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십자가를! 고전2:2 12.05.27.설교녹취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씀의 선포자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전문가로서
어떻게하면 신앙에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어떻게하면 쉽고 (영적으로) 재미있는 설교를 전해드릴 수 있을지
날마다 생각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또 읽고 묵상하고 연구합니다.
처음엔 성도들에게 은혜되는 말씀을 읽기 위해서
과연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며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다가 읽고 읽고 읽다가
'그 말씀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말씀이구나'
라는 것을 날마다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깨닫습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고
설교자에게 말씀을 주셔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뭄이고, 그것이야 말로 기근이고
그것이야말로 결핍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그 어떤 멋진 말도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설교는
우리 성도들이 듣고 싶다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셔야지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내 귀를 들어주셔야지 들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주셔야지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는 설교자로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고전2;2
이 말씀이 제게 못이 박히듯이 박혀 왔습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아요.
‘너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있니?’
세상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없이도 너무나 잘 살아가고 있는데
‘너는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니?’
또 묻습니다.
‘너는 십자가 없이 살 수 있니?’
세상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너는 십자가 없이 살아갈 수 있니?’ 라고 물으십니다.
설교자로서 전하고 또 전할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그 분의 말씀과 그 분의 사역을 좋아합니다.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을 좋아하고
또 성난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그 놀라운 사역을 좋아합니다.
귀신을 내쫓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십자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데
교회에서까지 고생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죠.
‘10년 전 아니 20년 전 아니 30년 전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경험했던 그 십자가로 충분하다!
그 십자가로 나는 족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나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나옵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감명 깊은 말씀을, 그 감명 깊은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배고픈 5천명을 먹이기 위해서 오심도 아니고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 한 가지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고 죽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죠.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합니다.
왜요?
그 십자가 때문에
표적이 아닌, 지혜가 아닌, 그 십자가 때문에
바울이 변화되었기 때문이에요.
그 십자가 때문에
내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 모두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제가 지난 겨울에 말씀드렸던
‘십자가’ 말씀을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자꾸 시켜요.
제게 필요한 게 십자가라고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게
십자가라고요!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다시 십자가!’ 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잠시 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잡았으면 (붙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잊었던 십자가를
다시 잡았으면 좋겠고요
먼지 쌓인 그 십자가를
이 시간 눈물로 닦아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무엇이냐면
밑에서 올려다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갈 때 모든 사람이 높이 매달린
예수님을 올려다 봅니다.
우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 그 그늘아래서
‘우리가 참된 쉴 곳이 바로 여기구나’ 하고 깨닫는 거죠.
♬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곳 찾았네 ♪
그래요, 십자가 밑에서 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참된 쉼을 누리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눈물이 나느냐면
십자가를 볼 때, 이상하게 내 고통이 사라지고
기쁨이 나오기 때문에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처절한 고통속에 있는데
그 십자가 앞에서 이상하게 내 고통이 사라지더라고요.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내 생명은 점점 생명이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모든 더러운 죄악을 덮어쓰고 계신데
그 십자가 앞에서
새카맣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게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몸이 물과 피를 흘리면서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데
내 몸에서 점점 생명의 열기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채찍이 우리의 치료가 되기 때문에
그 분의 환란이 우리의 평화가 되기 때문에
그 분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이 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우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은혜이니까요
내가 어떻게 해도 얻을 수 없는 은혜라서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내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밑에서
단지 감정적으로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눈물, 그 이상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움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십자가는 우주의 운명,
지구의 운명도 아니고 우주의 운명이
뒤바뀐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십자가 앞으로 여러분을 인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장소에
여러분들을 인도하려고 해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는 단지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담아 들을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세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도 보고,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우리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던 것처럼
우리 운명도 십자가 앞에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회복될 것입니다.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장소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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