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고통에 대한 탐구 전7:14 설교 여러편 취합
▲질문: 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 이 찾아오는가?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유난히 아끼셨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긴 적이 있었다. 요 11:2
예수님도 본래부터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요 11:5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인생과 신앙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성도였고 (또는 그 성도의 가족이었고)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신앙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어떻게 불신자 가정에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없는 시간 쪼개서 주님을 잘 섬기고, 없는 물질 쪼개서 헌금 드리는
성도의 가정에서 일어나는가?
이 문제, 곧 '성도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최근 설교 약 10편을 모아보았습니다.)
참고로, '(남이 모르는 숨겨진) 죄의 형벌이다'라는 관점은 뺏음.
여기는, '예수님을 잘 섬기는 충성스러운 성도'의 고난 문제를 다루고 있음.
1. 신앙의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2. 예수님은 결코 방관하지 않으신다
3. 자녀이므로 연단받는다
4.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
5. 희생(십자가)의 방식으로 일하신다(1)
6. 희생(십자가)의 방식으로 일하신다(2) http://blog.daum.net/rfcdrfcd/8088611
7.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된다 http://blog.daum.net/rfcdrfcd/8076759
8. 고난 중에 열매 맺는 신앙이 된다 http://blog.daum.net/rfcdrfcd/8048395
9. 주님의 사전에 실패란 없다 http://blog.daum.net/rfcdrfcd/7957673
10. 그래도 (성도의 고난의) 깊은 뜻은 측량할 수 없다.
◑1. 신앙의 긴장을 늦추지 말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형통이란 - 시집장가 잘 가고, 학벌 좋고, 무슨 일을 손대도 잘 풀린다.
곤고란 - 무슨 일을 손대도 안 풀린다. 머피의 법칙처럼!
내가 대쉬dash하는 여자들은, 항상 딴 남자를 쳐다보고 있고
내가 피하는 자매들이, 항상 내 뒤를 좇아올 때... 이것도 곤고이다.
왜 형통과 곤고를 통해 장래 일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는가? 7:14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앙의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①엘리야는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리를 연출했다. 850:1의 승리!
그런 형통 뒤에, 이세벨이 회개는커녕 도리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곤고가 곧장 찾아온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광야로 피해 도망가서 죽기를 결심한다. 곤고다.
그러나 거기서 푹 쉬면서 회복한 후에, 그는 선지학교를 세운다.
많은 선지자를 배출해 내고,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를 발굴해 낸다.
다시 형통이 찾아온 것이다.
만약 처음 형통 뒤에 곤고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후에 선지학교를 세우거나 엘리사를 발굴하는 일이 없었을 런지도...
그러나 형통과 곤고가 뒤섞이면서,
장래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엘리야가 했던 일은 늘 긴장 하면서 순간순간 주님을 붙드는 삶 이었다.
②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자.
주인이 5, 2, 1 달란트를 각각 남기고 떠났다.
‘이것 갖고 장사해라’ 했지만 ‘언제 돌아오겠다.’ 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돈을 어떻게 굴리며, 얼마를 이윤으로 남기라는 말도 일절 없었다.
내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과, 반드시 회계하겠다는 말만 남겼다.
종들은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주인이 짓궂어서 당장 내일 돌아 올수도 있었다.
어쨌든 종들에게 남겨진 것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날마다 사는 것이었다.
③바울사도는 긴장 의 끈을 결코 늦추지 않았던 대표적 사람이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사람이었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즉, 아내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다니는 특권을 스스로 권리포기 했다.
복음을 전함으로 얻는 물질적 유익과 혜택도 모두 스스로 포기했다.
왜 그랬는가?
혹시나 내가 전하는 복음이 가짜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혹시나 하나님 나라에 지장이 될까봐... 모든 혜택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긴장한다. 마치 주님이 당장 오실 것처럼!
또한 자기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이런 긴장 을 요구했는데
처녀, 총각들에게도 웬만하면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라고 했다.
왜? 주님이 곧 오신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이루었다.
▲기독교 신앙은, 칼 바르트의 표현대로, 외줄타기와 같다.
이쪽으로 치우쳐도 안 되고, 저쪽으로 치우쳐도 안 된다.
기우뚱 기우뚱거리면서 긴장 의 끈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통과 곤고를 뒤섞어 주셔서
우리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드셨다.
마지막까지 긴장 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엘리야처럼 다시금 긴장 을 다짐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란다.
