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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열심 있는 신앙은? 마16:24~25 09.07.26.스크랩 축약
◑도입
▲지난 주간에 저는 서울 어느 한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이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는 성도 수가 2만 명 가까이 되는 큰 교회라
부 목사님도 한 20명 정도 두고 계셨는데,
들리는 소문에 부 목사님들의 생활이 굉장히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답니다.
본인으로서는 힘껏 목사님들을 대우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가 하고 교회 재정부와 교인 중
몇몇 큰 회사의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들에게 의뢰를 해서
부 목사님들의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봤답니다.
결과는, 그 교회 부목사님들의 수준은
그 교회 전체 교인의 소득 중 상위권에 드는 높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주. 이것은 단순비교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택의 지급여부, 또한 자동차 지급여부,
그리고 교인들 평균 경제적 수준도, 도시와 농촌이 다르고, 강남과 시외가 다릅니다.
그리고 아마 부목사님들이 받는 각종 혜택도 다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문의 전체 주제를 이해하시기 바라며, 각론에 흔들리지 맙시다.
또 일반 회사를 기준으로 해도
부목사님들의 사례비는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고민은 이랬습니다.
사역자들이 사역에 전심을 다하기 위해서는
목회 외에는 신경 쓸 일이 없어야 합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면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최선을 다해 사역자들을 써포트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11지파가 성전 일을 하는
레위인들에 대해 갖춰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으로 그 동안 이 목사님은
교회 임원들과 협의해서 부 목사님들을 힘껏 섬겼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만히 부목사님들을 보니,
그들 역시 걱정하고 염려하는 내용이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 교육 걱정하고,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하기 원하고,
더 좋은 집과 자동차를 원하더라는 것입니다.
주, 이게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남다르고 뛰어난 주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이 다 하는 걱정, 그 문제를 초월하고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나 좀 못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전혀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란 어렵겠습니다만.. 이런 사람이 진짜 열심 있는 주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물론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역자로서 가장 중요한, ‘내려놓고 비우는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 어렵고
단지 생계수단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닌가? ... 까지 생각이 들더랍니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역시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도 벌써 10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기서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별 문제없이 잘 커 주고,
교회도 큰 어려움 없이 그런대로 유지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은 늘 빠듯한데, 그건 여러분이나 저나 똑같이 겪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이제는 살 만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제가 어떤지 아세요?
가족들이든 교인들이든... 조금만 신경 쓰이게 하면... 그걸 못 참겠는 거 있지요?
무시당한 것 같고.. 권위를 침해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상합니다.
예배에 늦게 온다든지, 아무 통보 없이 예배를 빠진다든지 하는 교인이 있으면
그들의 사정을 헤아려주기 보다는.. 먼저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한 마디로 4~5년 전이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을
요즘은 제가 별 고민 없이 자행하는 겁니다.
이유가 뭐지요?
오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자아가 꿈틀대면서 자기긍정(↔자기부인)의 길로 가고 있는 겁니다.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목회를 사랑 없이 하니까
사람이 게을러지고 결국은 악한 데까지 가는 게 저였습니다.
물론 다시 추스리고 기도하면서 마음을 잡았지만
지난 주간은 자기를 부정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인데,
여러분은 자기를 부인하는 정도가 점점 더 깊어집니까,
아니면 저처럼 점점 더 약해져 갑니까?
우리 오늘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로서 진짜 신앙을 되찾아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설명
오늘 우리가 읽은 마16장은 시간대별로 보면 예수님 생애의 끝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오늘 사건 이후로는 그 어떤 기적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참 신앙이란 뭔지, 진짜 제자란 어떤 모습인지 등등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내면적인 태도와 자세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마16:24~25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찾으면 잃게 되고, 잃고자 하면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진짜 신앙인/참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말씀해 주시는데,
첫째는 자기부인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부인’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크게 보면, 같은 뜻입니다.
◑해석 및 적용
▲1. 자기 부인된 사람을, 사도바울식 표현으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신다고 했습니다.
의욕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
의욕과 능력 중에, 한 가지만 있는 사람,
의욕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 이렇게 사람을 구분해 볼 때
의외로 하나님은, 능력과 의욕이 둘 다 없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의욕과 능력이 다 없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 최악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뇌리에 베드로는 ‘수제자 베드로’ ‘사도들의 리더 베드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보기 드문 무능력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잡혀 가시자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자기 자신에 철저히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때는 능력의 한계 뿐 아니라, 의욕마저도 완전히 상실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이 나타나시지요?
그리고 친히 사명자로 세워 주시지요.
그 얘기는, 완전히 죽은 자 같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뭘 가지고 있고 뭘 해야겠다는 마음이 완전히 죽은 다음부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내 놓는 것입니다.
‘내가 노래를 좀 하지, 내가 연주를 좀 하지,
내가 설교를 좀 하지, 내가 행정은 좀 탁월하지, 내가 돈은 좀 있지’
이런 마음이 있으면 주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철저히 죽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사람만이 진짜입니다.
내 능력이란 것도.. 주 안에서 부활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의욕 또한.. 내 욕심과 야망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한 번 죽음을 경험한
후에라야 비로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십자가란.. ‘주님을 위해 겪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에게만 지워진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어제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십자가는 뭐냐?’ 물었더니
두 아이 다 ‘목사의 자녀로 사는 게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게 복이지 무슨 십자가냐 그랬더니
"아빠는 목사의 자녀로 산다는 게 뭔지 몰라. 우리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답니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십자가도 그리 가볍지가 않아. 알아 아빠?" 그러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누구나 다 자기 십자가가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는 건
똑같은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들께도 다들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란.. 세상 일을 향한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말합니다.
▲3. 십자가 짐을 질 때, 세상 짐이 사라집니다.
먼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려고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 짐은, 그 십자가를 감당하는 가운데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제 아내의 친구 중에 이런 집사가 있습니다.
어떤 개척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20년이 가까워도 좀처럼 교회가 자리를 못 잡는 겁니다.
교인들도 다 떠나서m 이제는 자기 부부 외에 몇 사람 밖에는 없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교회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꼭 갖추어야 될 것들 가운데
갖춘 게 별로 없다는 거예요.
찬양도 잘 못하시고, 설교도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고,
그렇다고 꼼꼼하게 일을 챙기시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모처럼 교인들이 들어와도.. 몇 달을 못 버틴다는 겁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자기 내외가 다 한다는 거예요.
자기는 반주와 교사를 20년 동안 하고 있고,
자기 남편은 재정부장을 20년 동안 했답니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나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을 했는데도.. 그러질 못했대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부흥해야 교회 다니는 것도 재미있을 텐데,
그런 얘기를 듣고 보면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집사는, 아직도 그 교회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한 번은, 제 아내에게 말하더랍니다.
'이게 내가 세상에서 져야 될 십자가라면 피하지 말자'고 남편이랑 약속을 했답니다.
놀라운 건, 그 내외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그 가정은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른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그 가정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세상 짐이 사라진 것입니다.)
자녀문제, 부부문제, 건강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이런 일들을 겪지 않고 지내왔다는 겁니다.
교회가 어렵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롭다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예화)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동안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거울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건강한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우리의 ‘복음으로 사는 현장’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현장에 있다고 해서 당장 뭐가 바뀌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 있는다는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장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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