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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와 같으리라

LNCK 2019. 11. 4. 18:44

다 이와 같으리라                          눅13:1~5                          출처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씨가 쓴 ‘청년기의 자기탐색’ 이라고 하는 그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를 단면을 말씀드립니다.


미국에 한 젊은 기자가 하나의 특별한 기사를 썼습니다.

그 제목은 “미국 국회의원들은 다 머리가 나쁘다.” 하는 타이틀의 글을 썼습니다.


물론 그럴만한 재료와 논리적인 글을 썼습니다.

이 문장을 다 읽어본 고참 기자가 그에게 충고했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면 항의가 빗발칠 텐데 어지간히 시끄럽게 되겠구먼!


그러니. 그러지 말고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할 테니

당신의 그 타이틀 속에다가 한 글자만 추가 해줬으면 좋겠구먼.” 그러시라고 타협을 했습니다.


이제 새로 만든 타이틀은 이렇습니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한 명만 빼놓고 모두가 머리가 나쁘다.”


이 기사가 나간 다음에 아무 항의도 없었답니다.

모두가 생각하기를 자기는 그 하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마다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삽니다.

자기는 아닌 것처럼, 자기는 예외인 것처럼, 자기만이 특별한 것처럼,

그것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하는 그런 글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란,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만 자기 지식이 됩니다.

들어도, 보아도, 경험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기억되고 있는 것까지도 지식이 아닙니다.

내가 실제로 몸으로 부딪혀서 그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 그거구나!”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우둔합니다.

그런고로, 추상적 진리가 실제적 진리로 바꾸어져야만 지식의 효력을 말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논리적으로 이해합니다. 혹은, 감성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느낌’ 이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역시 몸으로 부딪히는 것만큼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한번 더 나아가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처럼 경험해야만 되겠다는 거요. 경험해야 지식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경험은 단회적입니다.

어떤 경험이든 엄격히 말하면 단회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어요. 보세요, 죽음이라고 하는 경험! 딱 한번 밖에 없잖아요.

누가 죽어본 사람 있어요? 죽음이 뭔지 알고 싶다고요? 죽으면 끝났죠.

이제 아는 순간, 그는 죽었어요. 때로는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좋아요! 그 당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이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딱 한번에 끝나는 것들이에요.


사실은, 결혼도 한번에 끝나는 거예요. 요새와서는 여러 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사랑의 경험은 딱 한번이에요. 

물리적으로는 같은 경험이 반복될 수 있지만,

인식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경험은 한번밖에 없는 거예요.


같은 경험을 두 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경험해가면서 사는 것이에요.


▲지식이라는 것은 보아서 아는 사람이 있어요. 모든 것을 보기만 하면 되요.



그러면 확실한 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들어야 돼요. 보지 않아도 돼요. 듣기만 하면 됩니다.

누군가가 본 사람이 말해주면 나는 믿고 들어서 내 지식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만 경험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다 보아야할 것 없거든요.

한 가지만 보면 벌써 한 가지를 보고 “아! 이젠 알았다.”

그 다음, 그 다음 경험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현재의 경험만 가지고 먼 미래까지 전망을 합니다.

나이 많을 때까지 갈거 없잖아요.

젊었을 때 벌써 몇 번 경험하고 ‘인생이란?’ 다 알았어요.

이렇게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볼 줄 아는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삼고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꼭 경험할 필요 없어요.

책을 통해서도 듣고, 설교를 통해서도 듣고, 소위 '간접경험'으로 충분합니다.


그 사람만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수 있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내가 받아들이게 될 때,

내가 경험한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께서 뉴스 해설을 하는 것 같아요.

시사해설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그런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릴리에서 빌라도가 사람의 피를 저들의 제물에 섞어서 바쳤답니다.

아, 이런 사람을 죽일뿐더러 사람의 피를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제물에 섞어서 제사를 드렸다는데

이런 끔찍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 보고를 들으면서 해설을 합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눅13:2~3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뉴스를 또 하나 내놓았어요.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다는데 너희들도 아는 바와 같이 죽었다.

