로와 바울도 면전에서 상대방을 질의하며 진리를 맑게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갈라디아서’가 너무 이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에서 아주 세밀한 부분을 확실하게 논하였는데, 바울은 랍비의 배경을 꺼내어 논했으며, 뿐만 아니라 매우 세밀한 부분을 논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읽은 성경 역본들에서 진정으로 그 논점을 사로잡은 정화는 없었습니다. 제가 전에 이 성경을 번역했었고, 또한 출판도 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이미 절판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쪽으로 논하면서 한쪽으로 저의 역법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의 논점은 매우 교묘하며,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그 중 몇 가지는 아주 잘 강의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 쓰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는데, 이 셋상에서 가장 적게 탐색되는 부분이 바로 우리의 두 귀 사이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설교하고 나서 가장 자주 듣는 평가인데, 경미한 질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당신의 메시지가 우리더러 돌아가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말투를 들으니 그가 머리로 사고하지 않고 교회 온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머리로 사고하고 사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당신이 머리로 사고하는 것에 도전하였습니다. 그가 매우 세밀한 부분을 논했으며, 당신은 반드시 자세히 읽고 연구해야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이 책이 너무 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의외라고 느껴지네요. 이 책은 사실 영적인 외모를 벗기면 당신 안에 교만을 찌릅니다. 만약 당신 안에 아직도 교만이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읽지 마세요. 왜냐하면 당신이 읽고 나면 교만이 박살 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문제의 핵심을 직통했고, 당신의 감성과 이성을 초월하여 골수까지 깊이 들어갔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날선 칼날 같아서 당신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책에 논쟁이 너무 많고 변론의 화약 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시간한데, 현대인들은 종교의 일을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화목하고 아무 탈없이 지내는 것만 바랍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책이 아니고, ‘갈라디아서’는 비크리스찬들과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크리스찬들과 변론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많은 변론도 일어났는데, 개교 운동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변론은 우리에게 극대한 이익을 가져다 줍니다. 현대인들이 변론을 좋아하지 않는 원인은 분열하는 것을 보지 않기 바람입니다. 의견이 다르면 분열을 초래합니다. 오늘날 가장 중시되는 두가지 미덕은 포용과 약삭빠른 것인데, 이는 오늘날 그리스찬들의 중시를 가장 받는 두가지 미덕입니다. 응당 서로 포용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말은 약삭빠르게 해야 하며, 이 두가지 미덕은 예수님에게도 없었고, 그의 제자에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논쟁을 일으켰는데, 예수님과 똑같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교의 논하는 것을 너무 무서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것은 좋은 일 일까요 아니면 나쁜 일일까요?
제가 1월에 전도인 집회에 참석하는데, 80명 전도인들이 참석할 것이고, 그들이 이 모임을 매년마다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첫번째 결정이고, 하루동안에 서로의 차이를 토론합니다. 주최측은 이튿날에 폭발적인 장면이 나타날 것이어서 매우 긴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에 많은 시간을 이용해 어떻게 차이를 대면할지를 해석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왜서 그렇게도 걱정하시냐고 물었으며, 설마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저는 차이를 솔직히 인정하면 우의가 오히려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정말로 서로가 솔직하게 대하면 허위로 차이를 간과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대면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논쟁하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부차적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부차적인 일을 위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그래도 중요한 일은 명확하게 얘기를 하지 못합니다. 성찬을 받을 때 포도주로 해야 하나요 아니면 포도 주스로 해야 하나요? 이것 상관이 있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작은 잔에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위해 말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것인데, 제가 생각하기엔 크리스찬들은 너무 따질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바울이 말하기를 ‘개인이 마음으로 의견이 견고하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거룩한 날로 생각하는데, 그는 이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을 거룩한 날로 여기는데, 그도 이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크리스찬은 주일에 반드시 교회에 가야 한다고 엄격한 규정으로 할 권리가 없는데, 비크리스찬은 더욱 말할 것 없지요. 크리스찬들은 이 방편에서 사소한 일을 크게 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을 논하였는데, 이는 부차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볼 때 무천년파, 전천년파와 후천년파라는 이 세가지 파를 다시 보겠습니다. 저의 한 친구가 미국에 갔는데, 배행기에서 내리자 질문 받기를 당신은 무천년파에요 전천년파에요 아니면 후천년파에요? 그가 대답하기를 ‘이렇게 물으니 너무 황당하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참으로 매우 좋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저는 의견이 다른 크리스찬들과 분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논하고 있는 일은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근본적인 문제이고, 이것이 없으면 복음의 본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제일 큰 전쟁 모두는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정말로 너무 아픈 일입니다. 가족이 싸우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가끔은 확실히 이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외적으로부터 교회를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외적으로 교회를 공격하면 교회가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되고, 더욱 빠르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그는 안에서부터 교회를 파괴하는데, 상당히 빠른 방법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을 파괴합니다. 그가 이렇게 해야만 안에서부터 교회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게엔 그가 오늘날에 이미 끊임없이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보기엔 어떻습니까?
