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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LNCK 2019. 12. 27. 14:20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출3:1~12

 

01.01.06. 류영모 목사

 

지도자인가, 지배자인가?

지도자하면 흔히 남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사람을 연상케 된다.

그러나 지도자와 지배자는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은 지배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

 

지배자는 군림하는 사람이지만, 지도자는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배자는 많으나 지도자가 많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이며,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다.

 

부러움의 대상인가, 존경의 대상인가?

지도자중에는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가 있다.

한국의 많은 기업가들 역시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존경의 대상이 못 되는 이가 많다.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진정한 존경의 대상이 못 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가치와 가격은 다르다

내 재산이 얼마인가, 지식이 얼마인가, 월급이 얼마인가?

가격은 되지만 가치는 될 수 없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 받는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거기서 쓸모 있는 사람,

꼭 필요한 존재,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집안에 그릇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가치 있는 그릇이 있다.

밥그릇, 국그릇, 된장그릇 등은 작은 그릇이지만 매일 쓰임받는 그릇들이다.

그러나 찬장 높이 올려놓고 이사 갈 때나 한 번 쳐다보는 그릇도 있다.

혹시 비싼 그릇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쓰임 받는 그릇은 아니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다.

사람이란 밥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사는 존재요 가치를 먹고사는 존재다.

사람은 잘 입고 잘 먹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이다.’ 라는

생각을 할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내가 하나님께 지도자로 붙들리고 쓰임 받는다는데 나의 행복이 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쓰신다.

하나님은 지배자를 쓰시지 않는다.

뭔가 많이 가진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지도자가 되기 원하신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서 쓰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건강해도 쓰임 받지만 병들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재산이 많아야 쓰임 받을 것 같지만 없어도 얼마든지 쓰임 받는다.

시간이 많아서, 재주가 많아서 쓰임 받는 것 아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쓰시기 원하신다.

 

과거에 실패해도 괜찮다. 지난 한 해 동안 큰일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과 경륜이 있다.

지금까지 내 모습에 큰 업적이 없어도 괜찮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쓰시기 원하신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부름이요 소명이다.

 

내가 누구관데....” 고백의 의미

모세는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인도해 내리이까?” 하소연한다.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고백이다.

제가 한 때 백성을 인도해 내려고 나섰지만 결국 살인자라는 오명만 남기고

말았습니다.’는 말이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는 패배자입니다는 고백이다.

 

나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

처가살이로 연명하는 사람, 이미 이방과 세상에 오염된 사람입니다는 뜻이다.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재산도 없다는 고백이다.

양이나 치면서 큰 꿈을 버린지 오랜 사람입니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누구관데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늦었습니다!’는 고백이 담겨있다.

이제 내 아이 80, 하나님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이 늙은이가 누구관데? 이것은 지나친 겸손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못 마땅 것은 고사하고,

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도 쓸모없이 보인다.

지도자가 될 만큼 잘난 구석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런 모세의 모습이 바로 내 우리 자신의 모습인데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지도자로 불러 쓰시기 원하신다.

 

호렙산 중턱 떨기나무 불꽃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모세를 태우는 불이었다. 어제까지의 실패를 태우는 불이었다.

못난 과거를 태우는 불이었다.

모세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을 태우는 불길이었다.

 

나는 이제 자신감이 없습니다는 절망을 태우는 불길이었다.

믿음을 일으키는 불길이었다.

꺼졌던 소명감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불길이었다.

우리의 과거의 좌절과 낙담도 오직 성령의 불길에 의해서만 소멸되어진다.

 

임재를 경험하면 과거를 해석하는 눈이 달라진다.

모세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나온 과거와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졌다.

그전에는 자신은 거저 비극적인 운명의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피압박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인가,

갓난아기 때에 어쩌다가 강에 버려졌던가,

어쩌다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모세)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며 자신의 출생을 한없이 한탄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나니, 어릴 적 사연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내가 물에서 건짐 받았듯이, 버림받은 내 백성을 건져내라는 메시지가

자기 삶 속에 들어있었다.

