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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

LNCK 2019. 10. 19. 17:23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     요17:3, 잠8:30, 렘32:39         2017.07.16. 출처

김형익 목사

 

(설교 전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말씀을 통해서 온전하게 드러내 주시고

저희 모두가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감격하고 감사하고

그 은혜에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그런 예배가 되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면.. 그 다음에 열심히 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오해한 채 열심히 사랑한다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오해한 채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진짜 신뢰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열쇠는 성경에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아는것입니다

소경들이 코끼리 만지고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곳이 교회라고 하면, 그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아는 거죠

내가 생각할 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내가 느끼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나는 이런 하나님이면 좋겠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의 신앙을 멍들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이 말씀에 의존하는만큼 우리의 신앙은 온전해 집니다

 

이 신앙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를 10, 20, 30년 심지어 평생을 교회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과 이 모든 것들이

변해야 됩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정되어야 되는데

그 일(변화)이 일어나지 않은 채

내가 믿고 있는 대로 나는 그냥 흔들리지 않고 믿겠다...

아 이것은 참 고치기 힘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대로 믿어야 되는데

우리는 보면.. 아직도 너무 세상의 잡신을 섬기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 참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예수를 이래서 못 믿겠다그래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이해가 가죠

뭐 하라는 게 그렇게 많냐? 나는 그래서 못 믿겠다

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기독교가 의무의 목록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무와 명령으로 옭아매서 강요하시고

우리들을 억지로 끌고가시는 그런 하나님이신가요? No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게 되면

하나님을 좋아할 길이 정녕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쓰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종교적 언어가 되어서

별 감흥이 없이 우리는 주님 사랑해요노래를 부릅니다

 

근데 정말 주님이 좋으신가요?

젊은 청년들이 서로 사랑하면

야 좀 일찍 집에 들어와!’ 그러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그러고

그렇게 좋으냐?’ 그러면, 그렇게 좋다고 그럽니다

 

좋으면 말릴 수가 없죠

제대로 알고 좋은 것이죠 4 4

 

그런데 신앙생활 하시면서 여러분 공감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청교도 신학자 가운데 헨리 스쿠걸 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도 29세에 소천하셨어요

 

그런데 27세 때 쓴 책 가운데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아주 공감되는 얘기를 썼는데

17세기에 자기 시대의 영국 사람들, 교인들을 보니까

이혼을 하고 싶은데 성경에서 이혼하지 말라고 그래서

이혼하지 않고 그냥 같이 사는 남편과 아내처럼

그런 것처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다... (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옥갈 수는 없잖아요

 

하나님이 막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보다 내가 세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런 억지 신앙생활은) 오해도 보통 오해가 아니죠

일반적으로 종교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종교의 특징은 뭔가 하면

내가 신을 감동해서 신이 내게 복을 주게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감동시켜야 되죠

그래야 그 신이 내게 복을 주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겠죠

 

그래서 기도를 해도 보통 기도를 하면 안 되고

철야를 하든가 금식을 해야 돼요

 

헌금을 해도 그냥 보통 헌금을 하면 안 되고

좀 세게, 하나님이 감동하실만큼!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도록 하는 것!

그것은 종교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뇌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뇌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정반대죠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게 기독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4~5세기 무렵에 살았던 북아프리카의 주교

어거스틴이 있었습니다

 

2천년 교회역사에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바울-어거스틴 이렇게 연결되는 사람입니다

천재입니다

 

이 분이 17세에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믿었죠 유명한 모니카입니다

 

아들이 신앙에 돌아오기만 평생 기도하다가

아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진이 빠져서 죽은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당시 수상학 이라든지 인문학 이라든지

그는 공부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 공부 다 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방탕하게 살기도 하고, 마니교라는 고대 이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나중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 <고백론>이란 유명한 책을 쓰죠

거기서 어거스틴이 하는 얘기는

나는 예수를 믿으면 내가 즐기고 살아가는 이 모든 즐거움과 쾌락들을

다 던져야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한 고백은

한 때 잃어버리게 될까봐 그렇게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 때

정말 너무 상쾌했습니다

제게서 그걸 몰아내신 당신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당신은

비록 피와 살에는 아니지만

어떤 즐거움보다 감미롭습니다

마음속 어떤 비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는 당신은

모든 빛보다 더 빛나는 분이십니다

자신들에게서 모든 영광을 찾으려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모든 영광을 능가하는 분이십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빛,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시여!’