이 두 교회의 지도자가 바로 베드로와 바울이며, 한가지 근본적인 의제로 공개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성별에 관한 것을 논하고 싶은데,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다지 듣기 좋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교회의 교의를 수호하는 책임을 남자에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신념이 확고한 남자가 정말로 많지 않습니다. 이 남자들은 교회에서 복음을 수호하는 짐을 질 방법, 교의를 수호하는 책임을 질 방법이 없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노력하여 복음을 수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남자들이 이 방면에서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승인합니다. 저도 반드시 말하는데, 모험을 무릎쓰는 남자들이 정말로 적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을 때 감히 앞에서 질의를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은 확실히 대면 변론했고, 결국은 베트로가 틀렸고, 바울이 옳았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논했고, 하나님이 아주 선명하게 우리더러 이 사건을 알고 있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서신을 보겠습니다. 고대의 서신이 별로 많지 않고, 그리고 서신의 형식도 매우 특별합니다. 당시에는 공공 우편 서비스가 없어서 편지를 부치려면 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쉽지도 않았습니다. 반드시 먼 길을 가는 사람을 찾아야 했고, 그에게 돈을 주면서 그더러 그 곳으로 가게 해야 했고, 그 사람이 친히 그 편지를 가져다 주어야 했으며, 친히 편지를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만약 편지 한 통을 부치는데 50파운드라고 하면 여러분은 아마 편지를 많이 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설을 쉴 때나 명절을 쉴 때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폼페이에서 보내온 엽서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서신은 중요했는데, 오날날 서신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편지하는 내용 모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옛날 편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편지 한 통을 부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편지 보내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편지를 부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편지를 쓸 때 길게 감은 양피지에 씁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총명한 습관 하나가 있는데, 우리는 왜서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만약 종이를 펴면 보낸 사람의 이름이 먼저 보였고, 그리고 받는 사람의 주소와 그리고 받는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의 방법은 이렇지 않고, 우리는 항상 편지를 받으면 매우 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생을 낱낱이 저에게 알려주는데, 그들은 이름을 편지 뒤에 씁니다. 그래서 편지를 열고 난 후 먼저 마지막 페이지를 펴고 누구 썼는지를 봅니다. 이런 습관은 정말로 매우 미련합니다. 왜서 처음에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안 쓸까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하였기에 펴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집배원이 1-2인치만 펼치면 어느 곳으로 보내고,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편지 읽는 사람도 처음부터 누구 썼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습관은 바로 보내는 사람 이름 뒤에 문안 인사입니다. 다음은 문장 규정이 되지 않는 것인데, 바로 상대방을 한번 칭찬하는 것입니다. 먼저 듣기 좋은 말을 앞에서 하는데, 특히 뒤에서 듣기 거북한 말을 합니다.
