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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는 새벽형 인간

LNCK 2019. 12. 30. 14:16

 

◈가만히 있는 새벽형 인간           시46:1-11          스크랩, 출처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몇 년 전에 <새벽형 인간>이라는 말이

너무나 우리나라 안에 유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로 꼽아지는 유행이 되었고,

새벽부터 움직여서 삶을 사는 것이 아주 탁월한 원칙인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외쳐대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새벽형 인간에 관한 그 많은 책들과 그 많은 언급들의 핵심은

새벽부터 움직인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움직인다.

 

그래서 교회에서조차도 기독교계에서조차도 이 새벽기도를

새벽형 인간에 대한 주창과 연관지어서 한참 광고처럼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아주 목청 높여서 이야기하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새벽부터 움직이는 것, 그게 포인트라는 것이에요. 일찍부터 움직여라.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부터 삶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육체의 한계를 돌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새벽에 부르짖으면

진정한 인생역전을 체험할 수 있다.

이건 뭐 거의 많은 분들의 공통적인 얘기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뭐 지금 현재 고대 이기수총장님 같은 경우 인터뷰내용을 보니까

2시 30분에 일어나신대요. 2시 30분에 일어나셔서 동이 틀 때까지 집필하고

독서하시고 그리고 뭐 하루의 업무를 체크하고 이러고 시작하신다.

 

이처럼 성공하는 사람들, 또 영적인 차원에서도 새벽형인간이

아주 아주 강하게 부각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기독교가 새벽형인간을 가장 먼저 주장하지 않았겠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포인트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든 새벽형인간에 대한 주장은 심지어 교회에서조차도 ‘바삐 움직이라’는 겁니다.

 

게으름과 대비돼서 부지런함을 강조하고

포인트가 ‘일찍 움직인다’ 에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적인 새벽형인간은 ‘가만히 있다’ 라는 거예요.

 

 

5절, 하나님이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그런데 10절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나님이 새벽에 도우십니다. (5절)

그런데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10절)

즉, 새벽에 분주하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시46편이.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입니다. 이게 새벽형인간이에요. 가만히 있는 새벽형인간.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찾아 부르짖고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를 체험하고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활동하고

움직임을 통하여 인생의 역전을 체험하라. NO!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새벽에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예

 

▲이 시편 46편의 배경은 열왕기하 19장에 기록되어있는 히스기야 왕 당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침입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곤고함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실 것을 알려주시고

새벽에 이스라엘사람들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그 앗수르군대 18만5천명 어마어마한 군사가 전멸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

코앞에 닥친 위기에 대해서조차도 완전히 의식이 끊어져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18만5천명을 멸절시키시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 동안에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물들을 추수하는 시간이 새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루를 살아갈 때

갖게 되는 삶의 패턴이에요.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움직인다는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잠자는 동안에 하나님이 이루어놓으신 에덴을 내가 수확한다는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고 내 삶을 내가 계획하고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면서

내 삶을 성공하는 삶으로 바꾸어나가고 이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새벽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 주님이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새벽에 부활하신다는 것은, 주님의 의식이 죽음 가운데 묻혀있었던 것이에요.

 

주님이 기도하신 것도 아니고 나를 부활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거나

하나님과 대화하신 것도 아닙니다.

 

의식이 죽으신 상태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부활하시고

새벽은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가 나타난 때였습니다.

 

▲여리고성이 새벽에 무너집니다. 이른 아침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다 무르익어 준비시키시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추수되는 때가 새벽이라는 것이에요. 추수되는 때가.

 

홍해가 새벽에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물을 우리가 획득하는 때가 새벽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그냥 추수하는 거예요.

우리가 활동한다는데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홍해가 갈라질 때도 모세가 여러분 뭐라고 얘기합니까?

출애굽기 14: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본문 시46: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왜 가만히 있지 않으면 하나님 됨을 모를까요?

 

내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가 없어요.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심지어는 기도조차도

하나님, 이 일을 이루어주세요. 하는 식의 기도.

이건 내가 움직이는 거거든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다는 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 일에 대해서.

그 일을 보면서 막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참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행동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아예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구조

 

그래서 시편46편은 네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데 보세요.

 

①1~3절, 경천동지(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임)하는 위기상황이 언급됩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2

얼마나 굉장하면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져버리겠습니까?

 

바닷물이 솟아나서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3

驚天動地의 장면이 연상이 되요.

