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교만하기 때문에 남이 교만하게 보입니다 출처
◑겸손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알게 될 때,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겸손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 주님께 기대는 것입니다.
불신앙이 있는 곳에는 교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겸손이 있습니다. 합2:4
겸손은 믿음의 뿌리고, 겸손이 강할수록 믿음이 강해집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갑니다.
예의 갖추고 말을 부드럽게 하고 고개 숙이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진짜 겸손은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겸손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 역대하 16장 9절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여호와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한다.”
여호와의 눈이 여러분을 보고 계시고 시대마다, 지금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혜와 능력이 있는 자나 부자를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잠14:6)
정말로 지혜와 말씀의 은사를 얻으려면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녹아내려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면서 지혜와 말씀의 은사를 구해야
말씀의 은사가 진짜로 임합니다.
하나님은 죄, 무지, 자신의 연약, 무능 때문에 상한 마음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대신 마음이 상할 정도로
자신의 무지무능을 깊이 인식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구하면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래서 미련하고 약한 우리를 통해서
세상의 지혜 있고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실제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는 기도하게 되어 있고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인정하게 되어 있고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이 그를 인도하시고 힘을 주시고 북돋아주셔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자신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반대로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교만의 뿌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이론, 기술과 능력에 기초해서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하나님이 내게 훌륭한 지성을 주셨으니
내가 그것을 사용하기를 기대하신다.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그분께서 인도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독립이고 겸손은 의존입니다.
겸손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조언 없이는 움직이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데이빗 윌커슨
▲아이는 성장하면서 독립심을 키워줘야 하지만
신앙은 성장하면서 의지하는 마음을 계속 길러야 됩니다.
절대 독립심을 갖지 마세요.
이 세상의 부모는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므로
때가 되면 독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립심을 길러줘야 하고 마마보이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릅니다. 영적으로 독립심은 반역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교만이고 죄악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주의 일을 할수록 철두철미하게
주님께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우리와의 관계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다릅니다.
부모는 늙고 돌아가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또 부모는 우리 대신 살아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실제로 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 영광은 자기가 다 받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을 실제로 의지한 결과, 주님이 실제로 역사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영이 알고 양심이 알기 때문에
빈말이 아니고 중심으로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까요?
주님이 하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므로
주님이 하셨다고 하면서도, 내가 한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해보세요.
그러면 주님이 하셨다는 것이 불을 보듯이 명백해집니다.
내가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와 사역이 실제로 가능하게 하려면
필사적으로 성령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고 실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온 마음으로 주님을 향했습니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임했습니다.
약속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전혀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무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일부 교회와, 목사, 신학자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성령의 은사와 역사에 대해서 그토록 반감을 갖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 속에 있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교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혜와 능력, 지위, 프로그램에 만족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이 종교의 영의 원인입니다.
이런 교만한 자들이 주님의 나라에 가장 큰 대적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일하면, 헌신하면 하나님이 나를 써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열심이 특심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데 그 열심을 썼던 것처럼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서 마귀에게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교만이 깨어지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늘의 지혜와 능력이 와야 하나님께 쓰임 받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향하는 자,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만 옵니다.
◑2.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나의 나 된 것은”
바울은 자기가 무엇인가가 된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무엇이 된 것을 -지혜, 능력, 기름부음, 은사를 갖게 된 것이나
사도, 선지자로 부름 받아 사도, 선지자의 직임을 받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에 사도바울의 고백을 성경을 통해 더 들어보도록 합시다.
공동번역 고후 12:12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백방으로 참고 견디면서
표징과 놀라운 일과 기적을 행하여 내가 진정 사도라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현대어 롬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밖에는, 아무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겸손은 우리가 지렁이 같은 야곱인 동시에
강한 타작기계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찰스 하지
우리는 본래 지렁이 같은 야곱입니다.
지렁이 같이 무력하고 힘이 없고 사람들에게 밟힐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우리는 능력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됐다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의 나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나를
자신의 의식 속에서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이 된 것을 사실대로 인정하면서도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을 구분해야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우리 영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지식의 영역, 혼의 영역에서만 이 일이 이뤄지면 교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머리가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 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낮아지고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실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을 섞지 않고 자신의 실상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알면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런 고백이 말로만 아니라 온 마음으로 공명되면서 심령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참된 겸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보이는 겸손이 있습니다.
①요셉형(形)의 겸손입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비전이 없이 목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갔지만
그들의 생각은 늘 혼적이고 영의 세계와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나오는 비전, 꿈을 받은 적이 없어 세상 물결을 좇아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비전이 없이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함으로써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주님은 우리가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적, 종교적이어서 그 뜻을 이루기는커녕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 꿈과 계획을 받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지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겸손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그것을 목표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교만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②모세형의 겸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았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간혹 지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
참으로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말과 행보를 보게 되면
그들이 교만한 자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교만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권위를 보지 못하고
교만하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 겸손을 버리고
참된 겸손과 거짓 겸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③다윗형의 겸손입니다.
강한 믿음은 종종 교만으로 오해받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꿈은
허황되고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꿈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함으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진정한 겸손입니다.
다윗의 형들이 전쟁터에 있었고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그의 형들에게 필수품들을 전달하기 위해 그곳에 갔습니다.
그때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진을 향하여 으름장을 놓자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소년 목동 다윗은 그 말을 듣고 의분이 넘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그때 형이 그 말을 듣고 다윗에게 노를 발하며 그가 교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골리앗의 으름장 앞에서
머리 숙이고 있는 엘리압이 겸손한 사람이고 다윗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짜 교만한 사람은 엘리압이고 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엘리압은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한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형이고 나이도 많고 자연적인 조건이 좋으니까
자기가 다윗보다 더 낫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엘리압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을 가리켜서 “네가 교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내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3. 겸손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겸손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허영심으로 일하지 않고
동역할 수 있습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해서 내가 성취한 것이 얼마나 적은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의 동역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혼자 일하는 것보다 100배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은
세대들 간의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사님들 중에 변질된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존경스러운 분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종들에 대해서
불의한 판단을 하는 많은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대들 간의 전쟁입니다.
*이 세대들 간의 전쟁이 계속 대물림 되고 있습니다.
한 세대동안 쓰임 받은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늘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 일 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탁월한 설교자, 성공적인 사역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는 제자들을 기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세대들을 위해서 발판이 되기 위해서,
그들의 길을 닦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 겸손을 배운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한 천정이 다음 세대를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세대의 발전에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영영토록 왕성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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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자매샬롬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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