바울 서신 모두는 이런 격식으로 되어 있고, 문제가 매우 많은 고린도 사람들까지도 먼저 그들은 칭찬했습니다. 고린도의 몇 명은 성찬을 받을 때 술에 취했으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당을 지었으며, 경배할 때 계속해서 방언만 했으며, 문제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편지의 시작에서 여전히 말하기를 나는 주님이 너희들에게 여러가지 영적인 은사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좋은 말을 하고 다시 비평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긍정적인 말이 조금도 없었는데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좋은 말을 얻고 싶으면 반드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는 긍정적인 말이 조금도 없었고, 조금도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너희에게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가차없이 직접적으로 비평했는데, 왜냐하면 어떤 일들은 그더러 이미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예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서신에 또 한가지 특점이 있었는데, 제가 여기에서 반드시 설명해야겠습니다. 서신을 읽을 때 사실 겨우 한 번 읽을 뿐인데 누군가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이 말들은 어떤 상황을 겨냥하여 썼을 뿐입니다. 그래서 글자의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할 뿐더러 글자에 직접 나타나 있지 않은 다른 뜻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마치 당신이 한 방 안에 있고 옆에 사람이 전화 통화하는데, 당신이 그 중의 한 사람 말만 들을 수 있는 것처럼입니다. 이때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추측하기를 상대방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좋아요 여러분, 이제 제가 한가지 예를 들겠는데, 제가 상대방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여러분이 맞추는지를 봅시다. 안녕하세요. 이미 운송되었어요. 축하해요. 어제 도착했어요. 얼마나 무거워요? 무슨 색이에요? 일반적으로 모두 이렇는데, 그럼 여러분은 자주 사용합니까? 사용하실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 그쪽 지세가 평탄해서 괜찮습니다. 그가 기름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휘발유를 사용하나요 아니면 디젤을 사용하나요?
됐어요. 방금 제가 어느 한 농부가 통화했습니다. 그는 막 트랙터 한 대를 얻었는데, 여러분은 어디에서 우리가 트랙터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제 뜻을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한쪽의 말만 들었을 때 자칫 조심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서신을 읽을 때 어떤 사황에 겨냥하였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고, 글자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그가 왜서 이 편지를 써야 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서신을 읽고 연구하는 정확한 방법입니다. 복음서를 일고 연구할 때는 이 방법이 필요없지만 서신을 읽고 연구할 때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갈라디아서’를 읽고 연구해야 하는데, 왜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을까요? 이 편지에서 어떤 문제에 답했을까요? 또한 어떤 난제를 해결했을까요? 신약성경의 모든 서신은 반드시 이런 방법으로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저자는 바울이라는 것이 나타났는데, 이 점은 조금도 의문이 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아마도 그가 교회에 쓴 첫번째 서신일 것이고, 그래서 제가 이 책을 ‘로마서’ 앞에 놓고 논합니다. ‘로마서’는 그가 후기에 기록한 서신인데, 하지만 성경에서는 모든 서신서의 앞에 배열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초기에 쓴 첫번째 서신입니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표준으로 보든 바울은 역사상에서 아주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터키 남쪽의 다소에서 태어났고, 거기에는 당시 세번째로 가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가는 대학은 아덴에 있고, 두번째는 알렉산더 대학이고, 세번째는 다소입니다. 다소 학술 지위가 매우 높다는 것을 볼 수 있고, 케임브리지, 옥스퍼드와 덕한과 조금 비슷하며, 1,2,3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렇게 강의하면 누구한테 미움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부모는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로마 시민이었으며 헬라 말을 했는데, 정말로 매우 특별한 배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일찍부터 우리가 미래에 봉사할 수 있도록 예비하셨고, 우리가 그 분을 알기 전부터 우리 삶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용하려고 우리의 특질을 배양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다중 특징이 있으며,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고, 부모는 로마 시민입니다. 그래서 그도 로마 시문의 신분을 계승 받았고, 그리고 그는 헬라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술을 배웠는데,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그렇게 하였고,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반드시 기술을 배워야 했는데, 이것은 매우 건전한 방법이었습니다. 