애굽 왕궁에 들어가 공부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훈련이었다.

양을 치는 목자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며 살아왔지만, 그것 모두가 겸손하게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동 속담에 미련한 양을 쳐보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 목자의 생활 속에서도, 미련한 양떼 같은 이스라엘을 인도해내는

지도자 수련을 쌓았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부름을 받은 사람은,

지나온 과거를 보고 해석하는 눈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떨기나무 체험의 의미

모세가 부름 받은 자리는 황량한 광야요, 초라한 떨기나무 앞이었다.

아더 핑크는 이 떨기나무는 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 이었다!”고 말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보잘 것 없는 그 흔한 떨기나무! 모세는

자신이 그 떨기나무 한 그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그 열정으로 민족을 구원해 보려 했지만,

불과 한 시간 만에 그 불은 꺼져 버리고 말았다.

하루를 채 사르지 못하고 재만 남겼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나는 많이 배웠잖아, 이만하면 나는 중산층 이상은 돼.

이 정도면 지금까지 신실하게 살아온 결과야,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며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면 비로소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고백한다.

 

그러나 떨기나무 불꽃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리라는 담대한 고백으로 바뀌게 된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시작되어진다.

임재를 경험할 때 영광스러운 도구로 쓰임받는 지도자로 변화되는데,

그 임재의 경험은 예배시간을 통해 -설교, 찬송, 기도- 가장 잘 얻어진다.

 

33장에는 모세가 소천을 앞두고 백성들을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내 백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16).

 

모세는,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지도자들이 되고

복을 받고 잘 될 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백성들은 떨기나무 체험이 있으면 잘된다는 것이다.

 

신을 벗는 의미

이것은 역설paradox이다.

모세가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신을 신고 열심히 쫓아다녀야 되는데,

도리어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신을 신는다는 것은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요,

신을 벗는다는 것은 활동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력서는 밟을 리() 신발바닥 력(), 신발이 걸어온 경로라는 뜻이다.

이것은 땅의 이력서를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네가 이제껏 자랑하고 왔던 인생의 이력서를 지워버리라는 뜻이다.

 

세상 이력서를 내려놓고 천국 이력서를 쓰기 시작해야 지도자로 쓰임 받는다.

천국은 땅의 이력서로 가는 곳이 아니므로,

내 잘난 이력서를 지워버릴 때 비로소 천국의 이력서가 써진다.

 

교회는 신발을 벗는 곳이며, 세상 신발 벗는 자가 교회의 지도자이다.

신발을 벗지 않으면 현관에서 서성일 뿐,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이렇게 신발을 벗는 것은 세상 자랑 업적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의 족적까지 모두 벗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끝까지 거절하면 다리를 꺾어서라도, 손을 묶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도자로 세우신다.

하나님의 종들의 실력은 학위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신다.

 

장로의 사명

흔히들 장로의 사명은 목사를 잘 도와서 교회 일을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로가 없는 교회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잘 유지된다.

장로에게 목사를 돕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은혜 받는 일이다.

 

장로가 목사의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면,

그 교회는 원활한 목회가 되지 않는다.

장로가 은혜 받지 않고 교회 일만 하려드니까 교회에 마찰이 일어난다.

순종하는 일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 일부터 먼저 배우려 나서니까

교회가 어지러워진다. 그러므로 장로의 사명은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풍성한 은혜를 받는 일이다.

 

금년 한 해의 목표

다른 직분자도 마찬가지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의 성공자가 되는 길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성공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오늘의 삶은 진정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내 삶을 붙잡으실 때(임재)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난다.

꺼진 불같은 인생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길이 타오른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절망한 사람이 있는가?

혹시 넘어진 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하고 좌절하는 분이 있는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으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바로 <지도자>.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 결단하고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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