 

일반적으로 우리가 공감하시죠?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아이고 내가 죽기 전에나 예수 믿어야지! 이런 저런 것 다 해보고나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너무 몰라서 그래요

진짜를 너무 몰라서 그래요!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변에 대저택을 지어 주시고

너희가 여기와서 이것 다 즐겨 이것 다 네 거야!’ 하시는데

우리는 철모르는 어린애처럼

진흙탕에서 비비고 놀면서 이게 더 좋다고 말한다

 

세상이 너무 크게 보이죠

그러니까 어거스틴의 이야기는 독특한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 모두의 고백인 것이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입니다

삼상14장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 전투를 하느데

블레셋과 무기나 병력의 차이가 너무 열세로 밀렸어요

블레셋과 맞서 싸울 수가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말하죠

군인들에게 금식해라고 명합니다

전쟁에서 이길 때까지는 우리는 밥 안 먹고 싸운다!’

 

여러분, 이게 언뜻 보면 굉장히 신앙이 좋아 보입니다

대단한 거 아닙니까, 전쟁을 앞두고!

 

요즘 전투야 뭐 컴퓨터를 조작하고 합니다만

그때는 무거운 무기를 들고 나가서 하루 종일 힘으로 싸워야 되는데

밥 안 먹여서 전쟁에 내보낸다니요!

 

어떻게 전쟁에 이기겠어요?

근데 사울이 그렇게 (금식을) 명령했거든요

 

여러분 이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믿음이 무지하게 좋든지

-아니면 미친 사람이든지

 

그런데 사울은 믿음이 좋았다고 성경에 얘기하지 않죠

그럼 왜 금식을 하자고 그랬을까요?

불안했던거죠!

이겨야 되는데 불안한 거죠, 확신이 없었던 거죠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금식이라고 하는 극단적,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안심시켜 줄 것이라는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자기 행위에 근거해서 만들어 내는 거죠

 

설마 내가 금식을 했는데

하나님이 모른 척 하실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종교적 극단적 행위를 통해서

그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그렇게 값싸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린 것은

결국은 다 .. 있는 것은 뭔가 하면

뭔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하나님이 우리한테 뭘 가져오게 한다..

 

이런 생각들이 있으면

신앙을 의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죠

 

그러면 신앙생활 하기 굉장히 힘들어 집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이 너무나 이상이 높으신 분인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젊었을 때 스스로 절망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여러분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아는 하나님은

얼만큼 성경이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과 일치합니까?

 

싱크로(일치)율이 100%입니까?

아니면 싱크로율이 아예 0%10%입니까?

 

얼만큼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당신이 이런 분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 하나님은

일치된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 이야기는 긴 설명입니다

주어진 50분 안에 다 못하더라도

궁금하신 분은 제 책을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1장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시작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창조하셨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우리도 그 목적에 우리 자신을 맞출 수 있고

그 목적을 알아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이야기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뭘 하셨을까요?

 

이와 연관된 질문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몇 분이시죠?

 

제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천지 창조 전에는 뭐 하셨어?’

 

그때 마침 내가 그런 관계된 신학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들이 던진 질문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초등 3학년이지만 얘는 인생에 대해서 굉장히 비관적인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학교가는 것도 싫은데 가야 되고

갔다 오면 하기 싫은데 숙제 해야 되고

또 놀려고 하면 밤이 되고 캄캄해지고

그 다음날은 또 학교에 가야 되고..

인생이 뭐 이러냐?’

 

그리고 아빠를 보면 허구헌날 책만 보고 앉아있는데

캄캄하다.. 왜 살아야 되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이 혹시 심심해서 사람을 창조하신게 아니냐?

왜냐면 하나님은 혼자 계시니까

영원히 심심하셔서 우리를 그냥 자기가 레고를 가지고 뭘 만드는 식으로

심심풀이로 우리를 만들어서

마치 우리가 장기판에 말이나 되는 듯..’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황당하죠

 

제 아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해는

하나님이 심심하셨을 것이다..

영원히 심심하셨을 것이다 (창세 전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몇분 이신가요?’