헬라 사회에서 두 손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사회 지위가 머리로 일을 하거나 붓대를 놀리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사상을 물려받았는데, 하지만 성경에서 장막을 치는 사람과 어부 모두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편지에 말하기를 ‘너희 모두는 친히 일을 해야 하며, 내가 이 방면에서 이미 솔선수범했느니라. 육체 노동은 매우 존엄하다. 예수님도 18년동안 목수일을 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막을 치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상대방은 아마 군대였을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예루살렘 대학에서 가말리엘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후에 그가 유대 정교를 철저히 지켰고, 급진적이고 자존하게 변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다소의 바울처럼 더 순수한 유대인이 없었으며, 유대교에 대해 잘못을 고집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세의 모든 율법을 노력하여 지켰으며, 총 613개였습니다. 우리는 그 중의 열개를 노력하여 지키는데, 사실 총 613개입니다. 만약 당신이 율법을 지키려면 그 중의 열개만 선택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지켜야 하며, 전부를 지켜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중의 한가지는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승인했습니다. 바울은 매우 어려운 것이 바로 열번째인 탐욕을 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명은 한 사람의 내면의 동기가 연관이 있으며, 다른 계명들은 외적인 행위와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은 열번째 계명을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율법을 지키려고 힘을 다하였으며, 사람더러 흠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스스로 매우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유대교를 공격하는 사람을 공격했고, 만약 누군가 유대교 신앙을 깎아내리면 그는 그 사람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역 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몹시 미워했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선포하는데, 이는 근본상 유대인들의 일신론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들으라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은 유일한 주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고, 그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결심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이 새로운 종교를 파괴하려고 출발했고, 도중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양심이 불안하기 시작했고, 그는 공연한 저항을 더는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하는 것을 친히 보았고, 그리고 이 젊은이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이 있는 것을 보았노라 주 예수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사울더러 이 새로운 신앙을 저항하기가 더욱 힘들게 했는데, 이는 그가 지금 내심으로 교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양심과 전쟁한다는 것은 가장 격렬한 전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유대인이 만약 예수를 믿자면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한번은 제가 게임브리지 부근에서 설교를 했는데, 회중에서 어떤 유대인 여자가 모임 후에 저에게 묻기를 ‘당신 말씀이 나사렛 예수가 오늘도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여 제가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 살아 있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의 메시야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가 ‘우리’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는 것에 기쁩니다. 그는 나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의 메시야를 가리켰습니다. 그가 또 묻기를 ‘제가 어떻게 하면 그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하여 제가 당신 직접 물어보시라고 했는데, 결국 그가 답을 얻었습니다. 십분 후에 그가 성경을 저에게 해석하여 듣게 하였으며, 성경 안의 도리, 그는 모든 도리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전에 유일하고 모르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체 유대인이 알아할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찌른 예수님을 곧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루만에 탄생한다면 제가 그 상황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선두에 선 사람이었고, 장래에 그의 동포들도 그처럼 주를 믿을 것이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될 것이며, 그가 주를 믿은 첫날에 주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저자의 배경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열렬한 사람이 되었고, 그는 그가 전에 파괴를 도모했던 그 신앙을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었고, 유대교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배경입니다.
그의 선교 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당시의 세계 각지에 교회를 세웠으며, 새로운 곳을 끊임없이 탐색하였으며, 그가 이것은 기독교를 위해 식민지를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묘사가 너무 좋습니다.
