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j0ONVuMkw8o
www.youtube.com/watch?v=QshoDtl-mUU
◈성령의 임하심 P1, P2 행2:3, 엡5:18 도서번역, 참조해서 정리
<Rodman Williams, Renewal Theology 中 성령론 (원본을 참조해서 정리)
최초 02.01.14. 재발행 06.06.03.
성령님의 임하심은 사도행전에 5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
①임하심 coming on,
②내려오심 falling on,
③부어주심 pouring out,
④성령세례주심 baptism of the Holy Spirit
⑤성령충만받음 fullness of the Holy Spirit
이 5가지 표현은 본질상 성령님이 임(재)하셨다는데서 같다.
그러나 표현이 각각 다른 것은 각각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 가지씩 살펴보자.
▶오순절 이전 성령과 이후 성령의 차이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하신 역사는 얼마든지 나온다.
구약의 사사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대적을 무찔렀으며(기드온, 삼손 등),
다윗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면서 영감으로 많은 시편을 썼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요 20:22),
또한 승천하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행 1:2).
행 2장 오순절이 되기 전에도 분명히 성령의 임하심이 있었다.
그런데 왜 행 2장 오순절 사건을 ‘성령의 임하심’ 사건으로 특별 취급하는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일시적 임하심temporary’과 ‘계속 머무르심remain’의 차이다.
오순절 이전의 성령님의 임하심은 언제나 '일시적'이었다.
'간헐적'이란 말도 되겠다.
다윗에게 임하신 성령도 다윗 사후에는 사라지셨다.
그러나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그 뒤로 사도행전 끝장까지 계속 머무셨고
떠나지 않으셨다. 아니, 지금까지 2천년동안 계속 머물고 계시며
앞으로 재림의 날까지 우리와 함께 머무르실 것이다.
요단강 수세 후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오셔서 머물러 계셨다.
(remain. 요 1:32-33).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실 것을 암시한 것이다.
◑1. ‘성령의 임하심’ coming on (*에프에르코마이, 에피 upon + 에르코마이 come)
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이 표현은 성령의 임재에 관한 5표현 중 문학적으로 가장 쉽고 단조로운
표현이다. 다른 말로 ‘오신다’이다.
성령의 임하심=내려오심=부어짐=성령세례=성령충만이다.
<비가 온다=비가 떨어진다=비가 쏟아진다=비속에 잠기다=사방에 비 천지>와
같다. 표현이 각각 다르더라도 본질은 한 개로 동일하다.
②“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있더니” *카씨죠 set + 에피 upon
(행 2:3) 여기서 ‘임하다’는 말은 rest on인데, ‘오셔서 머물러 계신다’는 뜻이다.
③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행 19:6). *에르코마이 come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안디옥에 임하신 성령님은
아직 에베소에는 임하지 않으셨다.
그날 에베소에서 성령 받은 12명은 제자들이었다(행 19:1).
‘제자’라는 표현은 그들이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행 19:2).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령이 임하지 않은 성도들이 꽤 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했지만(고전 12:3),
오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머물러 계시는 오순절 성령은 아직 받지 못했다고 본다.
(일부 신자는, 중생과 회심이 불분명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외 받아도 모르는 사람도 있겠죠)
▶성령이 임하시면 - 머무르신다
①성령님이 한 번 임하시면 (=성령세례=성령충만)
그것은 오셔서 계속 머무르신다는 뜻이다.
오늘 오셨다가 내일 떠나시는 손님이 아니시다. (식을 수는 있겠죠)
특별히 성령님을 소멸시키거나,
아니면 계속적인 불순종으로 촛대가 옮겨지거나 (에베소 교회에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경고는 가급적 옮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니면 성령님이 아예 그의 육신을 멸하시고 떠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장막을 걷지 않으신다.
바울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바울의 끝 날까지 함께 했으며,
베드로와 스데반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한 번 임하신 성령님은 웬만하면 그 사람을, 그 교회(community)를
떠나지 않으신다. 할렐루야!
②그 이유는 <성령님이 주도하시기 때문>이다.
개인과 교회가 앞서 성령님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교회는 성령님께 붙잡히고,
성령님이 그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에 의해 소유possession되어진다.