◑2. 예수님은 결코 방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방관자가 아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예수님과 우리는 관점이 틀린다.
내 생각에는, 지금 안 도와주시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예수님 생각은, 그러니까 관점이 달랐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4
예수님이 전갈을 받고 이틀을 더 머무신 것은
결코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결코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서가 아니었다.
7~8절에, 예수님이 “유대(베다니가 있는 곳)로 가자” 하시니까
제자들이 “방금도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라며
이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주님은 주저하지 않고 실제로 베다니로 가셨다.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나사로를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위협가운데서도 주저하지 않고 현장으로 나아가셨다.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함이라면
필요하시다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달려드신다는 사실을 믿자.
우리 눈으로 보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 너무 커서
나는 곧 망할 것 같고, 지금 내가 절벽 끝에서 버티고 있는데
주님은 전혀 도와주시지 않고 방관자처럼 계신 것으로 느껴지더라도...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이 방관자처럼 꼼짝하지 않고 계신다면,
주님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절대 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덤의 돌은 내가 옮겨야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요 11:39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는 분이
그까짓 돌 하나 못 옮기시겠는가?
그런데, 돌은 너희들이 옮기라는 것이다.
이 한 마디 안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다 담겨있다.
왜 주님은 우리를 극심한 고통가운데로 몰고 가신다고?
유약한 강남부모처럼 다독거리지 않고, 왜 고통 가운데 방치하신다고?
→우리를 강하게 연단하셔서, 이 놀라운 하나님 사역에
우리를 동역자로 쓰시기 원하신다. 약해가지고서는 못 쓴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다. 우리는 죽은 나사로는 못 살린다.
그러나 우리는 돌은 옮겨 놓을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 신앙을 살고 있는가?
모든 기도의 내용이 “주님, 돌도 옮겨 주세요!” 하고 있다.
“자갈, 모래 한 개도 저는 옮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 다 해 주세요!”
이렇게 약해빠진 우리들을, 오늘 하나님은 탄식하며 바라보신다.
◑3. 자녀이므로 연단받는다
▲자녀이므로 연단받는다.
내가 연단을 받을 때,
그것으로부터 회복하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고 히12:7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연단을 받는다.’는
역설적(자녀면 사랑받는데...)인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12:8
미성숙한 자녀들은 이런 ‘역설적 사랑’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매 맞는 자녀보다 때리는 부모/교사의 마음이 더 아픈 것을 이해 못 한다.
▲사랑하므로 연단한다. ★
오늘 이런 성숙한 사랑이 점점 희석되고 있다.
자녀를 사랑하므로,
자녀의 아픔을 허용하고
자녀에게 아픔과 연단(디스플린, 징계성 훈련)을 초래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랑은 '아픔의 부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픔의 부재가 곧 행복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왜곡이다.
‘아픔이 없으면 행복하다!’ - 이것은 인본주의 사회가 심어주는 가치다.
그래서 아픔과 불편함을 제거하려고, 사회는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한다.
조금이라도 안 아프게 하려고 - 무통분만을 한다.
‘아프면... 무식하고 구시대적이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는 아픔을 즐기는 자학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삶=행복한 삶’이 과연 성경적 가치인가?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픔의 부재가 사랑이 아니다.
(‘안 아프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가 아니다)
자녀를 안 아프게 만드는 것 - 이것이 부모의 참 사랑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 가치관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가치관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지....
자녀의 아픔을 못 견뎌 하는 부모는... 성숙한 부모가 아니다.
자녀를 모든 아픔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은 근시안적이고 본능적이다.
숭고하고 깊은 성숙된 사랑은 아니다.
아이의 두려움과 눈물을 매정하게 뒤로 하고
아이를 혼자 학교에 남겨두고 떠나는 신입생 부모의
‘사랑의 내어 몰음’이 바로 성숙한 사랑이다.
왕따, 갈등, 오해, 실패 등의
인생의 쓰디 쓴 길거리에서,
아픔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내 자녀가
스스로 울음을 그치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너무 성급하게 뛰어가서 안아주고 달래주지 않는 것!
이런 진정한 ‘사랑의 방임’이
성숙한 사랑이다.
정말 자녀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의 미성숙한 자기보호본능의 발산인지
말초적인 반응으로 자녀를 과잉보호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어린 자녀를 학교에 보냈는데
자녀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울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고
그것이 학교 당국이나 교사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부모는 빨리 성숙해서
자녀가 아픈 것이 -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자녀의 아픔을 (나의 아픔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을 가지자.