다시 우리가 이 서신의 받는 사람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문제 하나가 있는데, 두 곳 모두가 갈라디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많은 필묵을 낭비하면서 어느 갈라디아인가를 변론했습니다. 오늘날 터키이며, 북방에 도시 몇 개가 있는데 갈라디아라고 불렀고, 남방에도 도시 몇 개가 있는데 남갈라디아라고 불렀고, 이 편지는 북갈라디아서 쓰는 것일까요 아니면 남갈라디아에 쓰는 것일까요? 우리는 북방에 대해 그다지 흥취가 없는데, 이는 거기에 셀터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갈리아인의 식민이었고, 후 기원전 250년 좌우에 그들은 용병을 유럽 각 곳으로 파견했고, 그 병사들이 후에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이 되었는데, 그들 원래는 셀터인이었습니다. 어떤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들은 이 편지가 그들에게 쓰기를 바랬는데, 하지만 그들더러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가 북갈라디아에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갈라디아 도시에는 루스드라, 더베, 안디옥 그리고 이고니온이 포함되어 있고, 이 곳 모두는 바울이 갔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교회를 건립한 이후 일단 장로를 세우면 바로 떠났기 때문이고, 교회를 새로 세운 장로한테 맡겼으며, 하늘 교회의 머리이신 성령과 지상의 목자에게 맡겼으며, 교회를 장로와 성령이 통치하게 맡겼습니다. 아쉽게도 그들이 만났던 상황을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부딛히고 있습니다.
외적인 전도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원래의 사역을 자기의 소유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들어와서 통치하고 싶어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반드시 유의해야 하고, 이런 사람들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남의 성과를 누리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세운 교회를 도독하려고 하며, 그것은 그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들어와서 통치하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영국에서는 이미 점점 없어지고 있지만 3-4년 전에는 매우 난폭했었습니다. 항상 전도인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그리고 교회를 나쁜 길에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바로 이런 상황에 부딛혔고, 그 사람들은 유대 크리슬찬이었으며, 이 유대 크리스찬들은 그림자처럼 바울을 따랐는데,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머리가 아팠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말하기를 ‘바울의 말을 듣지 말라. 그는 절반만 말했는데, 그는 복음을 너희에게 전했지만 그가 전면적으로 명확하게 말하지는 못했느니라. 너희들은 그리스도 외에도 모세의 율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영국 많은 교회 벽에 십계명을 건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제가 첫번째로 목회했던 것은 1950년이었고, 오 미안해요 1952년이에요. 그것은 제가 첫번째로 목회했던 것이 아니고 첫번째로 영국에서 목회한 것입니다. 전에 저는 쉐틀랜드 군도에서 목회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영국에서 목회할 때 강대상 뒤의 벽에 카페색 괴테 문자로 십계명을 적어놓았고, 이는 제가 첫번째로 하고 싶었던 일인데, 바로 페인트 한 통으로 그 십자가 패를 칠해 버렸고, 저는 그것을 칠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항의하기를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 할일이 없게 되었어요’라고 하여 제가 ‘당신이 찬양 제시판 위의 숫자로 맞춤 게임을 하면 되잖아요. 저는 이 앞에서 설교하고 싶지 않네요. 저는 여기에 십계명을 강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벽에 아무것도 없게는 하지 못하잖아요’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벽에 십자가를 놓았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강의할지언정 십계명은 강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조금 후에 다시 논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 아마 앉아 계신 몇 분을 놀라게 할 것인데, 하지만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유대 크리스찬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바울의 메시지는 완전하지 못하니 내가 당신들에게 전체 실제 사정을 알려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가만히 앉아서 남의 성과를 누리고 싶어하는 전도인들 그들이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에게 이런 것들이 있어서 정말로 좋구나. 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많느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은 더욱 완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힘들게 교회를 세우면 그들은 들어와서 가만히 앉아서 남의 성과를 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이 편지는 반드시 남갈라디아에 쓴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 몇 개 주요 도시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고, 후에 바울이 또 가서 장로를 세웠고, 그들을 성령님이 통치하게 맡긴 후에 다시 떠났으며, 그 후 외적인 전도인이 와서 그의 사역을 파괴하였습니다.