내가 성령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소유하시는 것이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성령님이 소유해서 이끌어 가신다.
③비슷한 표현으로 “성령으로 옷 입히운다”가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 be clothed 까지 이 성에 유하라”(행 24:49).
옷을 입 히운다는 표현은 그것이 쉽게 떠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지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성령님의 주도성
성경에 성령님이 임하시는 5가지의 표현들은 대개 주어가 성령님이다.
“내가 성령을 받았다”보다는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2:4 이렇게 한글성경은 능동태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원문이나 영어성경은 모두 수동태이다. 수동태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또는 성령의 충만이 되어졌다 be filled”.
요지는, 사람이 주어가 아니라 성령이 주어요, 주체라는 뜻이다.
즉 성령님은 주도적으로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성령님이 오시라고 부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과 관련된 언어적 표현도 주의를 요한다
“나는 성령 충만을 받았다!”,
“내가 성령충만 받도록 기도해 줄께!”는 표현은 (약간은 의미가 있지만 대체로) 부적절하다.
대신에 “성령님이 내게 충만히 임하셨어!”,
“성령의 기름이 네게 충만히 부어지시도록 기도할께!” 등
주어가 항상 성령님이 되어야 한다.
◑2. 성령의 내려오심
‘내려오심’falling on은 헬라어로 epipipto인데, epi(upon)+pipto(fall)이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내려오심’falling on
falling on은 ‘내려오심’, ‘떨어지심’ 등으로 번역가능하나,
개역성경은 행 10:44에 ‘내려오심’으로,
행 11:15에는 ‘임하심’으로 번역했다. 그 원래 뜻은 모두 falling on이다.
①베드로가 설교할 때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내려오시니>”
(행 10:44)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falling on>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성령님이 임하셨다’coming on라고 해도 되는데,
특별히 <내려오셨다falling on>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갑자기, 예상치 못했다는 점 에 있다-suddenness.
성령님이 오실 줄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설교 도중 급작스럽게 임재가 나타났다.
falling on은 문자적으로 ‘떨어지다’인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듯
예전의 분위기를 깨고서 갑자기 성령님이 확 떨어지신 것이다.
본문 정황은 모두 대상이 이방인이다. 가이사랴와 사마리아는 모두 이방 땅이다.
사도들은 그 때 까지만 해도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은 듯 하다. 註1)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있다. 설교 도중에 예기치 못하게 장내가 숙연해지고
설교자의 마음에서부터 강한 감동이 일어나고
그것은 이내 온 청중에게 전달된다.
예배 실 뒤쪽에서 딴 짓하던 사람들도 자세를 가다듬고 설교에 귀를 기울인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설교는 한 동안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며,
뜨거운 기도가 나오게 만든다.
능력 있는 설교집이나 신앙서적을 읽을 때도 그렇다.
사람들은 안일하게 누워서 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러다가 중간에 책을 덮고는 연이어서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한다.
방송으로 설교를 들을 때도 그렇다. 한가하고 흐트러지게 설교를 듣다가도
갑자기 “아멘”이 나오고, 정신을 번쩍 일깨우는 설교들이 있다.
이렇게 설교 중에 성령님이 급작스럽게 임하시는 역사falling on가
강단에 계속되게 하옵소서!
②사도들이 안수할 때 (사마리아에서)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리신 falling upon>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6-17)
이런 전통으로, 오순절 교회도 비교적 안수를 자주 하는 편이다.
이유는 안수할 때 특히 성령님이 잘 임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안수하는 교역자는, 안수 전에 깊은 기도로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성도에게 안수하는 것은 분명 능력이 있다.
일년 내내 안수가 전혀 없는 예배는 너무 말씀에 치우친 결과이다.
저녁 예배 시간에는 안수받기 원하는 성도들을 강단 앞으로 초청해서
교역자들이 안수기도 해 주는 시간은 참 은혜스럽다.
외국에서는 장로나 집사도 나와서 등이나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이 안수해 준다.
어떤 안수자들은 안수할 때 떠오르는 예언,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해 주기도 한다. 이때 초신자들이 특히 은혜를 잘 받는다.
그러나 안수를 자주하면 교역자의 권위가 지나치게 높아짐으로써
성도와의 괴리감이 생길 수 있다.
