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녀 양육 엡6:4 06.04.30.설교스크랩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 엡 6:4
▲자녀 교육은 ‘저절로’가 아니라, ‘적극적인 양육’ 이다.
위 성경 구절에 사용된 ‘교훈’, ‘훈계’, ‘양육’이라는 단어는 모두
적극적인 훈련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자녀 양육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만 되는 것이다.
자녀 양육은, 자녀를 낳고 데리고만 있으면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적극적인 교육의 비전을 갖고 양육할 때에만 비로소 자녀들은
하늘을 나는 존재로 키워진다.
방금 태어난 독수리를 격리시켜 전혀 나르는 경험을 주지 않자
한 독수리가 닭과 어울리며 평생 닭처럼 땅을 기며 살아가는
한 실험 결과가 보고 된 사례도 있다.
성경이 크리스천 부모들에게 가르치는 자녀 양육의 원리는 무엇인가?
◑1. 아버지가 양육의 궁극 책임을 져야 한다.
엡 6:4는 “아비들아!” 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머니들이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녀 양육의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있다고 인식하기 쉽다.
성경은 이런 전통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을 깨고
자녀 양육의 궁극적 책임이 아비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교훈처럼, 하나님이 한 가정에서 지도력을 가장들에게 주셨다면,
자녀 양육을 포함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책임이
리더인 아버지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너무 바쁘신가?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너무 바쁜 사람이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이 바빠하는 일들이 내 자녀의 미래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요즈음 자녀들은 “우리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 ” 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남자들이 직장 상관들이나 동료들에게 저녁이나 주말시간을 함께 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난 오늘 저녁에 내 자녀들과 약속이 있습니다.” 라며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통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오늘 가정에서 일어나는 최대의 불행의 뿌리는
가정에서 ‘아버지 부재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저녁 늦게 들어오셔서 잠만 주무시고 아침에 다시 나가시기 때문이다.
동성연애자, 알콜 중독자들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식적 불행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고 더 깊어가고 있다.
가정의 붕괴가 로마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는 심각한 징후를 절감하던
철학자 세네가는, 당시의 사회를 향해
“애국자들이여,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외쳤다. 오늘 우리도
“아버지여,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정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라고 외쳐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한국의 아빠들에게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①독수리 아빠 - 언제나 자녀와 함께 있어주고 자녀와 함께 날아주는 아빠
②기러기 아빠 - 자녀를 외국에 보내놓고 일년에 두 세 번 자녀들에게
얼굴만 보여주는 아빠. 엄마 책임이 아닐까?
만약에 정말 학교교육이 맞지 않는다면, 홈스쿨 대안이 빨이 나와야 하겠다.
(우리 교회가 요즘 이 시스템을 연구 중인데, 여름 즈음 발표할까 한다.)
자녀를 무작정 외국에 보내어 아빠랑 떨어지게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③팽귄 아빠 - 아예 아내와 자녀들에게 단절되어 팽 당한 아빠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가정에 깊은 위로를 보낸다.
◑2.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말아야 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엡 6:4
▲성난 세대
오늘날 젊은 세대를 가리켜 ‘성난 세대’ angry generation 라고 표현한
작가가 있었다.
저는 오늘날 성난 세대를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성난 상태에 있게 되었는가?
성난 세대의 보편적인 세 가지 원인을 지적하면
①방임 - 버림 받았다고 생각할 때 자녀에게 분노가 생긴다.
부모와 진지하게 인생 문제에 대화가 안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②과잉보호 over protection - 방임 못지않게 나쁘다. 그 뿌리는 불신이다.
자녀를 믿지 못해서 모든 것을 대신해 주니까, 자녀의 눈에는
부모가 자애로운 보호자가 아닌, 자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폭군으로 보인다.
③과잉징계 - 자녀들을 노엽도록 징계하면,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징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과잉징계를 경계한다.
▲성난 자녀를 만들지 않으려면,
부모 자신의 분노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성난 상태에서 자녀들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감정이 통제 안 된 상태에서, 자기의 감정을 퍼붓는 부모가 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교육이 아닌, 폭력에 가까운 잔소리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출발점은
부모 자신의 감정의 통제이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자녀들을 향한 속상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 성경적 대답은 ‘성령 충만’이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가정에 대한 그의 교훈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성령 충만’이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
성령 충만의 특성은 자제력이다.
부모의 감정이 다스려지지 못한 상태에서, 변덕스런 부모의 감정의 분출을
목격할 때마다, 자녀들은, 깊은 내적 혼란과 분노를 경험한다.