 

그러니까 18만5천명을 이끌고 산헤립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 조그만 성 예루살렘을.

 

그러니까 이거 뭐 완전히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그러한 위기상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이 하나가 딱 떠오르고 우리 삶의 위기를 말할 수 있어요. 그렇지요?

 

②4~7절까지 너무너무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어떻게 바뀌느냐?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4~:5

 

너무너무 평온하고 고요한 장면이 또 떠오릅니다.

驚天動地하는 위기상황이 주어졌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성에는

강물이 흐르고 강물주변에 생명이 서식하는 너무나 평온하고 고요한

하나님의 임재의 평강이 하나님이 계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생겨나는 평강의 공간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삶에 驚天動地하는 그런 위기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 마음이 성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으로서 우리 마음이 강물이 흐르며

강물주변에 생명이 번성하는 아름답고 고요한 예루살렘성이 되게 된다는 것이에요.

내 마음이 그렇게 되면 되요.

 

그렇게 하나님이 임하시면 새벽에 도우시리로다 :5b

왜 새벽에 도우시리라는 말을 했을까요?

히스기야왕 때 사건을 놓고 보면 새벽에 발견하리라입니다.

 

하나님이 밤새 ‘도우신’ 것을, 우리가 새벽에 ‘발견하는’ 것입니다.

밤새~새벽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그때 비로소 의식하는 거예요.

 

그럼 언제 도우셨습니까? 실제로는?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③8~9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며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8~:9.

 

와서 보라. 와서 봤을 때는 이미 다 끝났어요. 종료. 종료됐어요. 상황 끝.

이게 새벽의 의미라는 것이에요.

 

 

④10~11절,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무엇입니까?

그 대역사가 일어난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현장에서 수확해드리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가 움직인다고 하는, 하루를 살아간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내용이에요.

 

 

◑적용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안식을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첫 번째 태어나서 맞이한 날이 안식일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다 만들어놓으신 다음에

우리가 태어나서 첫 번째 맞이한 날은 우리가 없을 때

하나님이 활동하신 것의 결과물들을 우리가 수확하고 누리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도 새벽에 부르짖어라.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깨워라.

하나님을 드라이브합니다. 몰아갑니다. 이것을 이루어달라고 합니다. 왜?

 

내가 이루고 싶은 게 그렇게 많은 것이에요.

그건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아들과 딸의 삶의 모습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지 않으면 하나님 됨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출애굽 때도 그랬고, 히스기야왕 때도 그랬고, 여리고성 때도 그랬고 뭘 한 겁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는 행동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신 행동을 했다는 것은 내 의지로, 내 생각으로,

내 계획으로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 아닙니까?

 

가만히 있는 거예요.

움직였지만, 하나님의 뜻이 움직인 거지, 내가 움직인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게으른, 수동적인 사람이라고요?

아니에요. 영적으로 게으른 자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새벽에 교회 나와서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게

영적으로 부지런한 겁니까?

 

세상일 다 멈추고 게으른 사람처럼 빈둥빈둥 놀아도

하루 웬 종일 하나님이 그리워서 하나님을 찾는 게.. 영적으로 부지런한 겁니다.

 

새벽부터 아니면 밤새가면서

이 세상일을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영적으로 부지런한 거예요?

아닙니다.

 

세상일 아무것도 안 해도 하나님을 보고 싶어가지고

새벽미명에 일어나 기도하고, 낮에 기도하고

너무 하나님 보고 싶어서 이 세상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어느 하나가 너무너무 강렬하게 소망이 되면, 열망하게 되면

다른 일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지 않습니까?

 

너무 하나님이 그리워서 사업도 못하겠고 공부도 못하겠고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그래서 손 놓고 있어요. 그 사람이 게으른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고 부지런한 사람이지요.

 

어떻게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간다고 가갖고 교회 와서

기껏 하나님, 내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이게 어떻게 부지런한 자입니까?

타락한 자지요. 영적으로.

 

그 귀한 하나님과만 대화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 위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될 기도시간에

바람피우는 세상 식으로 말하면 정부와 놀아나는 마음상태를 가지고

‘나, 돈 주세요. 나, 자식 잘되게 해주세요. 나, 이것 이루어주세요. 저거 이루어주세요.’

영적으로 온갖 바람을 다 피우고 있는 거예요.

그 맑은 새벽에 나가서.

 

이게 무슨 도대체 기독교를 알고 하는 얘기인지 나는 모르겠어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있는지 한번 묻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