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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참 권위

LNCK 2019. 12. 30. 15:30

 

◈크리스천의 참 권위         행15:1~6           11.01.09.인터넷설교일부녹취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불거진 초대교회의 위기


▲15:5절,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찾아간 것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유대 기독교인들이

할례문제와 관련하여, 안디옥교회에 일으킨 평지풍파와 관련해서

예루살렘의 12사도들의 판결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막상 예루살렘 모교회에 찾아가보니,

뜻밖에도 예루살렘 모교회에도,

'할례가 구원의 절대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 


그것은 당시 크리스천들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그때까지도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안디옥교회처럼, 예루살렘 모교회 역시도

할례 문제로 인해 평지풍파에 휩쓸릴 수 있었다.


▲15: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얼핏 보면 사도와 장로들만 모인 것으로 이해되지만

우리말 ‘모이다’로 번역된 헬라어 ‘쉬나고’는 ‘함께 불러 모은다’는 의미다.


즉, 예루살렘 모교회의 최고지도자인 사도들을 필두로 해서,

장로들과 그 교회 모든 지도자 그룹이

할례문제와 관련해서 관계되는 모든 관련자들을 다 불러모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행15:12절은, 그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켜,

‘온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모교회의 사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교회 장로들,

할례 문제와 관계있는 모든 관련자들,

나아가 할례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교인들이.. 전원 회의로 모였다는 것이다.


이 회의를 가리켜, 역사적으로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부른다.

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관한 사람들은 ‘12사도들’이었다.



◑1. 사도들의 권위가 문제의 결론을 내려주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주도한 사람도,

그리고 마침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복음에 위배된다는..

교회의 공식적 결론을 도출한 사람도..

모두 예루살렘교회의 12사도들이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만약 이 당시에 예루살렘 모교회에 사도들이 없었다면,

그 민감한 할례문제와 관련해서,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리지도 못했을 것이요,


설령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다 할지라도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하는 것은,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교회의 공식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지는 못했을 것이요,


만에 하나, 그런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할지라도,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굳게 믿는 유대인들은,

절대로 그 결론에 승복하지 않고, 두고두고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를 계기로,

할례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곳에 12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기는 했지만.. 12:2)


사도들의 권위가 자칫 초대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시킬수도 있는

그 엄청난 주제인 ‘할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도리어 복음 위에 더욱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의 권위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의 권위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도들에게는, 로마 총독이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권력이 없었다.

사도들에게는, 유대교 지도자와 같은 지식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에게 예루살렘 거상들처럼,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가진 것도 전혀 없고, 내세울 것도 아무 것도 없는 사도들은,

무식한 갈릴리 출신 빈민들이었을 뿐이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들에게는 그 어떤 형태의 권위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모교회 교인들은 물론이요,

예루살렘에서 무려 480km나 떨어져 있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12사도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안디옥 교인들마저도,

자신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신들의 목회자(바나바, 바울)의 권위보다

어떻게 12사도의 권위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을까?

 

(안디옥 교회의 할례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곳 사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도록 방문한 것을 보면,

행15장 이 시점에서는 바울과 바나바 사도의 권위가, 12사도의 권위보다는

한 수 아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유다 대신에 사도를 보선할 때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사도로 보선될 사람의 자격을 밝혔는데, 다음과 같다.


행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사도들은

이를테면, 예수님의 직계제자들이었다.

3년에 걸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과 함께 떡을 떼고,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직계제자들이었다.


그들이 초대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지닌, 사도들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도 사도였지만, 아직은 그들만큼 권위가 없었던 것 같다.


초대교회가 할례문제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초대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도록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사도들의 권위는

그 출처가 사도들 자신이 아니었다.


그 권위의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셨고, 사도들이 한 것이라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것뿐이었다.


12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뒤에, 다시 이 땅으로 강림하신

주님의 영(성령)과도 일평생 함께 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권위가, 12사도들을 통해

정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 것이다. 또한 계속 함께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적인 권위divine authority가 있었던 것이다.

 


◑2. 바울 사도의 권위


그런데 사도행전은 바울바나바를 가리켜서도

행13:43절부터 벌써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똑같은 ‘사도’라는 호칭이긴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안디옥 교인들은, 자신들이 존경하고 신뢰하는 바울과 바나바 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 불러주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직계제자인 12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를

바울과 바나바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할례 문제를, 예루살렘 모교회에 상정해서, 해답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사도의 권위는, 교인들이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도의 권위는, 그 사도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성자 하나님, 그 분이 권위의 원천이 되셨다.


사도바울은 비록 주님의 직계제자는 아니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뒤에는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때 그의 말과 글이,

나중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두 성경말씀이 됨으로써

그는 최고의 영적 권위자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로마 황제조차 감히 꿈꿀 수도 없는 권위였다.


그 로마황제 앞에 비하면, 참수형을 당해 죽은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에 의해 더렵혀진 로마제국은

가장 비참한 인물로 보이던 바울에 의해 새로워졌고,

로마 황제에 의해 야기된 세상의 혼돈과 혼란은

참수형을 당해 죽은 바울에 의해 종식되었다.


바울이 일평생토록 주님과 함께 할 때,

그를 통해 역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로 인함이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시대를 위한 사도들인 것을 아시는가?


만약 이 사실을 자각한다면, 우리 모두 사도다운 사도,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야 한다.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다.

크리스천의 권위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목회자의 권위는, 직책이나 호칭, 교황청이나 교단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교회의 권위는, 예배당의 화려함이나 웅장함, 교인의 숫자로부터 오지 않는다.


우리의 권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지도 않는다.

그 권위의 원천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를 가진 사도들만이

이 땅의 모든 혼돈과 혼란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영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마치는 말

모세가 세계최고 최대의 제국 이집트의 왕자였을 때,

그는 그의 동족인 히브리 노예로부터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80노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좇았을 때,

가진 것이라고는 마른 막대기 하나뿐이었던 모세의 권위는

천하무적의 군대를 지닌, 이집트 제국 파라오의 권위를 압도했다.


베들레헴의 양치기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무기 하나 가진 것 없는 다윗 앞에서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거인 골리앗의 권위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왕이 된 다윗이,

스스로 자기 권위의 출처가 되려했을 때,

그의 권위는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뒤쫓음으로써,

무너졌던 자기 권위를 하나님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권위를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권위를 자랑하고, 내세우고 있는가?

그것은 바울의 권위, 모세의 권위, 다윗의 권위와 같이

철저히 영적인 권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되는 권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권위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묵묵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뒤쫓는 용기 있는 크리스천이 된다.

이런 사람만이, 이 세상의 혼란과 혼돈을 종식시키는

이 시대의 참 ‘사도’들이 될 것이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으로서의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