바울이 방금 건립한 그 교회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 왔는데, 그것 모두는 그가 수고히 세운 교회였고, 그의 사역이 파괴를 당했습니다. 두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첫번째는 바로 그들이 바울의 메시지에 덧붙여 과장했습니다. 복음이 덧붙여 과장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응당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복음에 덧붙여 과장하는데, 일반적으로 성경 이외의 책을 다시 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의해 보셨습니까? 예를들면 메리베이커에디의 ‘과학과 건강’ 같은 책이거나 혹은 요셉 스미스의 책 같은 것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책과 성경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하면, 그럼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덧붙여 과장하는 것이며, 원본에 없는 것들을 많이 붙인 것입니다. 독목주에 놓을 수 있는 짐은 유한되어 있고, 초과하면 반드시 뒤집 힐 것입니다. 비유를 바구어 말하자면 부패는 강대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잘못된 가르침은 우리가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고,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을 반드시 유의해야 합니다. 만약 메시지에 덧붙여 과장하면 원본 복음을 전한 그 분을 반드시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사들은 바울의 메시지에 덧붙여 과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음을 전한 바울까지 귀에 거슬린다며 공격했으며, 그 메시지를 전한 사람을 가서 공격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가서 이 사람을 헐뜯었으며, 그들은 메시지에 덧붙였을 뿐만 아니라 메시지를 전한 그 분을 공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의 상황입니다.
이제 우리 진짜 문제가 무엇이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처음에 이 서신을 읽을 때 중점이 할례라고 생각했는데, 바울의 중점이 이 방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례에 대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왜서 작은 일을 크게 만들엇을까요? 왜서 이 작은 일을 위해 얼굴이 빨개지도록 떠들었을까요? 할례 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더러 할례를 행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하는 습관을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자가 피부를 벗기는 작은 수술 뿐입니다. 그 때 유대 여자들은 할례 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아프리카 부족들은 여자들까지도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할례 행하는 것은 생리나 혹은 사교의 이유를 위해 하는데,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입니다. 주요로는 그런 기후 아래에서 위생 방면의 고려에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으로서 말하자면 할례는 종교의 뜻이 포함되어 있고, 유대인으로서 말하자면 의의가 아주 큰 것입니다. 당시 히틀러의 비밀 경찰들이 베를린 거리에서 남자들더러 줄을 서게 하고, 그들더러 바지를 벗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는 수용소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판정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표시입니다. 물론 남자들만 할례를 행할 필요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유대인의 문화 중에서 남자여야 기업을 물려 받을 수 있으며, 약속은 남자를 통해 전승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할례 행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여자들은 물려 받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드시 이 표시가 있는 사람이어야 아브라함의 약속을 물려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시 심지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할례를 행하지 않은 유대 남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반드시 쫓아내야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약속을 어기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에는 모든 남자들의 후예에게는 이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의미가 매우 컸습니다.
