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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下의 비극적 결말?

LNCK 2019. 12. 25. 15:47

사무엘의 비극적 결말?              삼하24:11~25                    전현철 목사

 

 

동기가 잘못된 인구조사

다윗은 인구조사를 좋은 목적으로 할 수도 있었으나,

그 조사의 동기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압도 이건 아니라고 말렸고,

다윗도 이 인구조사를 하고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선지자 갓이 나와서 심판하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볼 때 잘못된 일이었다.

 

인구조사가 잘못될 수 있는 원인(가능성)을 추측해 보면

인구조사는 징병이나 징세를 위한 억압주의적 수단으로 여겨졌다.

지금도 중국에는 애를 낳아도 신고 안하는 집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세계에는 얼마나 더했겠는가!

 

이 인구조사는 결국 세금을 많이 내게 하고, 징병자료로 쓰일 수 있다보니까

백성들 입장에서는 관료적 억압주의로 느껴질 수 있었다.

고대에서는 이 인구조사가 왕권과 귀족들의 억압적 정치도구로 종종 쓰였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군사를 의지하게 되는

또한 자기 군사력을 과시하게 되는 교만, 자만심이 동기가 될 수 있다.

 

이 인구조사를 핑계로 다른 나쁜 일을 덮어버릴 수 있었다.

어떤 이슈를 대두시켜서 문제되는 일을 살짝 덮을 수 있지 않는가!

(가능성이다.)

 

여론을 거슬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하층민들이야 당연히 싫어한 일이고,

요압이나, 수하 장수들도 안 좋게 여긴 것을

위에서 너무 억누르며, 여론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도자는 여론을 꼭 따를 필요는 없지만

여론의 반대가 거셀 때는, 꼭 재고가 필요하다. (중략)

 

 

사무엘의 안 좋은 결말

 

사무엘하는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

구약의 대표적 성군인 다윗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이야기를 마치고 있지 않다.

만약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다면,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이야기로 멋있게 끝맺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열왕기상 서두에도 다윗의 기록이 언급되기는 하나

열왕기상솔로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서를 끝내기로는 너무 안 좋은 결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서는 다윗을 이상적인 인물로 만들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실패와 죄를 적나라하게 공개하면서 다윗이 실패를 말한다.

 

인간 다윗의 성공이 이스라엘 나라를 이룬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이 모든 구속역사를 인도하고 이끌어 감을 밝히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통해서였지만 말이다.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후에 성전이 건축된다.

그 성전이 건축되는 역사는, 다윗의 업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다윗이 받은 죄사함에서 나온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이룬 것(공로)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행하신 것(은혜)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나?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부흥, 교회의 회복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성공, 잘남, 업적(공로)에서 힘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자리(타작마당의 참회의 번제),

거기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은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서두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왕 제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초대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윗 왕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왕의 실력과 능력과 잘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존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무엘하의 비극적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다.

 

 

예배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예배드리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24:25

 

언제나 인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 은혜와 긍휼을 얻는 길은 예배의 자리.

 

통치 말년에 인구조사로 또다시 위기에 처한 다윗

그는 즉시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로 무릎을 꿇는다.

 

다윗에게서 나왔던 (시편의) 기도의 힘들을 생각해 보자.

다윗이 어느 순간에서나, 늘 있어왔던 예배의 자리를 지켰다.

 

그 예배가 이번 인구조사의 위기에서도 다윗을 지켜내었다.

 

앞서 삼하23장에서도 보면

다윗이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할 때 3명의 용사가 물을 떠온다.

그때 다윗이 이 물을 보면서 이물은 물이 아니라, 피다 그러면서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 바친다.

 

무슨 말인가?

그렇게 숨 막히는 전쟁의 자리에서도 예배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배의 자리를 통해서 부하와 다윗이 하나가되는 시간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장소가 어디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장소다.

 

다윗의 부하들은 떠돌이, 방랑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삼상22:2

그들이 다윗과 함께 예배드리면서 하나 둘씩 변화되었다.

나중에는 30인 용사로 다들 성장한 것은

바로 예배의 장소에서, 다윗과 함께, 그들이 자랐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초대교회를 보시라

그들이 교회에 모여서 한 일은 예배드리고, 자기들 끼리 친교 나눈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도하라 했어도

대부분은 아무도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서 전도 못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드린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핍박을 받자 쫓겨났다.

그런데 쫓겨나면 힘을 잃어버려야 할 것 아닌가!

오히려 흩어지면서 사마리아와 근동 지역에 교회를 세워 나갔다.

 

평소에 그들의 예배가 사람을 훈련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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