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GrYp_JiDNkg
◈디모데야, 성품과 능력의 균형을 추구하라 딤후1:1~3
존 비비어
디모데후서를 쓸 이 시점에,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
더 정확히 말하면 사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감독할 때
바울이 이 편지(디모데후서)를 보냈습니다.
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위3절에 ‘청결한 양심’이 나오는데요.
한 목사님께서 저보고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존 비비어 목사, 타락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저는 그 질문이 있혀지지 않습니다. 점심식자 중에 이 질문을 하셨는대
먹고 있던 닭고기가 목에 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 분은 제가 구원 받기 전부터 목회를 하신,
제 대 선배요 영적 멘토이셨기 때문입니다.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걸까?’ 잠깐 생각하다가
나는 성령님께 여쭈었습니다.
‘마크 목사님이 원하시는 답이 뭘까요? 성령님!’
그러자 성령님은 제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평생토록 청결한 양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절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순간 양심이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양심에 말씀하시는 것을 더는 들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큰 곤경에 처한 것입니다.
결코 양심을 거스르지 마십시오.
아주 작은 일을 하더라도 양심이 그것을 압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타락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미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믿음과 성품을 칭찬한 사도바울
바울이 디모데처럼 칭찬하고 사랑한 제자가 없습니다!
딤후1장에 그 바울의 칭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사도였습니다.
거짓 사도는 어떤 일을 하죠?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자신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반면 진정한 사도는, 그들의 비전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거짓 없는 믿음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네 디모데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거짓이 없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거짓이 있는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 경고합니다.
디모데는 그런 사람이 아닌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위선자나 허풍쟁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바울이 디모데보다 다른 사도들을 더 자랑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도, 디모데를 칭찬했습니다.
빌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바로 제 열정이 됩니다.
저도 디모데처럼 이런 인정을 받길 소원합니다.
양심이 바른 사람이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이 제가 그의 마음에 합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다윗은 자기 입으로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 대해 그렇게 인정해주셨죠.
마찬가지로 디모데도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인정해 준 것이죠.
◑‘인격’과 ‘능력’이라는 양 극단
저 존 비비어는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두 극단을 봅니다.
믿는 자의 삶이 균형을 잃게 되는 두 가지 극단을 보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극단은,
저는 19년 동안 순회 말씀 선포 사역을 하면서
믿는 자의 삶이 균형을 잃게 되는 극단적인 경우를 종종 목격했습니다.
오로지 능력만을 좇다가
성품을 가벼이 여기는 극단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고전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위 구절에서 여기서 사랑은 성품을 나타내죠.
그 가운데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성품과 능력의 조화를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는 이와 반대로 삽니다.
그들은 능력만 추구하고, 성품을 사모하는 것은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품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능력을 추구합니다.
저는 기름부으심에 관한 예배를 위해서는
아주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가서 참석하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위해서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얻기 위한 예배라면, 수백 마일이라도 기꺼이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노여움과 분노, 비통함은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면서, 성품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문제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끄럽게 합니다.
▲제가 젊은 청년시절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에는 성령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한쪽 벽에는 지팡이와 목발을 걸어서 전시해 두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는 뜻입니다.
목발을 짚고 교회에 왔다가, 목발을 벗어던지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는 얘기죠.
제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는데,
한 시각장애우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가
시력을 되찾고 걸어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또 교회에, 구급차에 실려와 24시간 밖에 못산다고 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나가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재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기적도 물론 있고요)
그 교회에서는 이런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또 그 교회에서는 KKK단의 리더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이 복도로 내려오셨다가
그를 보고 바로 회복시켰습니다.
그는 그 날 구원을 받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교도소 사역을 했습니다.
아주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청년이었던 저는, 수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주여, 사단을 쫓아내는 사역에,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병자를 고치는 일에,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도록,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무려 2년 동안이나 매일 아침마다
최소 45분 동안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대개 매일 아침 90분을 제가 기도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인 45분은,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도록
저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 마디로 <능력>을 구한 것이었죠.
제가 2년을 그렇게 기도하자
어느 날 주님이 기도를 가로막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좀 더 일찍 저를 막으시지 않으셨느냐 하면,
당시 제 기도는 거의 독백 수준이었습니다.
기도가 대화가 되어야 했는데, 제 혼자 계속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으니
주님이 그 동안 개입하지 못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그 날은, 주님이 제 기도를 가로막으셨습니다.
‘네 기도는 과녁을 빗나갔다’ Your prayers are off target!
‘뭐라고요? 제 기도가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저는 제가 영혼을 구원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의 나라를 이기며
질병을 고치고, 사단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일으키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제 기도가 과녁을 벗어났다니요?’
그러자 성령님께서 제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들아, 많은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더라도
지옥에 갈 수 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두려움으로 떨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 무슨 뜻입니까?’
‘가룟 유다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고쳤다!
그도 회개하라고 설교했다.
5병2어 기적 후에, 다른 신자들이 떠났을 때, 유다는 나와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지금 지옥에 있다!’
저는 벌벌 떨기 시작하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소명 high calling 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친밀히 아는 것이다.’
That is to know me intimately!
▲여러분은 이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께 무엇을 간절히 기도로 간구했습니까?
빌3:8에서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친밀히) 알고..’
모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33:13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다윗도 똑같이 외쳤습니다. 그것은 친밀함이었습니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63:1에도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이 균형을 잃고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느냐,
자신이 얼마나 기름부음을 받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영성을, 영적 그릇의 크기를 측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나?’
‘그의 예언이 얼마나 잘 현실에 적중했나?’
여러분께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당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나귀가 영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닭이 세 번 울었습니다.
그렇다고 닭이 영적으로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거부하고 떠나신 뒤에도 예언을 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께 뻔뻔하게 불순종한 뒤에도 계속 예언했습니다.
발람의 예언은 여전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는 지옥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을 점쟁이로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능력을 추구하느라 성품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교회안에서 보는 현상가운데 하나입니다.
▲(관련 예화) 기름이 떨어져도 차는 계속 갑니다
만일 선지자이든 어떤 사역자이든 말씀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기름부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연적인 영역에서도 기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연료가 떨어져도
한 동안은 여전히 달려갑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선지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권능이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역이 그들에게 영적인 연료를 제공해주는 말씀에
견고하게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 그들은 계속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해서 균형을 맞추게 함
교회안에서 균형을 잃는 또 다른 이유는 성품만 추구하느라
능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디모데가 그 둘 가운데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이 경우 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1:5~6
바울은 첫 번째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은사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
디모데전서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바울은 두 번 째 편지에서 디모데가 얼마나
청결한 양심이 있는지 상기시키고
곧이어 그 안에 있는 은사를 불일듯하게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가 은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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