여러분의 자녀가 평생의 인생 속에서 겪게 될
아픔이나 실패, 고통없이 자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계신다면
(그런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사랑의 부모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성숙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아픔은 필연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아픔 당하는 것을 보시고 무조건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
▲아픔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이유
① 죄를 제어하기 위한 교정적인 아픔
아이가 가시에 찔렸는데, 그것을 뽑는 데는 아픔이 따른다.
그러나 아프니까 그 가시를 안 뽑고 놔 둘 부모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죄의 가시가 깊숙이 뿌리박힌 것을 아신다.
그것을 수술해서 뽑아내는 데는 반드시 아픔이 동반된다.
② 더 큰 아픔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적 아픔이 있다.
어느 어머니고, 그 간난 아기가 수많은 면역주사를 맞는 것을 좋아할
어머니는 없다.
그러나 그 아픔이, 앞으로 당할 더 큰 아픔을 방지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하게 큰 바늘에, 아이가 기겁을 하면서 찔려도
그것을 막지 않고, 도리어 아이가 고통을 받도록 팔을 힘껏 붙잡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에게 더 큰 아픔을 예방하고 싶으셔서, 작은 아픔을 허용하신다.
③ 변화되기 위한 아픔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려면, 거기엔 자기 변신의 심한 아픔이 있다.
어두움과 어려움과 고통의 과정 속에서 성숙과 변화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밀알이 죽어야만 사는 아픔이 체험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고 아프게 하신다
는 사실이다.
너희가 참음은 연단을 받기 위함이요... 히 12:7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
아들을 연단(징계)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고
이와 같이 연단(징계)은 다 받는 것인데, 사생자는 받지 않는다 히 12:7~8
이렇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사랑의 부자지간)를 회복하면
그 아픔이, 내가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픔이 된다.
고통을 그냥 무조건 참고 꿀꺽 삼키는, 무조건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사랑의 부자)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연단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9
나는 때로 하나님이 실수하셨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하나님은 왜 나를 혼혈아로 만들어주셨을까?’
(김요셉 목사님은 부친 김장환 목사님과 모친 트루디 사모님 사이)
한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은 나한테 물어보지 않아서 실수하셨다.
나한테 직접 물어보셨더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는 결코 실수가 없으시다.
비록 실수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오묘하게 완벽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아버지도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때로는 아픔의 연단도 주시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시랴! 히 12:9
모든 것을 선하시고 올바르게 섭리하시고 제어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길 수 있는 이해와 순종이 필요하다.
▲연단은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는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
아버지는 우리의 미래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연단!
결국 그 열매를 바라보며, 오늘의 연단을 이겨야 하겠다.
◑4.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일하심을 믿어야 한다.
요셉의 일생을 보면, 사실 요셉 자신이 한 일보다,
주님이 하신 일이 훨씬 많다.
채색옷 입히면... 그 옷 입고 살았고
구덩이에 던지면... 거기에 빠져 있었고
애굽에 팔면... 팔렸다.
보디발의 집에 가서 충성하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연고로 감옥에 들어가면... 들어갔다.
쑈생크 탈출처럼, 탈옥도 못 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전혀 개척하지 못했다.
감옥에서 죽치고 앉아 살면서 꿈 해석이나 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거의 수동적이었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 가운데, 그가 딱 한 가지 한 일은
→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살았던 일뿐이었다.
너무 무력해 보이지 않는가?
그의 삶은 내내 조용하다.
그렇게 감옥에서 썩다가 죽을 인생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이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왕성하게 일하고 계셨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이 조용한 것 같고,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너무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저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까?’
‘저를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어디서 그 증거가 보입니까?’
하소연해 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일 하고 계신다.
*바로가 꿈을 꾼 것 - 하나님이 꾸게 하셨다.
*꿈 때문에 번민하게 만드는 것 -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술 맡은 관원이 잊어버리기 쉬운데 (그래서 처음에는 잊어버렸다)
요셉을 생각나게 만든 것 -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셨다.
*애굽의 술객들이 해석 못 한 것 - 하나님의 역사다.
*요셉이 바로 앞에 나아간 것 -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이끌어 가셨다.
요셉은 자기 생각에,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고 생각했겠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하나님은 왕성하게 일 하셨다.
▲요셉이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데
그 직전 마지막 2~3년이 그의 인생에 최악의 시기였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지 않는가.