그러면 저들이 죄가 더 많으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갈릴리에서 있던 사건, 예루살렘에서 있던 사건,

끔찍한 사건을 보고, 듣고 예수님 이에 대해서 어떻게 처사해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 첫째가 뭐냐하면 저와 너희는 같다는 것이에요.

저 사람은 저렇게 비참하게 죽었어요. 그러나 그들과 너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여기서 해석을 찾아보면 갈릴리사람들은 원래 다혈질이고

반정부, 반정치. 그런 혁명을 자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들마다 갈릴리를 다스리기가 어려워서 ‘화약고’라는 말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혁명 같은 반항이 있을 때마다 한번씩 진멸을 하고 그들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실로암 못에 망대가 무너졌단 얘기는 역사적으로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해석이 하나 따릅니다.


하나님의 성전 세를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만 써야 되는데

성전 세 걷은 돈으로 수로 공사를 했어요.

하나님을 그것을 책망했던지 어쨌던지 좌우간 망대가 무너지면서 18명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저들은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돈으로 정치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려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의 재물이 됐다.'

이런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저 사람들과 너희들과 다르지 않다. 같다는걸 잊지마라!

비참하게 저주받은 것처럼 죽었지만 절대로 비판 하지 마라!

왜? 너와 그는 같으니까!"


같은 도덕성이요. 

같은 죄인이란 얘기입니다.


누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지마라.

저 사람의 죄 때문에 자기가 당한다고 비판하지마라!

저와 너는 같은 것이다!

하는 것이 첫째 교훈입니다. 
 

2) 두 번째는 저들은 (여러 죄인의) "대표"로 고난을 당한 것이라는 거예요.

제가 옛날 수 십 년 전에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노량진에서 영등포쪽으로 돌아오다가 흑석동 쪽으로 가야되겠는데

우회전을 하려고 하는데

2차선 도로에서 차들이 두 줄로 가고 있는데…

2차선에서 우회전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2차선에 차들이 꽉 차가지고 움직이지 않아요. 한치도 양보하지 않아요.

내가 1차선에 있는데 아무래도 2차선에 끼어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중에 우회전해야 될 장소에 와서

2차선에 선 사람들도 우회전하고

1차선에 있던 나도 그 차를 따라서 재빨리 우회전을 해버렸어요.


우회전을 했는데 바로 앞에 순경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딱 걸렸어요.

“왜 1차선에서 우회전을 하십니까?”

그래서 “예, 잘못했습니다. 지금 차들이 꽉 차서 양보를 안 해주고 밀리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렇게 됐다고” 했더니


“그럼, 딱지를 떼야지요.”

그래서 잠자코 딱지를 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경은 딱지로 떼느라고 글을 쓰고 있는데

내가 돌아다 보았더니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1차선에서 계속해서 우회전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여보, 순경양반.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이 우회전하고 있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진리를 말하더라구요.

“선생님, 참 무식하군요. 죄 지었다고 다 감옥에 가나요? 대표로 가는거지요, 대표로…”


그거는 맞는 얘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죄지었다고 다 벼락 맞습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만약 죄지었다고 다 감옥에 가면, 감옥이 이 세상보다 더 넓을지도 몰라요.

그건 아니죠. 대표로 가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교통법규 잘못 지킨적도 많지만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가끔 걸리죠? 그렇지 않아요?

대표로 representative 걸리는 것입니다


본문에 예루살렘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고

갈릴리에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그들만 죄인이냐? 아니요!

대표로 당한 것이다! 그런 말씀이에요.


그런고로, 우리는 어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마치, 내가 당하는 것처럼…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그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요즘 많이 유럽 여행을 가시죠?

로마를 가게 되면 반드시 폼페이를 가게 됩니다.

나폴리 옆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터지면서

폼페이 도시가 그만 용암과 화산재 속에 파묻혀 버렸어요.


지금 발굴해놓은 것을 우리가 보며 그 끔찍한 옛날의 모습을 봅니다.

개들도 쭈그리고 앉아서 죽었고 사람도 그대로 부둥켜안고 죽었고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보는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 폼페이냐?

로마를 향해서 하나님의 경고하신 것이거든요.

폼페이를 내려치고 난 다음에 로마를 쳤거든요.