◑3. 성령의 부어주심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부어주심의 예와 의미
① 풍성하다는 뜻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3, pour out)
성령이 ‘임하신다’는 표현 대신 특별히 ‘부어주신다’라고 표현한 것은
“풍성하다” abundant는 뜻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되 한량없이 풍성하게 주신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요 3:34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이런 풍성한 역사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고 나신 이후에야
비로소 성령이 ‘풍성하게’ 그리고 ‘계속’ 부어지실 수 있었다.
성육신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단회적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부어지는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사마리아, 가이사랴,
안디옥, 에베소.... 계속 일어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② 말세에 부어주심 -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지금이 말세라는 시각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성령은 모든 육체all flesh에 부어주신다.
오순절 교단이라고 성령을 특별히 많이 받는 것 아니며,
한국 교회라고 특별 대접받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연령 차이도 없다.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어린 자녀, 젊은이, 노인에 구분 없이 모두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사도들은, 나중에 이방인들도 자기들과 똑같은 성령 받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행 10:45). 그러면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요엘의 예언을 다시 한 번 상기했을 것이다.
여기서 ‘말세에’ 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이 부어지는 때가 바로 말세라는 것이다.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행 2:17-18).
연이은 행 2:19-20절엔 ‘세상 종말’이 나온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영화로운 날(재림)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결국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 다음에는 세상 종말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예언이다. (지금이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뜻)
♣이른 비와 늦은 비說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명기 11:13-14)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방언 운동이 일어나면서 오순절 운동이 부흥하게 되자
사람들은 이제 비로소 말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엘이 예언한 ‘이른 비와 늦은 비’(요엘 2:23)를 기억했다.
이스라엘의 파종기와 수확기는 우리와는 정반대였다.
이른비는 10월부터 파종직전인 12월말까지 내렸다.
이 비는 땅을 부드럽게 했다.
늦은비는 3월부터 수확직전인 4월에 걸쳐 내렸다.
이 비는 곡식을 익게 했다. 그 중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미국 오순절주의자들은, ‘이른 비’는 2천년 전 행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이요,
‘늦은 비’는 ‘20세기에 미국에 나타난 성령운동’으로 해석했다. 그 사이에는
은사중지설의 악영향으로 성령의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욜 2:28,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린 후에)
성령의 더욱 폭발적 역사와 더불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세상 종말이 온다고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욜 2:28-31)는 주장이 유행되었다.
이른바 ‘이른 비와 늦은 비說’이다. 유대인의 농사 풍습에 의하더라도,
이른 비와 늦은 비 후에는 반드시 추수(종말)가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21세기는
이른 비와 늦은 비 이후 시대 (“그 후에”, 욜 2:28)다.
그래서 과거에 2천년 동안 유례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성령의 역사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이후에는 해가 변하고 달이 변하는.... 세상 종말이 온다.
결국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요지는 - ‘늦은 비’ 후에 추수가 온다.
그러니까 20세기 성령운동(늦은 비) 후에 세상 종말이 온다는 경각심을 주는
일종의 i)종말 사상이다. 또한 이것은 ii)영혼추수 사상이다. ‘늦은 비’ 후에
대대적인 추수가 있다는, 이스라엘 농사법에 근거한 전도운동 사상이었다.
성령의 비는 언제나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 내립니다.
③동일한 부어주심 = 동일한 성령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 10:45)
예루살렘에도 성령이 부어졌고, 가이사랴에도 성령이 부어졌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부어진 성령은 특별하고,
가이사랴에 부어진 성령은 차등적인 것이 <아니다>.
똑같은 동사로 ‘부어지다’가 쓰인 것을 볼 때 .. 똑같은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성령을 이방인에게도 주셨다고 증언했다.
the same gift as he gave us(행 11:17).
딛 3:6에,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poured out가 나온다. 이것은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이
사도 바울의 사역에도 똑같이 부어진 것을 증거한다.
원문상 똑같은 동사가 쓰였다.
교부들의 문서에도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렇게 볼 때, 사마리아나 에베소에 임하신 성령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임하신 성령과 동일한 것이다.