 

삼위일체란 말 자체는 성경에 직접 안 나옵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셋이다 하나다 이런 인간이 만들어낸 숫자로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 숫자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제한된

인간이 인간에게 뭔가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무한을 유한에다 담아낼 수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세 분이다, 한 분이다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 말로 굳이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세 분 한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이것은 장로교에 오래도록 확립되어 있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럼 세 분 한 하나님에서

세 분이라 표현한 의미는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맞죠?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 아니세요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신다 하실 때

예수님도 보혜사이신데, 또 다른 보혜사, 다른 신격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오셨다는 얘기가 아니고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다는 얘기입니다

사도신경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세 분 하나님을 우리가 얘기할 때

다신론, 삼신론이 아닙니다 유일신론이라 그럽니다

 

단일신론은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에요

 

성경은 이 세 분이 영원성과 신성함과 전능함과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얘기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심심하지는 않으셨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심심하지 않으셨을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럼 태초 이전에는 뭘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전부 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하신 내용을 공히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상당히 긴 기도를 하셨던 것을

기록합니다

 

그 내용은 놀랍습니다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는 얘기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는 아니라는 얘기죠

 

뭐라고 기도하시죠?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이 때는 무슨 때죠?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하는 요2장의 그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때입니다

 

드디어 그 때가 왔습니다 인류구속을 이루실 때가 왔습니다

이 때가 왔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어떤 것을 발견하죠?

,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서로를 영광을 돌리는 관계에 계시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5절에 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창세 전에라 그럽니다

지금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신 것을 요한이 듣고 있죠

듣고서 썼습니다

 

요한이 듣고 있는데, 요한이 이 내용을 들었을 때 어땠을 것 같습니까?

저는 요한의 심장이 멎었을 것 같아요, 순간!

왜요?

이 분이 그리스도요, 메시야 라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으 기름부음 받은 자요, 구약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지만 지금 주님이 뭐라 그러세요?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 그 영광으로써

지금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지금 내 옆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저 분(예수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3년 동안 살을 맞대고 같이 지냈던 이 분이

3년 동안 한 솥밥 먹었던 이 분이

단순히 기적을 베푸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계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 영광 받으신 주님을 뵈었을 때

반응을 어떻게 합니까?

죽은 자와 같이 그 앞에 엎드려 집니다

 

예수님한테 하이 파이브를 하고,

어휴 오래 동안 못 만났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러지 않았어요

그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졌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사실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아버지와 내가 영광을 누렸다고 그럽니다

도대체 영광이란 단어는 얼마나 어려운 단어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뭘 한다 그러는데

 

저희 할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형기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그때 제가 뭔지 몰랐어요

 

극장에 가지 말라는 소리인가?

춤추러 가지 말라는 소리인가?

이렇게 이해했단 말이에요

 

잠언8장에서 이 말씀을 설명하는데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여기서 내가는 지혜가 의인화 되어서, 주어가 되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내가 그 곁에

나는 누구고 그는 누구이기에 창조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는 지혜로 의인화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은

대부분 성경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럼 는 누구입니까?

성부하나님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세상을 창조할 때 얘기를 하고 있는데

뭐라고 말씀하는가 하니

날마다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이 되었고

항상 성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즐거워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즐거워하셨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기뻐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것도 항상!

 

그러면 요한복음17장에서 말씀한 것

우리가 서로 영광을 주고 받았습니다는 말씀은

잠언에서 더 구체적으로

영광이란 추상적, 종교적 단어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기뻐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서로가!’

 

여러분, 사람들 중에서도...

 

................................ P2에서 계속 ............................




너는 너무 눈이 높아!’

우리가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고

만족시켜 줄 존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어떤 흠도 티도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완전하신 눈높이에 완전함이 아니고서는

그 눈높이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만족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토록, 창조 이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심심하신게 아니라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이것을 고후13:13절에서 바울사도가

고린도후서를 다 쓰기를 마치면서

목사님들이 축도할 때 가장 많이 쓰는 구절이죠

그 구절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오는데 이거죠

 

성령의 펠로우십, 성령의 코이노니아, 성령의 교제입니다

성령의 교제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가지시는

그 완벽한 교제!

 

그것이 교회에... 라는 거거 든요

 

무슨 얘기입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완전하게 기뻐하시는

 

사람은 (서로를) 알면 알수록 만족이 되요?

