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1

기록된 말씀이 확실한 이유

LNCK 2019. 12. 13. 18:04

기록된 말씀이 확실한 이유 - YouTube

◈기록된 말씀이 확실한 이유           마4:7        11.08.14. 설교녹취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7 

마4:4, 6, 7, 10 참조. 

 

◑언어와 문자의 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는 이유는,

반만년 전에는 한반도에 아무도 살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때도 사람들이 살았다.

다만, 반만년 전에 글(문자)이 발명이 되어서,

그때부터 역사의 기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사람들이 살았지만, (역사)기록이 없다. 그래서 알 수 없다.

그것을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왜 구약의 본론(창12장 이후)이, 5천년 전 쯤에 시작되었느냐?

그 이유도, 5천년 전에 문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아브라함의 시대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어떻게 보존하고, 전달했느냐 하면,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했다.

창1장부터 ~11장까지 이야기는, 아마 노래로써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화라는 말이 왜 사용되느냐 하면,

신화란, 글이 없었을 시절에,

사람들이 노래로 기억하고 전달한 이야기를 말한다.

 

다만 그 속에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에는 ‘글’이란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글’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책이, 출애굽기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돌판에 십계명을 쓰신 사건이다.

그것이 ‘글’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언급이다.

 

최초로 글을 쓰신 이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의 글을 사용하셔서 전달하셨다는 뜻이다.

 

글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지만,

과거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중세시대에도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인구의 1%에 불과했고,

당시 성직자 중에도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1945년, 한국이 해방 되었을 때, 그때 문자해독률이 25%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옛날 구약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을지는.. 의문스럽다.

 

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모세의 율법 기록시기를 후대로 추정하느냐 하면,

그건 구약성경을 읽어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기 시대 등에)

율법을 쉽게 접하고 읽었던 흔적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나중에 기록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당시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고,

책을 발행하는 기술도 원시적이어서, 책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이 시편을 썼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윗이 직접 글을 쓸 줄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오리지널을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다.

 

모세의 율법을 모세가 직접 썼느냐,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일단 분량이 엄청나게 많고,

또 신명기에 모세가 죽은 사건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모세가 그것까지 직접 썼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에 자서전을 쓴 대통령 중에, 자기가 직접 집필한 사람이 몇 분이나 되었을까?

문필가가 따로 있어서 대필해 준다.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중요한 정보를 전해 받되,

그것을 직접 쓰는 것은 전문 문필가가 한다.

그럼에도 대필가가 아니라, ‘대통령의 자서전’이라고 출판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식때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국가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해 줄 것을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물어보라.’

 

이 말은 원래 케네디가 생각한 말이 아니고,

그의 스피치 라이트인, 테드 쏘렌슨이 생각한 문장이다.

 

하지만 케네디가 그것을 수용해서, 자기 연설문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케네디의 말로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율법도, 모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모세의 감독을 받아서 글로 썼다면,

그것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기록된 말씀’이 ‘직접 음성’보다 더 확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애초부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서

보조적인 역할이 아닌, 주된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에 예수님이 4번이나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을

사용하신 것이다.

 

마귀의 거짓과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방편으로,

예수님께서는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여기에서 글의 중요성, 글의 권위가 잘 드러난다.

글로 기록된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기록된 성경말씀이 곧 오리지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셨다.

그렇지 않다면, 이 중요한 순간에, 기록된 성경말씀을 인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글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 있고, 증거가 아무리 있어도,

세월이 지나면, 증인들은 세상을 떠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후대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증인들의 증언을 글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요21:24절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요한)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증거하고 기록했다’고 했다.

‘그 증거가 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요한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성경 모든 책에 해당된다.

 

예수님의 부활.. 왜 40일만 계셨다가 승천하셨을까?

한 40년 계시면서 부활을 증거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물론 성령님이 빨리 오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오늘 설교 내용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믿는 사람에게는 40일이 족하고, 못 믿는 사람에게는 40년도 부족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만일 우리가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하다. 2천년 전에 이미 일어난 사건인데,

우리가 과거에 임진왜란을 가서 볼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 625전쟁을 다시 가서 볼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해야만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글로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인데,

우리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신뢰한다.

그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근거다.