더 나아가, 2천년 동안 역사 속에 임하신 성령님은
2천년 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과 동일하며,
그것은 오늘날 한국에 임하시는 성령님과 동일하다.
오순절 성령님이 2천년동안 계속 시대마다 끊임없이 타오르시면서
바통이 이어져 내려오셨다.
/////////////////////////////////////////////// P2 /////////////////////////////////////////////
P1을 잠시 복습하면,
성령이 임하심=성령이 내려오심=성령이 부어지심=성령세례=성령충만은
이 5가지 표현이 넓게 보면 다 같은 뜻인데, 어감이나 그 특징이 약간씩 다릅니다.
예를 들면, 비가 온다=비가 갑자기 떨어진다=비가 쏟아진다=빗속에 잠기다=비가 가득하다 입니다
①임하심 coming on : 성령의 임하심의 가장 일반적인 표현, 행1:8. 2:3, 19:6
‘내려와서 계속 머무신다’는 뜻, 비슷한 표현으로 ‘성령으로 옷 입힌다’ 행24:49
성령이 내려오셔서 나중에 식을 수도 있겠고, 약해지실 수도 있겠죠.
그러나 당장 내려오셨다가, 당장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전거 타기나 수영을 한 번 배우면, 힘이 빠질 때 천천히 탈 수는 있으나, 잊어먹지는 않습니다.
②내려오심 falling on : 성령이 <급작스럽게> 예기치 않게 임하실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한국말로 ‘떨어지심’이라 표현하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행10:44, 11:15 *에피핍토
③부어주심 pouring out : 성령을 <풍성하게> 주실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2:18, 2:33
성령이 임하심=내려오심=부으심=성령세례받음=성령충만받음=성령받음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에서 ‘임하다=성령세례=성령충만’ 으로 표현되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약간씩 표현을 달리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동일한 한 사건을 두고 임하다, 성령세례받다, 성령충만받다 등으로 달리 표현했다.
그것은 세 동사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는 뜻이다.
-내려오심 = 부어주심이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 10:45)
베드로는 행 2장의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성령을
이방인에게도 주셨다고 했다(행 11:17).
이렇게 볼 때 행 10장의 내려오심은 = 성령세례받음 (행2장) 이다.
◑4. 성령세례
20세기에 발생한 오순절 운동 이전에 ‘성령세례’라는 말을 시중에 유행시킨
사람은 챨스 피니(1792-1875)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성령임재
경험을 특별히 ‘성령세례’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의 특별한 의미
성령 받는 것을 특별히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표현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에 푹 잠긴다’ immerse, envelope에 있다.
성령세례는 종종 물세례와 같이 짝으로 묶어져 언급 된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
물세례는 물에 푹 잠기는 것임을 생각할 때,
성령세례는 문자적으로 성령에 푹 잠기는 것이다.
에스겔 47장에 생명수(=성령)의 강이 나오는데, 거기엔 깊이가 각기 다르다.
-발목까지 오는 물,
-무릎까지 차는 물,
-허리까지 차는 물,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다.
성령세례는 성령에 푹 잠기는 것인데, 그것은 창일하여 헤엄할 물을 뜻한다.
구약시대에 에스겔이 그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건너는 물이 아니라, 물이 사람을 제어하는 경지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에 근거해서
예수를 영접한 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거기에도 등급이 있다. 에스겔은 4등급으로 나누었다.
성령세례라는 것은 발목이나 무릎까지가 아니라 전신이 푹 잠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사모하자!
성령세례나 성령충만은 모두 성령에 푹 잠기는 것인데,
특별히 “처음” 경험하는 성령에 푹 잠김을 ‘성령세례 baptism of the Holy Spirit’라 부른다.
예수 처음 믿을 때 물세례를 받듯이
성령의 충만을 처음으로 경험할 때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행1:5, 11:16
베드로가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유숙할 때,
거기에 성령이 임하는 장면을 보고, 베드로는 그것이 ‘성령세례’라고 언급했다. 행11:15~16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성령충만의 체험이었다.
이 성령세례는 세례요한이 이미 예언한 것이고 막1:8
예수님이 이미 약속하신 것이다. 행1:5,
※이해를 돕기 위한 예를 들면,
한국에도 ‘내린 무’가 있고, ‘학습 무’가 있다고 한다. *무巫 : 무당
‘내린 무’는 악령이 임한, 이를 테면 악령세례를 체험한 무당이고,
‘학습 무’는 그저 공부해서 무당이 된 자이다.
