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내 편이신가? 수5:13~15 06.04.23. *원제목 : 누구를 위하는가?
이장호 목사
▲너는 누구 편이냐?
편 가르기는 어느 사회에도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도 좌, 우편의 편 가르기,
양극화의 편 가르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방선거도 따지고 보면 후보자 인물의 됨됨이 보다는
‘어느 당 소속이냐는 편 가름’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어떤 편 가름 식 싸움이 나온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관문 도시인 여리고 성에 맞닥뜨렸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 때 여호수아 앞에는 정체불명의 건장한 한 사나이가 출현했다.
칼을 빼어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여호수아가 물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수 5:13
한 마디로 “너는 우리 편이냐, 상대편이냐?”의 질문이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정체불명의 그 사람은 아주 아리송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수 5:14
“아니라” 라는 단호한 대답에서 볼 때,
그는 아군과 적군으로 편 가르는 여호수아의 질문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나는 너희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리고 편도 아니다”
“나는 너를 도울 너의 아군도 아니고, 동시에 너를 대적하는 적군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다. 나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나는 전혀 다른 편에 소속해 있다. 나는 하나님 편일뿐이다.”
아니! 여호와로부터 오신 군대장관이라면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너희를 위해 싸우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셔야 되질 않는가?
그런데도 성전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군대장관은
네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쪽도 편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것은 후에 벌어진 결과를 놓고 봐도 사실이었다.
여호수아는 그 후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지 않았다.
만약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이스라엘과 여호수아 편을 들어주었다면
그는 모든 전쟁에서 당연히 백전백승 했어야 했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여리고 성에서는 이겼지만, 아이 성에서는 패하지 않았는가!
▲부족 神들은 철저히 자기편만 들어 줌
이것을 이해하려면 ‘신관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당시 가나안 부족 신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가나안은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다곤 등 제각기 부족 신을 숭배했다.
각 부족은 자기들의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다.
이때 제사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제사장은 부족과 부족 신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였다.
제사장만이 부족의 제물을 부족 신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족 신의 축복을 부족민들에게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라던 번영과 축복을 얻지 못하면 그 제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제사장은 더 큰 치성을 드릴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농사도 풍작을 거두고, 자손도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사장이 요구하는 대로 아무리 치성을 드려도
바라던 축복이 번번이 다가오지 않으면
마침내 제사장이나 부족 신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결국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들의 제사장과 심지어 그 부족 신마저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더 강한 신과 그에 따른 새로운 제사장을 선택한다.
부족의 번영과 축복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신은 사실상 그 부족을 편들어 주는 인간의 도구였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고안해 내고, 자기를 위해 선택하는 신이었다.
그 신을 섬기지만, 그 신이 도리어 인간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줘야 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다르셨다.
어느 한 쪽 편에 서서 무조건하고 그들 편만을 들어주는
그런 분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당시 정황은 한 사람의 지원군도 아쉬운 때였다.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니
“아니라”는 대답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충격적이며 섭섭했겠는가?
우리도 누구랑 싸워서 하소연할 때,
믿었던 사람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한지 잘 안다.
▲네 신을 벗으라! - 종이 되라는 의미
그렇다면 편도 들어주지 않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출현하셨는가?
여호수아가 그것을 물었다;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수 5:14
이 때의 답변을 주목하시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수 5:15
왜 여호수아가 서 있는 그곳이 거룩한가?
그 장소가 원래부터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인가? - 아니다!
그 땅이 거룩한 이유는
지금 거룩하신 여호와 자신이 그곳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거룩성은 하나님 때문에 주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좀 다른 자세로 임할 것을 요구하신다.
여호수아는 신을 벗어야 했다.
옛날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 받았을 때도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꼭 같은 요구를 하셨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출 3:5
지금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지방 사람들의 풍습에 의하면 노예나 종들은 신을 벗어야 했다.
이 풍습이 예수님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눅 15장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는 맨발이었다.
그 탕자는 남의 집 종살이하다 왔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주여, 저는 당신의 종이요, 당신의 노예입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마음대로 쓰실 수 있고,
저는 오직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당신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살아가겠습니다.”
라는 결단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네 종이 아니다. 네가 나의 종이다.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 그는 이 전쟁에서 이겨야 했다.
패전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이기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되어야 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우리 편이 되어주시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천사는 이런 여호수아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린 것이다.
“나는 누구의 편이나 들어주는 가나안의 부족 신들과는 다르다.
나는 너의 종이 아니다. 네가 나의 종이어야 한다.
나는 무조건하고 너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의 편에 서야 한다.
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다.
너는 나의 방식대로 나의 전쟁에 참여하는 나의 도구여야 한다.
그래서 네가 신을 벗어야 한다.”
(오늘 날 세상에서 여러 가지 생존경쟁을 치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무조건 내 편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 가나안 신 방식이다.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을 벗는 것 - 여호와 하나님 방식이다.)
▲질문이 달라지다.
이제 여호수아가 던지는 질문은 더 이상
“주님은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 편이냐?”를 따지는 것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과연 신을 벗은 여호와의 종인가?
그래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여호와의 편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신 벗기를 거부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등진 자인가?”
를 늘 물어봐야 했다.
▲본질적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의 싸움대상이
본질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대상은 뜻밖에도 저 여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신을 벗는) 하나님의 종 되길 거부하면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내편에 서 주기만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자신의본성
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도 하나님께는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합당하게 살아 가야할 이스라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하나님편이 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한편이니, 싸움에서 이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다면
그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저들 이방이 이기도록 방치할 것이다.
▲종으로 순종했더니 승리함
여러분! 우리가 비뚤어져 있는데도,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데도
승승장구 바라던 땅을 차지해 간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고만장하고, 오만불손하게 되겠는가?
여리고 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방식대로 싸운다.
수 6:2-5절을 보면,
말씀하신 여호와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하며 전쟁에 임한다.
그들은 진정 여호와 편이었고 여호와의 종이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당연한 승리가 6장 전체에 기록된다.
6장 27절은 이 승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과 여호수아는 과연 한편이었다.
▲종의 자세를 버리니 패배함
하지만 두 번째 장애물인 아이 성과의 전쟁은 사정이 달랐다.
아간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물건을 훔친다. 7:1
그는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써, 전체 이스라엘에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이렇게 영적으로 병든 상태에서 아이 성 점령에 실패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에 서 주시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아이 성 공격에 필요한 작전지시를 주시지 않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 지시도 받지 않고 성급하게 아이 성을 공략한다.
이는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속한 군대 작전권을 자신이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신을 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다려야 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도 이런 이스라엘을 편들어 줄 수 없었다.
▲종의 위치로 되돌아오다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함께 옷을 찢고 회개한다. 종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아간의 문제를 엄중히 처리한다.
바르게 회복된 이스라엘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작전 지시를 내려 주신다.
여호와는 다시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셔서 전쟁에서 이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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