그것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난동을 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적 자녀 양육을 원한다면 먼저 ‘성령 충만’을 구하시라.
자녀들을 인해 속상한 상태에 계시는가?
그런 상태에서 입을 여시면 안 된다. 먼저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을 구하시라. 성령의 지혜를 구하시라.
그것이 자녀 양육의 시작이다.
◑3. 부모는 주님의 가치관으로 양육해야 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말과 행동... 두 개가 모두 중요
‘교양’이라는 단어는 ‘예방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반면
‘훈계’라는 단어는 ‘치료적인 언어’를 가르친다.
그러니까 말로만 아니라, 행위의 본을 보여야 한다.
주의 교양(행동)과 훈계(말)로 양육해야 한다.
가장 좋은 교육은, 부모 자신이 말과 행동에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부모의 모범이 정말 중요하다
자녀들이 진지한 믿음의 삶을 살기 소원하신다면
부모가 먼저 진지한 믿음의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자녀가 진정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하신다면
보모 자신이 먼저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는 안 하면서, 자녀들에게만 하라는 것은... 위선이다.
자녀가 정직한 사람이 되기 원하신다면
부모가 먼저 정직하게 사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뒷모습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교육에서는 ‘역할 모범’ 또는 ‘모델링’이라고 한다.
▲동시에 성경은 진지한 훈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인본주의적 현대 교육은 거의 훈계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물론 과도한 징계를 주의해야 하지만
인간의 부패성은 우리의 오류를 시정하는 진지한 훈계를 필요로 한다.
부모는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관을 먼저 내면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동일한 가치관을 따라 매우 일관성 있게 자녀들을 훈계할 수 있다.
가치관이 분명할 때만, 일관성 있는 훈계가 가능하다.
▲정직의 가치관을 가르친 간디 집안
「마시멜로 이야기」책에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간디 집안의 중요한 가치관은 정직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간디의 손자 아룬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자동차 정비소에 가서
차를 수리하게 되었다.
아룬은, 오후 5시까지 아버지 사무실에 돌아오기로 약속했는데,
차가 일찍 수리되어 시간이 많이 남아서, 2편 동시상영 극장에 갔다.
그는 약속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 6시 5분에 아버지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룬, 왜 늦었니?”
“차 수리가 늦었어요!” 아들은 얼떨결에 거짓말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정비소에 전화해서 언제 정비가 끝났는지
알고 있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잠시 묵도한 후
“알았다, 너는 네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거라. 나는 집에까지 걸어가겠다!”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무려 15Km의 거리였다.
“아니 왜요?”라고 묻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자녀교육을 잘못했는지 반성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걸어가며 정직의 교훈을 묵상해야 하겠다!”
아룬은 울면서 차를 몰고 걸어가는 아버지를 뒤따라갔다고 한다.
그 날 이후, 간디의 손자 아룬은 어떤 교훈을 배웠을까?
일생을 통해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거짓말을 안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 교육의 예다.
◑4. 부모는 자녀를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여기서 “늙어도” 라는 뜻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턱에 수염이 나서...’ 라는 신체적 노화의 뜻 보다는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자녀 교육을 할 때는
자녀가 언젠가 미래에 부모를 떠나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가르치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자녀 양육의 진정한 결과는
자녀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사회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어떻게 사느냐로 검증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가 걸어갈 길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 번역에 이런 뜻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본래 뜻은 “자녀들에게 [그가]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그가]가 한글 성경에 빠져있다.
the way he should go!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부모가 걸어 가야할 길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계발하여
(부모는 무조건, 자녀의 은사가 자신의 은사와 똑같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신 그 인생을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떠나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모는 돕는 것이다.
①자녀가 자기 은사를 발견하도록, ②자녀가 잘 떠나가도록
부모의 못다 이룬 인생을 자녀에게 강요하지 마시라.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야 할 그들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어느 날 미련 없이 떠나보내 주시라!
그리고 그 떠남의 날을 생각하며
오늘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최선의 준비가 무엇인가를 기도하시기 바란다.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도의 고통에 대한 탐구 (0) | 2019.12.27 |
---|---|
하나님은 내 편이신가? (0) | 2019.12.27 |
플러스 알파의 우상 (0) | 2019.12.27 |
역사학자가 본 한국교회와 언론 (0) | 2019.12.27 |
시대를 일깨워 주는 가문 (0) | 2019.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