그때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다.
노예로 팔려갔는데
거기에다 또 감옥에 들어가서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자기에게 소망의 한 줄기 빛이었던 술 맡은 관원은
복직된 지 2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여기 앉은 젊은이들 가운데
자기 인생이 어두컴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취업도 안 되고
화창한 봄날이 다 지나가도록 여전히 혼자라서 외롭고
그래서 괴롭고...
오늘 낮 1시쯤에 갑자기 하늘에서 비바람과 천둥이 몰아쳤다.
“목사님, 저게 요즘 제 마음입니다!” 라고 어떤 청년이 고백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런데 인생 가운데 가장 절망적일 때, 그 순간에,
구원은 가장 가까운 곳에 예비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보면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천둥과 번개가 치지만
곧 날이 개이고 밝은 햇볕이 다시 깃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우리는 세상의 편법으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술수를 써서 어떤 사람을 움직이게 할 필요도 없다.
당장에는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당장에는 빠져 나갈 길이 안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 바라보면서
‘죽으면 죽으리다’ 하며 서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므로
넘어지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란다.
지금도 우리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면서
‘조금만 더 참아라!’, ‘곧 영광의 그 때가 온다!’
라고 부르짖는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말씀의 원칙 붙들고 서 있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포기하거나 세상과 타협하지 마시라.
애가 다섯이나 딸린 그런 흑인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 남자가 있겠는가?
그런데 흑인 청소부 여자는 10년 넘게 묵묵히 일하면서
어떤 음모가 있으면, 그것을 발견해서 사장을 도와주며 충성한다.
하면서 그 흑인 청소부 여자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면서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보통 영화를 보면, 늘씬한 몸매의 여자와 단단한 근육질의 남자가
실제로 그런 결혼이 성사된다면... 그 결혼이 오래 가겠는가?
그런, 인격이 빠지고 서로 외모로 만난 관계... 오래 못 갈 것이다.
그 인격에 진실됨이 있고, 부드러운 섬김으로 감동을 주고
말씀의 기준과 순수함을 추구하면... 연애에도 결국은 승리자가 된다.
흑인 청소부 여자처럼, 요셉처럼, 끝까지 가면 결국 승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왕성하게 일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늘 그런 해석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이 그까짓 꿈 하나 해석 못 하겠는가?
‘살찐 7암소를 살찐 7부인으로, 파리한 7암소를 야윈 7부인으로 맞이하면
앞으로 왕은 잘 될 것입니다...’ 라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술객들의 해석을 바로 왕이 만족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 때,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때가 되니까,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셨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잡힌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다. 어느 날, 예전처럼
노역을 하고 수용소로 돌아왔는데 점검해 보니 장비 하나가 없어졌다.
일본군 지휘관은 포로들을 다 세워놓고 숨긴 자가 빨리 자수하지 않으면
한사람씩 차례로 총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침묵을 깨고 포로 한 명이 나왔다.
그런데 식당에 가서 다시 장비를 세어보니 장비가 모두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진실한 성도가 될 수 있을까? 느 9장을 통해 살펴보면...
그 말에는 “내 축복을 너희에게 다 주마!”라는 약속이 담겨 있다.
사람 사이에서도 “너 나 사랑해?”라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고백이다.
아이들에게 “은혜야! 한나야! 너희들 아빠를 사랑해?”라는 질문은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고 하는 고백을 질문으로 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사랑관계에서는 질문이 고백이고, 달라는 요구는 주겠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사랑의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드려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도 없고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사실 드리는 삶에 행복이 있다. 부부관계를 생각해 보시라.
부부끼리는 줘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나 안 주면 안 주는 것만큼 빼앗긴다.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께 안 드리면, 안 드리는 것만큼 빼앗긴다.
그건 분명 하나님의 “떠밀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체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왔다.
아내들도, 자기들이 미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평안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1956년 1월 2일 월요일, 그들은 미리 봐둔 아우카 지역 강변에
그 후 몇 차례의 비행을 통해 필요한 인원과 물품을 더 실어 날랐다.
비행기로 가가호호 다니며 확성기로 그곳으로 놀러 오라고
그러던 금요일 6일, 드디어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다가왔다.
그들은 너무 기뻐 아우카 말로 환영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거듭하며
선물도 주고 함께 먹으며, 그 남자를 비행기에 태워서 같이 비행도 하며
또 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해 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바랬다.