사람들은 신통한 ‘내린 무’를 더 찾는다고 한다.
물론 무당은 그저 사업 잘 되고, 건강하고, 결혼 잘 하는 기복적 운세를 점쳐 준다.
그런 무당의 도움을 빌리면 잠시는 잘 될지 모르나, 뒤끝이 항상 불행이고, 영생도 못 얻는다.
쉽게 말하면, 성령세례를 체험한 사람은 ‘내린 영靈’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학습 영靈’이 되는 것이다.
‘내린 무, 내린 영’은 크리스천의 삶과 사역을 성령이 드라이브 해 나가시고 자신은 따라간다.
‘학습 무, 학습 영’은 크리스천의 삶과 사역을 자아가 드라이브 해 나가고 자아로 충만하다.
에스겔 47장으로 말하자면
-창일하여 헤엄칠 물 속에 있는 사람과
-발목이나 허리까지 차는 물 속에 있는 사람의 차이이다.
또 다른 예로 비교하면
성령세례,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은 포크레인으로 공사를 한다면, 즉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고,
그것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저 맨손이나 삽을 들고 공사를 하는 사람에 비유된다. 성령의 은사가 거의 없다.
◑5. 성령충만
‘성령충만 받는다’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는 표현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오순절 사건 이후 12회 나옴.
행2:2~4, 9:17, 13:9 등
성령세례가 "처음" 체험하는 성령의 충만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후 계속적으로" 가득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일례로, 행9:17절에서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을 때 성령충만을 체험한 사도바울은
행13:9절에서 다시 또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13:9
성령세례를 한 번 받지만, 그 후 계속 재충만을 받는 것이다.
엡5:18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는데,
그 시제가 현재 또는 현재진행이다. *헬라어는 현재나 현재진행이 동일 시제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계속적으로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핸드폰을 계속 충전하듯이, 자동차에 연료를 계속 가득 채우듯이
한 번 충만히 받은 성령세례를, 그 후 계속 충만히 유지하는 것이 성령충만인 것이다.
둘 다 같은 것이지만, 굳이 구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원어적으로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푹 잠궈진다는 뜻이고, immersed in the HS
‘성령충만’이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뜻이다. be filled with the HS
행2장에서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지만,
행4:31에서 제자들은 기도할 때 다시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베드로 역시 행4:8에서 다시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성령충만=찬송충만=기도충만=감사충만이다.
엡5:18~21절은 한 문장이다. 본동사는 ‘성령충만 받으라’이고,
나머지는 분사인데, 그 분사들은 ‘화답하며(말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복종하며’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충만=말씀충만=찬송충만=감사충만=순종충만 이다.
이런 식으로 볼 때, 과거에 부흥사들이 가르친 바
‘성령충만=기도충만=전도충만=사랑충만=봉사충만=기쁨충만’ 도 맞는 말이다.
▶집사, 사도, 즉 교회 지도자들을 뽑는 조건은 성령충만이었다.
행6:3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행6:5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 택하여 세우니”
행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행 11:24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더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집사,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충만을 받았다.
또한 계속 재충만 받았다. 베드로, 바울, 스데반, 바나바, 빌립 등.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받고 계속적으로 재충만 받는 사람들을 택하여 세우신다.
▶프로패셔널과 아마추어의 차이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 경기를 보면, 매 경기마다 매번 잘 하는 선수가 있고,
어쩌다가 한 번 잘 하는 선수가 있다.
매번 축구경기마다 골을 넣든지 어시스트를 해서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선수가 있고
매번 야구경기마다 안타나 홈런을 치는 선수가 있고,
그렇지 못하고 기량이 들쭉 날쭉한 선수가 있다.
어떤 날은 잘 하는데, 나머지 대부분 날은 죽을 쑨다.
프로패셔널이나 일류 선수는, 늘 자기 컨디션을 잘 관리한다.
즉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성령충만한 상태를 늘 유지하는 것이다. 늘 스스로를 관리한다.
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기타를 치며 찬송을 부르며..