그러면, 폼페이가 무너질 때

그때 마치 자신이 벌을 받는 것처럼 회개 했어야죠

그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저들이 대표로,

아니 어떤 때는 내 대신, 부모 대신 자녀가 당하기도 하고

내 대신 이웃이 당하기도 합니다.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해선 안됩니다.


벌써도 계속 경고가 있었습니다. 그 경고의 말씀을 들었어야지요.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죽었다.' 이건 메시지입니다. 회개하라고…

오늘 예수님이 해설해 주십니다.

“너희도 이와 같으리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경고하고 계십니다. 눅13:5 


▲여러분, 회개란 말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가 있어요.


회개해야 될 시간에 회개하지 않으면

첫째, 회개의 기회를 놓쳐요. 하나님이 기회를 주지 않아요.


두 번째는 회개 할 수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강팍해지고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서운 심판입니다.


자! 보세요, 잘못된줄 알아요. 기도할 때마다 눈물도 흘려요.

‘아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잘못했다고 얘기해야겠다 하다가도

딱 만나고 나서는 싸우고 온다고요.


여러분, 부부간에도 그런 경우가 많지요.

‘내가 잘못 했다. 내가 만나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은 늦게 들어오는 거예요. 문간에서 또 한바탕 싸우죠.

늘 뉘우쳐요. 잘못했다고 생각은 해요. 하면서도 회개하지 못해요.


왜요? 강팍해지니까!

마음이 강팍해지고, 마음이 교만해지고, 마음이 굳어지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게 되요.


한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지 못하다가

그대로 죽어 가는 사람을 수없이 봅니다.


참으로 불쌍해요. 뉘우친지 오래됐어요. 후회하고 뉘우치기는 했는데

허나, 회개를 실천에 옮기진 못해요. 하나님이 회개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분명히 말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바로를) 강팍케 하시니라.'

바로의 마음을 강팍해 하셨어요. 그대로 죽어버렸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이걸 알아야합니다.


회개! 기회가 있다는 것, 회개할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

회개하려고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이것이 가능한 것이에요.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회개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 이미 심판이 내린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디 선생님의 재미있는 피사가 있습니다.

‘마치 회개란 뭐냐 하면 꽃병 속에 들어있는 주먹과 같다.’


내가 꽃병에다가 내 주먹을 넣었단 말이에요. 이게 뭔가 움켜지고 있는데

이걸 놓지 않고는 절대로 손을 뺄 수가 없어요.


내 욕심과 교만을 다 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회개 못해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회개에요.

그걸 알아야한다는 얘기에요.


에디 깁스 라고 하는 종교 심리학자의 말에

회개란, 뉘우친다고 회개고, 눈물 흘린다고 회개가 아니다. 한평생 후회해도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한 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 죄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신다' 하는 의식을 가지고

그 다음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야 되요.


또, 회개는 하나님께 큰 은총에 대해서 내가 할 도리가 있어요.

회개에 윤리가 있어요. 나 혼자서 된다고 하는게 아니에요.

가서 빌어야 되요, 화해해야 되요, 용서를 구해야 되요.


행동으로 옯겨야 회개예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참 평화를 얻게 될 때, 그것이 진정한 회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이 두 사건을 해석하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지금이 중요한 거예요.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망대가 무너지는걸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고 지금 내가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지금이 복음이요, 은총이라는 것이죠.

아직도 살아있어서 이 음성을 듣고 있잖아요.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기 있단 말이야…


이 순간이 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종말론적 기회에요.

그 동안은 들어왔어요, 보아왔어요,

아니요. 이제는 몸으로 부딪히는 거예요.


내 몸을 내가 치고자, 자 이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끝이에요.

종말론적 기회로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지는 거예요.


실로암 담장이 무너져 죽었어요.

‘보라! 너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되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주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수없이 뉘우쳐 왔고 후회한 일도 많습니다마는, 참 회개가 없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아무 사람의 비판이나 평판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런 회개가 있어지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행동적 회개가 있게 하소서.


우리 앞에 전개된 이 많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나는 거듭 거듭 주님 앞에 가까이 가며 회개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고

그 크신 은총을 찬양하는 주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