겪어보셨잖아요 살아보셨잖아요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아요

 

(인간은) 알면 알수록 인간이 그런 인간인줄 몰랐다..

내가 오해했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면 완전하시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싫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싫어하는 것은) 오해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기뻐하시는 교통하심,

교제가운데 계셨는데

이 교제가 만들어 내는 게 뭔가하면

이건 조나단 에드워즈 라는 탁월한 신학자의 설명인데

 

그 분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이 성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가

완전한 기쁨, 완전한 행복, 완전한 즐거움,

완전한 것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서가 우리에게 있는데

기쁨과 슬픔의 차이가 뭘까요?

 

슬픔은 꾹꾹 삼기는 성격이 있지만

기쁨은 발산하고 싶어요

 

기쁨이란 것은 말을 못하고 괴로워해요?

 

제가 중국 선교사로 있을 때

중국에서 (선교사) 회의를 할 때 너무 회의가 잘 안 되고

그래서 제가 바깥에 나와서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제 아들이 어제 (중국에서) 반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길거리에는 죄다 중국사람이니 뭐 기쁨을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선교사들이 회의하는데 제가 긴급 발언을 했어요

그 기쁨으로 미칠 것 같아서

제 아들이 반장이 되었는데... ’ 얘기를 하니까 살겠더라고요

숨이 쉬어지더라고요

 

기쁜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기쁨이, 이런 천박한 기쁨이 아닙니다

완전한 기쁨을 누리시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이 기쁨을 성삼위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에게 그 기쁨을 주고 싶어하셨어요

 

기쁨을 주고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는 뜻이지만

하나님과 소통이 되는 존재라는 얘기도 됩니다

 

여러분,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심방을 하는데

가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뭘 부르더라고요 야 빨리 와 캐서린!’ 막 불러요

 

이 집에 딸이 캐서린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강아지가 오더라고요

기도하자 그러니까 개가 발을 (기도자세로) 모으더라고요

이렇게 누구랑 좋은 것은 같이 하길 원하는 거죠

 

개가 아니라 사람만 하나님과 소통이 되요


그 소통을, 하나님께서, 하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셔서..

 

여러분 창1, 2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드러내주는 책이거든요

다른 책은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범죄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왜 마지막에 창조하셨죠?

아주 완벽한 환경을 하나님이 먼저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입에서 불평이라고는 조금도 나올 수 없도록

그래서 하루 하루 주님이 감탄하시죠

아 너무 좋았더라, 와 너무 멋있어, 너무 좋아!’

매일 매일

그리고 완전한 세상에 사람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세요

 

여러분 민수기나 신명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죠

너희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너희가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너희가 파지 않은 우물물을 마실 거고

너희가 심지 않은 유실수에서 과일을 먹을 것이고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이게 에덴동산에서 그대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좋다고 그러신 게 하나있죠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 좋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담이 나 결혼 시켜 달라고 철야 금식기도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걸 예비하신 게 아니라

아담이 외롭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전에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걸 아시고 하와를 만들어 주셨어요


하와를 만들어 주시는 장면도 보세요

아담아 저기 가서 진흙 좀 퍼 와라. 진흙을 이겨 봐라

이렇게 하시지 않았죠

아담은 팔자 좋게 자고 있고

주께서 외과수술 다 하시고

덮으시고 다 만드시고 야 일어나 봐!’ 깨우셨어요  서프라이즈


아담이 깜짝 놀라서 뭐라고 해요?

우와!’ 이게 아담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우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에요 너무 멋있어요 하나님!’

 

이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인간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고

에덴이란 뜻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인데

아담이 지은 이름이 아니에요. 동물이름은 아담이 지었지만,

에덴의 뜻은 기쁨, 환희 pleasure’입니다

 

왜 하나님은 동산을 만들어놓고 기쁨이란 이름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기쁨을 주고 싶어서!

 

왜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까?

기쁨을 소통하시고자!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되죠?