또는 나가서 전도를 하거나 병원 심방을 하면서... 성령충만한 컨디션을 자기가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사역자가 프로패셔널한 일류 사역자이다.
항상 고른 기량을 나타내 보이고 실력이 들쭉 날쭉 하지 않는다.
▶너무 다양해서 모른다
중생을 = 극단적 회심이라 가정할 때,
간혹 극단적 회심을 체험하지 못했지만 중생한 사람들도 있다.
성령세례도 비슷하게 마찬가지라고 본다.
성령세례, 성령의 임하심, 성령충만의 형태나 모양이 너무나 천차만별로 다양하기 때문에
‘꼭 방언이다’, ‘꼭 무슨 은사다’ 이렇게 단정지어 규정하기 어렵다.
괜히 어떤 사람을 보고 ‘당신은 회심하지 못했다’고 말해서 기분 나쁘게 할 필요 없듯이
(*하나님만 아신다)
괜히 어떤 사람을 보고 ‘당신은 성령세례 받지 못했다’고 말해서
굳이 그를 기분 나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대충 알지만 정확하게는 하나님만 아신다. 성령충만의 양상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령론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론은 좀 성경적 기반이 약하더라도, 실제로 성령충만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령론에 대해 해박한 성경적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성령충만하게 살지 못한다면
그건 성령론에 대해 좀 무식하지만, 성령충만하게 사는 할머니 권사님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론에 관한 많은 신학적 충돌이 일어남을 볼 수 있는데,
너무 지식적으로 논쟁하거나 따질 필요는 없다.
지식이 좀 모자라도, 내가 성령충만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
♣우스갯소리로, 성령충만한 사람과 차력사(借力:힘을 차용하다, 빌리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앞서 말했지만, ‘성령충만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말 번역은
능동태가 되는데 이 때 주체는 인간이 된다.
그것은 인간이 받고 싶으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원어적인 성령충만은 항상 수동태be filled로 나온다.
성령세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주어와 주체가 항상 성령님이요, 하나님이란 뜻이다.
사람은 거저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을 뿐이다.
능력의 주체는 항상 하나님께 있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감춘다.
그리고 사역의 목적이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전도’에 있다.
표적을 드러내 보이는데 있지 않다는 뜻!
이에 반해, 차력사는 능력을 빌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표적과 자기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특별한, 보통 사람과 차별성이 있는 능력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성령충만을 사모하다가 차력사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되, 신기한 능력을 사모하는 차력사 되기를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과거에 기도원에 이런 ‘차력사 지망생’들이 들끓었다.
요즘은 자연 소멸된 것 같다.
표적은 거저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동반된다.
그러나 모든 케이스에 100% 확실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충만 하지만, 외적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 말은 성령충만한 표적을 무시하는 뜻이 결코 아님)
▶성령충만 :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에 ‘성령충만’이란 말은 직접적으로 없지만,
이 말씀이 행 2장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때, ‘성령충만’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다=내려오다=기름부음받다=성령충만받다 라고 볼 때도 그렇다.
복음을 증거하고, 실제로 전도를 하는 일은,
언제나 시작하기는 싫지만 후에는 항상 기쁨이 따른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일 1:3-4).
행 1:8은 ‘동시 개념’으로 본다(다 아는 사실이지만).
유대와 땅 끝에서 <동시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
혹자는 교회에서 해외 선교만 하고, 동네 전도는 안 하느냐고 질문한다.
혹자는 국내 전도는 하는데, 해외 선교는 아예 안 한다.
국내 전도도 잘 감당하기 힘든데 어떻게 외국까지 하겠느냐는 논리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동시에’ 전도하게 된다. 성령충만은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이지,
차력사가 되라고 주시지는 않는다♥
◑영성의 유전
'저주의 유전'generation curse (원죄가 유전되듯, 죄도 유전되는 면 있다)
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성도 유전되는 면도 있다고 본다.
▶엘리야의 영성이 엘리사에게로 유전됨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적은 참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
똑같이 불임 여자에게 기도해서 아들을 얻게 했고,
똑같이 그 아들이 죽자 살려주었고,
똑같이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는 등....
처음에는 성경의 저자가 무슨 옛날 설화를 토대로 두 번 반복해서
적었나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 이것은 영성의 유전이다.