유대인이 가장 중요시 했던 세가지 사건은 유월절, 안식일 지키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상이 자유롭거나 혹은 유대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까지도 이 세가지 사건을 중요시 합니다. 네번째 사건은 깨끗한 음식을 먹는 것인데,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만 지키고, 모든 사람이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하고, 안식을 지키는 것과 유월절을 지키는 이 세가지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의 논점은 그 약속들은 본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는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의 한 후손, 여기에서 ‘후손’은 단수이고 복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모든 남자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중의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남자 후손이 나타날 때, 즉 예수님이 나타날 때면 다시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업이 이미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은 이미 약속을 받았고, 그래서 다시 할례를 행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논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는 ‘갈라디아서’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기업을 물려 받는 표시이며, 예수님에게 이 표시가 있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았고, 이 기업을 물려 받았습니다. 바울도 할례를 행했고, 그는 유대 사회에서의 유대 남성인데, 사실 그는 친히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데모데는 갈라디아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그에게 할례를 행했는데, 왜서일까요? 왜냐하면 디모데는 바울과 동반하여 선교를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디모데가 만약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에게 할례를 행했는데, 이는 완전히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연고였습니다. 당시 슈다드와 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서 선교하기 위해 머리태를 남겼는데, 이와 똑 같은 원인이었습니다. 이로써 본지방의 사람들과 가까워지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라디아에서 온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편지에서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변덕스럽다면서, 자신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는데, 우리는 왜서 할례를 행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의 상황인데, 하지만 할례 배후에는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어휘 선택이 재차 우리를 깨우치는데, 성경은 아이들 보라고 쓴 것이 아니고, 어른들 보라고 쓴 것입니다. 비극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커서는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동화책이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에서의 어휘가 매우 강렬한데,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을 어지럽히고 난장판을 만든 내가 싫어진다. 이러면 그들은 그들과 똑 같은 사람을 낳지 않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휘가 매우 강렬한데, 바울이 왜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는 심지어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어휘가 정말로 매우 강렬했고, 봐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왜서 이렇게 말하였을까요? 왜서 이렇게도 할례를 반대했을까요?
이는 할례 배후에서 유대교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여전히 행위를 중요시하는 종교이며,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 싶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본상 할 수 없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해보고 싶어했습니다. 십계명을 벽에 걸면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른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과 화목해 질 수 있습니다. 비크리스찬들은 교회에 들어오면 이 규례를 봅니다. 제가 그냥 한번 언급하겠는데, 오늘날 어떤 자유파 학자들이 십계명의 ‘하지말라’의 단어를 없애고, 이를 사도신경에 넣었는데, 결국에는 ‘음행을 해도 된다’, ‘도독질 해도 된다’ 등이며, 그리고 ‘나는 동정녀 잉태를 믿지 않고’, ‘나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라고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비평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하지말라는 일만 강조하면 사람들이 우리는 반대 논조만 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부정적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조금만 붙어있으면 그가 우리의 모든 흥취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지요. 하나님은 당신이 무엇은 하면 안된다는 것만 알려주고, 당신이 하면 안되는 것만 알려줄 뿐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인상은 참으로 매우 엉망입니다. 하지만 유대교 기본상 이렇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온 것이고, 두개 모두는 구약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구약의 얼마나 많은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겠습니까? 구약성경의 얼마나 되는 율법이 신약성경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습니까? 613개 율법에서 몇 개나 우리 몸에서 여전히 적용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신구약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반드시 대면해야 할 큰 문제입니다.
지금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크리스찬들더러 십일조를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의 율법이기 때문이며, 모세의 율법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방인이 십일조를 응당 내야 한다고 근본상 언급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더러 십일조를 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우리에게만 헌급을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한 젊은이의 십일조 강해를 들었는데, 그가 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모든 구절을 프린터했습니다. 그가 강해할 때 말하기를 ‘헌금과 축복은 연관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라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 젊은이가 말하기를 ‘십일조는 또한 저주와 연관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또 말하기를 ‘구약에서 저주 한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만일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면 우리의 후대들이 고난을 받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제가 회중들의 표정을 보았는데, 모두가 자손이 고난을 받는 것을 매우 무서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이 되었는데, 과연 정말로 많은 헌급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신약성경에 봉헌 원칙이 서로 다르게 많이 있는데, 주님은 억지로 웃으면 들이는 헌금이 아니라 기꺼이 들이는 헌금을 기뻐 받으시고, 진심으로 헌금하고 싶어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중요시하는 것인데, 자손이 고난을 받을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 명확합니까?
또 그리고 안식일의 율법인데, 크리스찬은 구약 율법을 지키기 전에 반드시 먼저 똑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지키려면 모두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것은 바로 축복이고, 지키지 않으면 바로 저주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하려고 마음 준비가 되었습니까? 저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똑똑히 고려해야 합니다.