와 기쁘다 좋다 와

그것으로 끝나지 않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면,

우리는 종교적 언어로 일반적으로 표현합니다

은혜 받았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은

슬퍼하거나 울지 않아요

눈물은 흘릴 수 있어요

 

그러나 진짜 은혜 받으면

세상에 그거보다 더 기쁘고 천국 같은 게 없어요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진짜 은혜를 받은 증거는 뭔가 하면

너무 좋아요 너무 고마워요

불평이 막 나와야 되는데 너무 감사해해요

하늘의 기쁨이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의 기쁨을 소통하시기를 원하셨고

주기를 원하셔서

아담은 그것을 받고, 은혜로 받아요


그리고는 하게 되는 인간의 반응이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찬송 ,찬양, 예배, 감사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요

 

하나님 같은 분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게 영광이란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요리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 1번에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어봅니다

장로교의 표준문서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enjoy Him

 

-그러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둘이 별개의 얘기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나요, 여러분이?

코피 터지게 봉사하는 것?

헌금을 많이 내는 것?

철야기도, 금식기도하는 것이에요?

우리 인생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거에요?

 

그럴지라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얘기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길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에요 그게!

 

영어단어에는 기쁘다는 뜻으로 please 가 있고 enjoy가 있어요

please는 나의 까다로운 상사를 내가 막 어떻게 기쁘게 하는 것

그게 please하는 것이에요 이건 때때로 기분나빠요

 

그런데 enjoy는 내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문답은 하나님을 please 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인조이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좋아하죠?

 

우리가 오해 가운데 있고

이 세상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한

어떻게 그 하나님을 좋아하죠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뭔가를 드려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이 내게 힘을 도와주고

내게 뭔가 축복을 주기를 바라는

그런 식의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는

편안하게 믿을 수 있나요?

 

우리는 인생에서 다 죄인된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훌륭하실 수는 있어도 완벽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내가 어떻게 뭔가를 달성하면 거기에 대해서 사탕을 주고 상을 주고

엄격하게.. 내가 필요한 줄 알면서도..


내가 그것을 달라고 조르고 울며불며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주는 부모! 그게 무슨 부모입니까

아무리 못 돼도 그렇지..

달라고 안 해도 주는 게 올바른 부모잖아요

 

세상의 부모도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변덕스럽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울며불며 사정해서

그 마음을 사야 되는

그 마음에 뭔가 간절한 호소를 줘야 되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섬기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마음에 샬롬, 평안은 없습니다!

 

불안하죠

기도하고도 불안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내가 언잔케 한 것은 없나?

혹시 내가 하나님을 감동 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세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도

6장 주기도문의 앞과 뒤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 하늘 아버지는 너희가 뭐가 필요한지 다 알고 계셔

기도 안 해도 알고 계시고 그걸 주실 거야!’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서는

너희가 굳이 염려하거나 굳이 그것에 목메지 않아도 돼!

그것은 주셔!

 

먼저 하나님를 구해!

이게 너희가 사는 길이야!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정리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는

기쁨을 주고 싶어서 창조하셨어요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의 동기로 설명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돈 벌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식 잘 키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인생의 목적이 우리가 다 인생의 수많은 일들을 내려놓고 살 수는 없어요

우리도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분을 즐거워하고

그 분안에서 만족하고 그 분을 좋아하고

그 분을 사랑함으로써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그게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일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가서

사울한테 쫓길 때

이렇게 사울한테 자기를

지금 20대의 나이에, 사울에게 쫓기고

지금 죽기살기로 도망다니고 있는데

빚진 자, 원통한 자, 눌린 자 이런 사람들이

4백명이 모여들었습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뭐 개척교회라고 그래도 4백명 오면 좋긴 좋겠지만

뭐 될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거기에는

 

4백명이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시34편을 쓰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선하심을 머리로 알지 말고

맛보아 알라고.. 이게 생명이라고..

 

너희들의 인생이 그러그러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이 말 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자기 코가 석자입니다

자기도 지금 인생이 복잡합니다

내일 살아있을지,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간증이 진짜 힘이 있다는 거 아세요?

 

여러분이 핀 다음에 간증하는 것은 힘이 없어요

왜요?

그 간증은 형제들을 약올리는 간증입니다 그렇잖아요?

 

간증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아요

기도해서 그렇게 되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간증을 듣는 사람들 중에

그 간증자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한 사람도 많거든요

 

그런데 왜 나는 안 되지?

하나님이 나한테 삐지셨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아 나도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되겠구나

이런 식으로 가는 게 종교생활 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자기가 지금 이런 상황에 있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이게 놀라운 것이라고..