엘리야의 영성이 엘리사에게 유전되었으므로 엘리사는 엘리야와
빼닮은 사역을 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왕하 2:15)
▶갑절의 영감을 구한 엘리사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 2:9)
이것은 영감을 두 배로 달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장자권(=상속권)을 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장자가 다른 아들보다 상속의 2배를 얻는 권리가 있었다(신 21:17).
엘리사는 엘리사의 영적 상속자요, 승계자요, 장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신상의 조상들의 영적 장자권을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황권 승계 같은 ‘직분의 상속’이 아니라, ‘영권의 상속’을 뜻한다.
▶본케의 상속
라인하르트 본케는 아프리카 대륙을 전도하는데 소명 받은 독일의 전도자이다.
그는 평소에 영국의 성령운동 부흥사 ‘죠지 제프리즈’를 통해 은혜를 받았었다.
그는 죠지 제프리즈 같은 부흥사가 되기를 평소에 간절히 원하고 기도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본케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볼 일 보러 갔다.
마침 여분의 시간이 좀 생겨서 런던 시내를 이리 저리 걸으며 산책했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죠지 제프리즈’라는 문패가 쓰여진 집을 발견했다.
본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벨을 누르니까 노부인이 나왔다;
"이 집이.... 맞습니까?"
청년 본케는 당시 72세의 연로한 부흥사 죠지 제프리즈를
그렇게 우연히 그의 집 거실에서 만났다;
"무엇을 원하는가, 젊은이?"
본케는 평소에 자기의 소원을 거기서 말했다.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그 때 죠지 제프리즈는 청년 본케에게 안수했다.
후에 본케는 이렇게 그 경험을 간증했다.
“아론의 기름같이 머리에서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시 133:2)
그 일이 일어난 지 불과 4주 후에 죠지 제프리즈 소천 했다.
불과 4주전에, 청년 본케의 소원이 너무도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죠지 제프리즈의 소원이 더욱 컸다고 본다.
이렇게 죠지 제프리즈이 영성이 라인하르트 본케에게 임해서
<안수를 통해> 그는 훌륭한 사도가 되었다.
<「타오르는 전도의 열정」中 에서
▶엘리야의 영성이 세례 요한에게로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엘리야'선지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비전이었다.
그것은 천사의 예언 때문이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 때에 수 백 년에 걸쳐 예언된 엘리야를
기다려왔다(말 4:5).
세례 요한은 실제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고 엘리야 흉내를 냈다.
아니, 천사의 예언대로, 엘리야의 귀한 사명을 감당했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6백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엘리야의 영성이 세례 요한에게 승계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그 영성이 내게도 임할 수 있다고 본다.
사모하는 자에게...
옛날 선지자들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영성을 오늘날 내게도 주실 것이다.
믿고 구하는 자에게...
그러므로 역할 모델을 잘 정하시기 바란다.
교회사를 살펴보더라도
칼빈, 마르틴 루터, 요한 웨슬레, 죠지 뮬러, 찰스 피니, 디 엘 무디,
허드슨 테일러 등
한국에도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등 수많은 영적 거장과 선배들이 있다.
이들의 영성과 영적 유산을 물려받기를 사모함이 필요하다.
성령의 불길이 식으면,
그들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을 열정도 따라서 식는다.♥
.............................
◑영성의 유전
'저주의 유전'generation curse (원죄가 유전되듯, 죄도 유전되는 면 있다)
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성도 유전되는 면도 있다고 본다.
▶엘리야의 영성이 엘리사에게로 유전됨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적은 참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
똑같이 불임 여자에게 기도해서 아들을 얻게 했고,
똑같이 그 아들이 죽자 살려주었고,
똑같이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는 등....
처음에는 성경의 저자가 무슨 옛날 설화를 토대로 두 번 반복해서
적었나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 이것은 영성의 유전이다.
엘리야의 영성이 엘리사에게 유전되었으므로 엘리사는 엘리야와
빼닮은 사역을 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왕하 2:15)
▶갑절의 영감을 구한 엘리사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 2:9)
이것은 영감을 두 배로 달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장자권(=상속권)을 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장자가 다른 아들보다 상속의 2배를 얻는 권리가 있었다(신 21:17).