원시인들을 만나고 난 후 선교사들은 긴장이 풀어지려함을 느끼며
10명의 원주민들이 그들이 있는 처소로 오고 있음을 보고 너무 기뻤다.
그래서 속히 다른 네 명의 선교사들에게 알려 주려고 되돌아 왔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그 후 연락이 끊긴 것이다. 모든 가족들과
후방에서 기대하며 기다리던 사람들은 침묵의 주일 하루를 보낸다.
결국 1월 9일 월요일, 탐사로 떠난 팀들은 상공에서 확인해 보니
본부 지역이 훼손되어 있었고, 시체가 강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탐사팀은 꺼리는 현지인들을 대동하고 재차 수색팀을 착륙시켰다.
선교사들은 이미 피살되어 강물과 근처에 흩어져 있었다.
아마 에드의 시신은 강에 떠내려갔고, 그의 시계가 유품으로 남았다.
아우카 족들은 매복해 있다가 창으로 선교사들을 비참하게 살해한 것이다.
그들의 비행기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잔인함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공격하는 것이 이들의
그들은 권총으로 자기를 방어하면서 이들에게 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아우카 족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들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남은 미망인들과 가족들은 당연히 아우카 족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다른 원주민 부족들(키추아 족 등)에게
그들은, 자신들이 아우카 족을 두려움과 미움으로 멀리하고
전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며 헌신하는 제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순교한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남은 교회를 이끌어가며
같은 부족, 친족뿐 아니라 다른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리고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네이트④의 누나 레이첼 세인트는
2년 후 그들은 아우카 족에게로 들어가 살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교사들을 살해한 남자들 중 2명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그 아우카 부족을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그 사랑의 영원한 길을 뒤따라 순종해 갔다.
그곳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곳인지 뻔히 잘 알았지만
이 세상에 우리 힘대로 안 되는 불행들을 많이 만난다.
그것은 그 불행을,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호스피스 사역단체에서 발행한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겨우 6살 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병원에서 제공하는 ‘호스피스 케어’를 받게 되었다.
크리스천 호스피스 사역자가 그 아이를 케어 했는데(잘 보살핌),
만날 때마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던 중 아이는 천국에 갔고, 호스피스 사역도 자연히 끝났다.
몇 주가 지나서 그 호스피스 사역자 앞으로 장문의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감사하고 정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아이가 마지막 투병생활을 할 때
또한 죽음을 담담히 맞이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아이를 잘 돌봐줘서 고맙고, 또 예수님을 전해줘서 너무 고맙다...
6살 된 어린 자녀를 잃은 어머니 -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말 감사합니다!” - 그분의 고백에는 감사가 있었다.
그 편지에는, 뭔가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이 엿보였다.
불행한 일을 당했지만, 그녀는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는 불행하고 절망적인 자기 인생의 큰 시련을
오히려 그 불행 때문에, 죽었던 딸이 다시 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예수를 믿기 가장 어려운 위치(회당장)에 있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었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야이로가 자기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절망으로 끝맺었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나갔다면
자기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그는 정말 불행한 결말을 맺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행을 <주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로 삼았다.
그 결과, 불행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았고,
▲3.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 도 마찬가지였다.
고치지도 못할 병을 고친다고 재산 다 탕진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러나 이 여자도 불행으로 시작했지만, 행복과 새 희망으로 끝맺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을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불행 -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역경과 재난 -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 불행이 → 새로운 행복을 낳는 씨앗으로 변한다.
▲살다보면 인간관계에서, 불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일을 당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일례로, 주님이 나를 시험하신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는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난관을 → 행복의 씨앗으로 바꾸는 삶이다.
교양과 학식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켜 행했으니까.
게다가 돈도 많았으니 어쩌면 불행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한 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행복과 물질 때문에, <주님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행복의 조건, 평탄한 환경 때문에, 축복 때문에
오히려 그는 영생의 <주님을 포기>하는 불행한 자가 되고 말았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더 가지는 것’이라면, 부자청년처럼 된다.
‘더 가지되’ 그 목적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면>, 비록 못 가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가 누리는 형통과 평탄함이 주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는,
실제로 병 고친 사람 중에 9명이 떠나고 1명만 남지 않았는가. 눅 17:17
그래서 그 형통과 축복이, 도리어 재앙이 되는 삶으로 마쳐진다.
