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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인가? 믿음인가?

LNCK 2019. 12. 25. 15:25

행위인가? 믿음인가?                롬8:1~2            케노시스 영성원 www.kenosis.or.kr 

 

아래 글은 신구약 성경의 중요한 맥을 관통하고 있다.

모세 율법(구약) 예수님의 복음서 바울서신신학적 일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해가 확실히 될 때까지 몇 번이라도 계속 읽어서

다시는 마귀에게 속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신약성경에는 구원의 기준에 대한 두 흐름이 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과 야고보서의 흐름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의 행위가 구원의 기준이다.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의 흐름이며

여기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과 은혜가 구원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이런 이유로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가/행위로 받는가가 논점이 되고 있다.

 

개신교의 일반적인 추세는 바울서신과 루터의 이신득의이론에 치우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입장이다.

 

 

1. 계약의 조건

 

계약은 당사자에게 계약을 지킬 의무를 부여한다. 요구조건, 준수사항이 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씀의 실천(계약 준수)을 요청받았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계약법이었다.

 

시내 산 계약법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을 세우는 설계도였고

시내 산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의 한 복판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계약법을 실천하여

하나님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 주어야 했다.

시내산 계약법의 핵심은 제사법과 안식법에 들어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지켜야 할 계약법은 복음서에 기록 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특히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의 설교는

계약법을 집약한 것이다.

 

복음서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지금 예수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나라의 윤리인데,

다른 말로 계약 내용, 준수 사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시내 산 계약법(율법)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후에 그 법을 지킬 것을 촉구한 예언자(역사서, 예언서)들의 요구와도 일치한다.

율법의 겉 형식이 아닌 정신(본질)을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새 계약법은 한 마디로 완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완전해져서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즉 너희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

왼쪽을 때리면 오른쪽을 내어주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며,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가주고,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새 계약의 요청은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라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완전(계약조건)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2.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일반적으로 계약실천할 수 있느냐/없느냐?’를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계약에 참여한 사람은 단지 그 계약을 실천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기준은 명확하다.

계약을 실천한 사람은 구원이요,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멸망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우리는 계약을 실천(준수, 이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완전에 이를 수 있을까? - 이것이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어느 계명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거짓말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저는 언제나 그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만일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큰 부자였으므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16~26)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이것이 해답이다. 우리가 그 계약을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되게 하리라, 완전케 하리라!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될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 있는가?

 

이치는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심은

곧 그 일을 되게 하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처갓집 양을 치는 80된 모세에게

이집트의 바로와 맞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심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모세에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다.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의 철옹성 여리고 성으로 가라고 하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군사를 앞세우지 않고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것으로 여리고성은 무너졌다.

군사적 대결, 이스라엘 군대의 힘이 결코 아니었다.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차있다.

예수님께서 불치병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다.

 

38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말씀은

내가 너로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하겠다!는 뜻이다.

네가 네 힘으로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뜻이 아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그대로 순종하면 고기가 잡히게 하겠다는 뜻이며 또 그대로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하나님처럼 되어야만 실천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처럼 되어야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네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것들을 네가 할 수 있게 하리라”,

바꾸어 말하면 너를 통하여 내가 그 일을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라는 말씀은 곧 하게 하리라”, “되게 하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신다는 것일까?

 

 

4. 성령님을 통해서

 

성령님, 여기에 해답이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분이 우리 마음속에 오시어 머물러 계시면서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가 있다.(도덕적 영역)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처럼 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임했다.

 

모세, 다윗, 예언자 등과 같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은 믿는 자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구약은 간헐적, 신약은 지속적)

예수님의 생애, 즉 인간되심과 공생애, 죽으심과 부활, 승천은

인간에게 성령님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보편화가 가능해졌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성령님(보혜사)을 보내리라

누차 하신 말씀은 이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 즉 구원을 받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5. 바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 그는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구원()에 이르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구도자였다.

그는 의에 이르기 위하여 신앙의 전통을 충실히 지켰다.

 

바울이 물려받은 신앙전통은 유대교였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를 경험한 이후에 생겨난 독특한 종교다.

구약성경의 시내산 계약전통에 근거하지만

당시의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변질이 일어났다.

 

유대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희랍문화였다.

희랍의 문화적인 침투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이 말살될 위기에 처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형식들을 강조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식일법, 정결법, 절기법 등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을 규정하는 세부 조항들이 계속 늘어나서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었다.

 

특히 안식일법이 가장 중요시 되었는데, 규정 조항이 234가지나 되었다.