바울의 뜻은 할례를 행하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무엇이든 모두 지켜야한다고 변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교사들이 말한 이유대로 할례를 행하면 613개의 율법 전부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도 걱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할례를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문을 열고 유대교의 교의더러 들어오라는 것이며, 이 길은 그가 이미 가 보았고, 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생각하면, 지키지 못한 율법 아니고, 이미 지킨 율법을 생각하면 자신이 마지 어린아이가 요강통을 들고 자신의 걸작을 보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매우 고상하지 않는 헬라어로 ‘배설물’이라 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배설물로 보느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행위로 의롭게 된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한푼 가치도 없느니라’고 하였으며, 그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율법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주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사람더러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그것은 사람을 감옥에 들여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상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제가 친히 경험한 것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한번은 제가 이스라엘에서 온 전화를 받았는데, 이스라엘의 모든 기독교 교회의 아랍인, 유대인과 선교사가 갈릴리의 디베료에서 회의를 하였는데, 모두의 의견이 매우 어긋났다고 하였습니다. 외적인 전도인이 오셔서 그들의 의견을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그들이 전화로 저에게 묻기를 바로 비행기로 이스라엘에 와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 없냐고 하였습니다. 제가 힘써보겠다고 하였고, 후에 제가 알았는데, 일시적으로 항공권을 사자니 무려 830파운드 고가였고, 저에게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들에게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아랍인과 이스라엘 청년들이 거기서 제가 갈 수 있도록 기도하였고, 그들이 응당 얼마나 지원해야 하는지를 주님께 물었는데, 주께서 그들에게 120파운드를 도와주라고 하였다고 했고, 그 젊은이들이 120파운드를 모금했습니다. 제가 루턴 공항에 도착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세기가 없냐고 물었고, 아직 좌석이 없냐고 물으니 오늘 가는 비행기 한대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미 만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저더러 승무원 자리도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좌석 모두는 비행기 헤드를 등지고 있어서 뒤로 눕지를 못하고 했는데, 후에 제가 몇 일 동안 허리가 아팠습니다. 제가 좌석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저만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정면에 랍비 네명이 앉아있고, 유대 음식을 먹은 후 제가 입을 열어 그들과 대화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제가 첫번째 랍비에게 묻기를 ‘죄송한데, 당신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십니까?’라고 하니 그가 ‘물론이지요’라고 하였고, 제가 ‘그럼 이것은요?’라고 물으니 그가 ‘지금은 이미 성전이 없어서 제사를 드릴 방법이 없고, 그래서 이는 지키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좋아요. 당신들이 이 율법을 지키지 않다면 내가 계속하여 물을 수 있게 되었네. 마지막 네번째 랍비가 저에게 묻기를 ‘당신은 동정교를 믿나요 아니면 자유파를 믿나야?’라고 하여 제가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대화했는데, 저는 두번째 랍비가 한 말이 영원히 잊지를 못하겠어요. 그가 갑자기 말하기를 ‘내가 알 것 같네요. 당신은 크리스찬이고, 당신은 예수님이 죽은 것이 당신을 율법의 매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믿지요’라고 하여 제가 ‘맞습니다’라고 하였고, 그가 말하기를 ‘그래서 당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요’라고 해서 제가 ‘저는 율법을 지키지 못합니다. 마치 당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매우 즐겁게 대화를 하였고, 후에 비행기가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하니 모두가 섭섭하게 되었었습니다.
보십시오. 율법 전부를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입니다. 사람더러 율법 아래에서 살게 하지 말아야 하고, 은혜 아래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한가지 율법 아래에만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율법이고,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미 적용되지 않으며, 이미 폐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의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매우 합당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모세의 율법을 항상 동일시하여 논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서 제사 옷, 제단, 향과 제사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이것 모두가 필요없고, 이것 모두는 모세의 율법에 속하는데, 하지만 살그머니 교회에 스며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갈라디아서’를 인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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