평탄할 때는 평탄해서, 나태해져서... 주님과 멀어지고
곤고할 때는 곤고해서, 원망하다가... 주님과 멀어진다.
평탄할 때는 감사하며 더 겸손하고... 주님께 더 충성하고
곤고할 때는 곤고하므로 더 겸손,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더 가까이 간다.
◑8. 고난 중에 열매 맺는 신앙 (고난 '후에' 아님)
왜 보아스의 본처는 온데간데없고, 이방 여인 룻이 주인공인가?
구약성경에 미혼 독신 남성이나 여성에 대한 언급은 극히 드물다.
그러니까 보아스가 그런 특수한 경우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아스가 룻을 책임지기로 성문 증인들 앞에서 결정되었다.
그 때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에게 덕담을 해 주었는데...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조상 유다 - 다말 의 관계와 연관짓고 있음은 흥미로운 단서이다.
여기서 보아스에게 본처가 있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추측하게 된다.
보아스를 유다에게 비유했기 때문인데, 유다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유다-다말이 며느리였듯이, 보아스-룻도 조카며느리 쯤 되는 사이였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성문 백성들과 장로들의 덕담 또는 기원이
그러니까 족보, 즉 메시야의 계보는 보아스-본처 관계로 흐르지 않고
보아스-룻 관계로 흐르고 말았다. 그 후손에서 다윗이 탄생했다.
보아스는 유력자였다. 하인들을 부려서 일 시킬 보리밭도 가진 재산가였다.
그러니까 보아스의 본처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마님이었다.
거기에 비해 룻은, 출신 성분이 모압 이라는 이방인에다,
재산은 알거지, 신분은 과부... 그러니까 최악의 출신성분이었다.
룻은 스스로 자기를 ‘하녀보다도 못한 자’로 인정했다. 2:13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3:11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온 일이 ...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2:11
실제로 그녀는 여호와 신앙을 쫓아 시모 나오미를 따라 왔으며
근면하게 밭에서 일하면서 시모를 섬겼다. 2:7, 2:18
너희 집이 라헬, 레아의 집처럼 되기 원한다고 했다. 4:11
그러니까 성읍 여론이 일방적으로 이방 여인 룻 편을 들고 있다.
큰 죄 지은 것도 없지만, 크게 칭찬 들은 것도 (성경기록에) 없었다.
반면에 룻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하나님을 섬겼고
성경 역사의 유유한 물줄기는 여기서 진로를 바꿔 타버렸다.
인종, 가문, 재산, 과부, 학벌, 교단, 출신배경, 외모 등을 일절 보지 않고
①룻기의 스토리는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에게 주는 경고이다.
자기 출신성분만 믿고 안일하게 살다가는 누구처럼 큰 코 다친다.
세상에서 원만하고 유복하게 살지 모르나, 구속사에서는 변방이다.
②반대로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이게는 희망을 줌과 동시에
변명의 여지를 없애버린다. 출신이 나쁘다는 변명이 안 통한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 쓰신다. 행 10:34-35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꿋꿋이 이긴 사람은
오늘도 무슨 교파우월주의, 인종우월주의, 민족우월주의,
각종 우월하다는 자기의 조건을 믿고 안일한 삶을 영위하다가는....
유대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은 분명 수치요, 명백한 실패였다.
그들은 당당하게 선교사 사명을 띠고 바벨론에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 민족은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도 가증한 우상숭배를 행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고, 그들의 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주님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
그래서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아, 실패해서 바벨론 포로로 이민을 갔다.
아니었다. 거기 바벨론 땅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중인, 실패와 절망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던 유대 민족에게 이런 소망의 말씀을 주셨다;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그곳에서도 나타내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쉬지 않고 계속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해서
회당 중심으로 여호와 신앙 전파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다가
바울의 소아시아 전도 여행 및 사도행전 복음전파의 발판을 놓았다.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드러내는 귀한 사명을 감당했다.
그 분은 자기가 중국에 온 것이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실패했다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당신의 섭리를 계속 이루어 가신다....
주님의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 (나의 사전dictionary에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의 깊은 뜻은 사람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지만
조그만 내 머리로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의 문을 열어주소서 (0) | 2019.12.27 |
---|---|
성도에게 중요한 5가지 신앙 (0) | 2019.12.27 |
하나님은 내 편이신가? (0) | 2019.12.27 |
그리스도인의 자녀 양육 (0) | 2019.12.27 |
플러스 알파의 우상 (0) | 2019.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