 

천안함 폭침 사건은,

모든 정황이 다 북한 소행임이 드러났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끝까지 그것을 의심한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증거가 있어도.. 의심하기 마련이다.

 

여러분, 의심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는 의구심에 종결을 찍고,

우리 인생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회 다니는 자매들이,

평소에는 예배도 빠지던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는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의구심에 종결을 찍을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옳은가, 아니면 더 좋은 사람이 있을까?

뭐 내가 손해 보는 건가, 뭐 이런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의문에 어느 선에서는 종결을 찍고,

이 사람이다. 더 이상 찾지 않겠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확신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우리는 늘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돌아서 갈까, 기다릴까

살까, 죽을까

투자할까, 회수할까

늘 주저하면서 사는데,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우리의 의문에 종결을 찍고

내 인생에 대하여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가지고

그리고 우리가 결정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다.

 

내가 세례를 받을 것인가

내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내가 이 봉사의 일을 맡을 것인가

 

내가 신학교에 갈 것인가

내가 믿음으로 살 것인가

이 결정을 누가 나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나 대신에 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결정을 내리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말씀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밭을 갈아야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이 성경의 신빙성은, 비슷한 시대에 다른 문헌을 비교하면, 확실하게 드러난다.

첫째는 <삼국사기>를 생각해 보자.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와 고조선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인 기록이다.

우리가 삼국시대, 고조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국내에선 <삼국사기>뿐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시대에 김부식에 의해 기록되었다.

신라가 멸망한 것이, 935년이다. 그러니까 신라가 멸망하고,

210년이 지난 후에

그 이전의 역사가 기록되었다는 얘기이다.

 

김부식이 직접 보고 쓴 것이 아니다.

그도 남의 얘기를 듣고, 그리고 쓴 것이다. 신화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책을 통해서 과거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해서 쓴 작품이다.

그런데 정말 트로이 전쟁이 역사에서 일어났는지

호머라는 인물이 정말 존재했는지

호머가 정말 <일리아드>를 쓴 것인지, 그것조차도 불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주전 1250년경의 사건인데

호머가 일리아드를 쓴 때는, 아무리 과거로 잡아도, 주전 800년경이다.

그러니까 트로이 전쟁이 발생하고, 450년 후에 그 책을 썼다는 얘기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임진왜란의 전투도(圖)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백년 후에 제작된 그림이다.

 

그러니까 화가가, 자기가 직접 임진왜란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남의 얘기를 전해 듣고서, 자기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 성경을 비교하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확성, 역사성, 신뢰성에 있어서

그 당시에 성경에 필적할만한 다른 문학작품이 없다.

 

(사람들이, 신빙성이 희박한 삼국사기, 일리아드, 임진왜란 그림은 믿으면서도,

정작 신빙성이 확실한 성경은 믿지 않으려 한다는 논지)

 

먼저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언제 최초의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느냐면,

20년 후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20년 후에, 사도바울이 서신을 쓰기 시작했고,

40년 후에 복음서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가장 짧게는 20년, 가장 늦게는 40년 안에,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기록이 되었다.

 

증인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증인들이 쓰든지,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감독을 받아서, 대필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책이 아니고, 27권의 책이, 여러 저자에 의해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한 가지 주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런데 그 기록의 내용과 주제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은,

이것은 진실을 쓴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결과이다.

 

그들이 서로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썼다면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여러 저자들이

한 주제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일관성 있게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은 그 당시 어떤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했을 때,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신약은, 증인들의 증언뿐만 아닌,

구약성경의 성취, 구약성경의 그 바탕 위에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라고 인용하신 것은,

구약성경이 예수님께서도 글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신빙성은, 예수님에 의해 직접 증명된다는 것이다.

구약의 신빙성을, ‘기록되었으되’ 하시면서, 예수님이 직접 증명하셨다.)

 

예수님은 소위 ‘직통계시’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통으로 들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거짓과 유혹을 물리치는데 있어서는,

글로 기록된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1500년 이전에 기록되었던 글(신8:3)을 인용해서,

마귀를 물리치셨다.

 

여기서 우리는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인용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께서 성경말씀을 신뢰하셨다면, 우리도 성경말씀을 신뢰할 수 있다.

 

이 말씀을 그냥 글로만 보면 안 된다. 이것은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