이런 이유로 시내산 율법과 유대교 율법은 많은 차이가 있다.

 

바울이 물려받은 것은 유대교 율법이었다.

그는 율법의 형식적인 조항들을 지키면 의로워진다는 전통에 충실했다.

신앙적인 열심이 남달랐던 바울은

당시 전통에 따라 유대교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지킬수록 갈등이 생겨났다.

 

율법의 형식적인 조항들을 지키면 과연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회의가 깊어져 갔다.

율법의 형식적인 조항은 지킬 수가 있었고 또 지키고 있었지만,

율법이 말하고 있는 정신은 도무지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서5~7장은 바울의 이런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내면에서 두 법을 발견했다.

율법의 정신을 지키기를 원하는 마음의 법

도무지 그것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법이 그것들이다.

 

바울은 이 갈등 때문에 좌절하고 고민했다. 이때의 심정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하고 있다.(로마서7:25)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지킬 수가 없고,

율법의 요청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괴롭혔다.

율법의 요청들은 결국 자신의 죄를 정죄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대교의 형식을 지켜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내용과 정신을 실천하지 못하면서

그 형식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대교의 테두리 내에서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해결이 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키지 못하던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었다.

로마서 8장에서의 고백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눈을 다시 떴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비늘은 유대교의 한계, 율법의 한계, 옛 계약의 한계를 말한다.

눈에서 이 한계(비늘)가 벗겨지자

그는 아직 보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

 

눈을 다시 뜬 바울은 무엇을 보았는가?

성령님의 법이것을 보았다.

바울이 새롭게 눈을 뜬 것은 성령님의 법이었다.

 

바울이 발견한 성령님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었던

율법의 정신을 지키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런 법은 유대교 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울은 성령님의 법을 발견하고 나서야 신앙적인 갈등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때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8:1~2)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법은 실천의 법이다.

육체의 힘, 즉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시는 법이다.

바울 서신에서 복음’, ‘은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실천하게 하시는 성령의 법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형식화 된 유대교 율법의 조항을 겉 형식으로 지키는 행위를 말한다.

유대교의 형식적인 조항들을 지키는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율법의 정신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율법의 정신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천을 배제하는 믿음,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실천을 강조하는 바울식의 표현이다.

 

바울 서신은 교회의 현장에서 쓰여 졌다.

바울이 세운 교회에 아직 유대교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적 신자들이

유대교 율법의 형식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찾아다니면서 가르쳤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이 성령님의 법을 훼손한다며

유대교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은혜(성령의 법)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갈라디아서의 내용.

 

바울이 율법(행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은혜(믿음)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력(自力)이 아닌 타력(他力)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과 같다.

 

율법의 조항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지적해서 깨달아 알게 하며

또 지키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며 정죄할 뿐이다.

성령님의 도우심(타력, 은혜, 믿음)이 없이는

율법의 요청을 아무리해도 자기 힘(자력)으로는 지킬 수 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죄를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하도록 도우시고 실천하지 못한 부분들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위로와 도우심을 주셔서 실천하게 하신다.

도우심과 용서하심의 성령님께서 하시는 주요 역할이다.

(그러나 율법은 요청과 정죄가 있을 뿐이다.)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내주(內住)하시면서

율법의 요청을 용서하심과 도우심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신다.

성령님(은혜, 믿음)은 율법의 요청을 완성시키는 것이지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생명의 성령의 율법이다. 율법은 율법인데, 생명과 성령의 율법이다.

율법과 완전히 분리된, 본질이 완전히 다른 성령이 아니시다. 8:2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울 서신과 다를 리가 없다.

이 둘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거나,

신약성서에는 다양한 구원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같은 것을 다른 각도, 다른 상황에서 말했을 뿐이다.

 

믿음(은혜)과 행위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느냐 행위로 받느냐?” 라고 묻는 것은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잘못 된 물음은 잘못된 대답을 유도하며 혼란에 빠뜨린다.

 

4천년 역사가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거룩함과 속됨, 정신과 육체, 예배와 삶, 의인과 죄인,

믿음과 행위, 복음과 율법, 구약과 신약 등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늘 오류를 범하게 했으며

그 시대를 불행하게 했다는 점이다.

 

세속적인 자연문화를 대변하는 헬레니즘은 이원론적인 사고요

계시를 말하는 시내산 계약에 근거하는 헤브라이즘은 일원론적인 사고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도 아니요 행위로 받는 것도 아니다.

믿음에서 비롯되는 행위, 행위가 동반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성령님의 법은 이 둘을 하나가 되게 하는 법이다.

행위와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