이 간증은 나와 비슷한 처지, 이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저 사람은 저 상황에서 어떻게 살지?

하나님 정말 놀랍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뭡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이죠

경험적으로!

 

그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라는 것 아세요?

제가 예레미야 32장 말씀을 읽었는데

이게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 (the good 토브)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32:39

 

39~41절에 복이란 말이 반복되는데

복이라는 게 중국사람들이 문 앞에 거꾸로 복 자를 써 놓는 그런 복이 아니고

여기서 ‘(히, 토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그럴 때

그 선하다 라는 말이

명사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해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베푸시고

그 선하심을 맛보게 하신다는 얘기죠

 

그래서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선하심을 베풀어주기 위해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

 

오늘 우리에게 유효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유효한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서 떠나지 않게 하고

 

이 말씀을 제가 좀 설명 드리면

하나님이 한 마음, 한 길.. 한 목적이란 말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는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나눠어지지 않죠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우리는 적어도 여기에 대해 로마서에서 바울이 쓴 것처럼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롬14:7

 

이것은 교회의 전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장로, 목사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전제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나는 나를 위해 사는데?‘

그럼 그 사람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없다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

매일 넘어져도, 우리는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경외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렘32:39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그 후손들이 맛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겠다... 이게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겠다.. 라고 번역했어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인 것이,

32:39~40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는 갈망이

우리 속에서 넘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일이니까 예배하러 나온다가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왜 그런 마음이 생길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니까!

 

C. S. 루이스가 한 얘기인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혼자 찬양, 예배 받기를 원하시고

무슨 허영심에 들뜬 여자처럼 왜 그러시나?

 

C. S. 루이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믿기 전에,

그런데 예수 믿은 다음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 이제 알겠다, 세상은 찬사로 가득하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찬사,

자기가 좋아하는 자연에 대한 찬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찬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말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지존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사,

(C. S. 루이스의 얘기인데)

그 찬송이라는 것은 기쁨의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여러분들이 막 감동하고, 뭔가 막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 보면

그 넘치는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병 걸립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내가 맛보고 누리고 있으면 그걸 표현해야 합니다

 

그게 찬송이고,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들에 대해 내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고 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만 아니라

우리가 제일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설계되었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그 어떤 영어성경에

desire라고 번역했는데

예배하고 싶은 열망, 갈망이 막 생기게 하겠대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요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갈망이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가득해서

주일 아침에 우리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뒤집어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마음, 그런 desire 열망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열망

그런 열망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구약에 보면

맨날 하나님을 떠난 역사입니다

호세야서의 고멜 얘기만 아니라,

다들 떠나요 밥 먹여주면 밥 먹고 떠납니다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뭐라 그러냐면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게 하시겠데요

 

이게 새언약에 대한 예언이거든요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면,

거듭난 사람은 절대 떠나지 않아요 하나님을!

절대 떠나지 않아요, 죽어요!

 

가끔 방황은 하지만, 떠나지는 않아요

결코 떠나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시죠

왜요?

하나님을 좋아하니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41절에는 이렇게 말하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32:4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정리하시면서

너희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라 하셨죠

그걸 우리한테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가 기쁨으로 너희에게 복을 주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너희를 사랑하신데요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러니까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준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처럼 말 안 듣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선하심을 맛보게 하는 것은

 

내가 약속, 언약을 했기 때문에 억지로 한다

이 웬수야!’ 이게 아니란 의미죠

 

나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는게 너무 좋다

이게 창조에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런 거죠

여러분 취미생활하는 사람들은

피곤할 텐데 또 취미생활하러 차 타고 갑니다 밤낚시도 가고..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죠

자기 취미니까 자기에게 기쁨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선을 베푸시는 것은

기뻐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베니아 풀러 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썼어요

사명선언문 이런 것 말하잖아요

하나님의 사명이 하나님의 책상 머리맡에 써 있대요


하나님이 아침에 벌떡 일어나셔서 (안 주무시는대도)

상상해 보세요 액자에 걸려있어요

나의 사명은 OO를 섬기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사명은 형익이를 섬기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섬기십니까?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라딘의 요술램프,

비비면 나오는 지니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분이 우리를 향하여 낮아지시고

우리를 섬기겠다고 하시고...

(여기서 원본 동영상이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