엘리사는 엘리사의 영적 상속자요, 승계자요, 장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신상의 조상들의 영적 장자권을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황권 승계 같은 ‘직분의 상속’이 아니라, ‘영권의 상속’을 뜻한다.
▶본케의 상속
라인하르트 본케는 아프리카 대륙을 전도하는데 소명 받은 독일의 전도자이다.
그는 평소에 영국의 성령운동 부흥사 ‘죠지 제프리즈’를 통해 은혜를 받았었다.
그는 죠지 제프리즈 같은 부흥사가 되기를 평소에 간절히 원하고 기도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본케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볼 일 보러 갔다.
마침 여분의 시간이 좀 생겨서 런던 시내를 이리 저리 걸으며 산책했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죠지 제프리즈’라는 문패가 쓰여진 집을 발견했다.
본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벨을 누르니까 노부인이 나왔다;
"이 집이.... 맞습니까?"
청년 본케는 당시 72세의 연로한 부흥사 죠지 제프리즈를
그렇게 우연히 그의 집 거실에서 만났다;
"무엇을 원하는가, 젊은이?"
본케는 평소에 자기의 소원을 거기서 말했다.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그 때 죠지 제프리즈는 청년 본케에게 안수했다.
후에 본케는 이렇게 그 경험을 간증했다.
“아론의 기름같이 머리에서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시 133:2)
그 일이 일어난 지 불과 4주 후에 죠지 제프리즈 소천 했다.
불과 4주전에, 청년 본케의 소원이 너무도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죠지 제프리즈의 소원이 더욱 컸다고 본다.
이렇게 죠지 제프리즈이 영성이 라인하르트 본케에게 임해서
<안수를 통해> 그는 훌륭한 사도가 되었다.
<「타오르는 전도의 열정」中 에서
▶엘리야의 영성이 세례 요한에게로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엘리야'선지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비전이었다.
그것은 천사의 예언 때문이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 때에 수 백 년에 걸쳐 예언된 엘리야를
기다려왔다(말 4:5).
세례 요한은 실제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고 엘리야 흉내를
냈다. 아니, 천사의 예언대로, 엘리야의 귀한 사명을 감당했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6백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엘리야의 영성이 세례 요한에게 승계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그 영성이 내게도 임할 수 있다고 본다.
사모하는 자에게...
옛날 선지자들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영성을 오늘날 내게도 주실 것이다.
믿고 구하는 자에게...
그러므로 역할 모델을 잘 정하시기 바란다.
▶교회사를 살펴보더라도
칼빈, 말틴 루터, 요한 웨슬레, 죠지 뮬러, 찰스 피니, 디 엘 무디,
허드슨 테일러 등
한국에도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등 수많은 영적 거장과 선배들이 있다.
이들의 영성과 영적 유산을 물려받기를 사모함이 필요하다.
성령의 불길이 식으면,
그들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을 열정도 따라서 식는다.♥
.................
註1)
▶아그네스 오스만의 성령체험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은 1901.1.1. 연초에 미국 켄사스주 토피카에서
시작되었다. 찰스 파함 목사는 창고를 개조한 사설 벧엘 신학교에서
약 40명의 촌뜨기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 학생 중 한 명인 아그네스 오스만은 파함 목사가 안수할 때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고넬료의 집에서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부어주신 것과 <똑같은>
(방언을 뜻함) 성령님이 임하신 것에 대해 적지 않게 놀랐다(행 11:15).
‘아니 천대받는 이방인들에게도.....’
위의 벧엘 신학교의 파함 목사, 아그네스 오스만 등은 시골뜨기였고,
그리고 연이어 1906년 LA의 아주사 거리의 오순절 부흥을 이룬
윌리엄 세이모어 목사는 더욱이 흑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흑인은 법적으로 공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세이모어는 교실 바깥에서 창문 너머로 공부해야했던
처절한 흑인 신세였다.
사마리아에 성령님이 떨어지신 것도 마찬가지다(행 8:16-17).
사마리아같은 천대받는 곳, 전혀 예기치 못한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은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떨어지시는 것falling on은 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권’이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책임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님) ‘개천’에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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