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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관한 짧은 글 모음

LNCK 2019. 12. 28. 06:23

십자가에 관한 짧은 글 모음                       고전15:31                  여러 설교 취합

 

짤막하게 십자가 신앙을 이해하실 분들은 보세요!

 

-1- 십자가 사상

 

1. 십자가의 두 국면

2. 십자가의 대속

3. 십자가의 영광

4. 십자가의 능력

5. 십자가의 승리

6. 십자가와 성공

7. 십자가와 지식

8. 십자가와 탁월성

9. 십자가는 고통의 동참

10. 십자가와 자기부인

11. 십자가와 기쁨

12. 십자가와 죽은 뒤(부활)

13. 십자가는 영원한 긍정적 상징

14. 십자가는 윈윈 방식

15. 십자가를 구하라

16. “십자가라는 말이 빠진 십자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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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 설교

 

17. 십자가의 영광

18. 십자가는 거치는 것

19. 비참한 십자가의 위력

20. 이 마음을 품으라

21. 가학, 피학과 대속심리

22. 그 외 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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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의 두 국면 http://blog.daum.net/rfcdrfcd/15974810

 

 

2. 십자가의 대속

 

대속의 원리

대속이란 대신 값을 치렀다는 의미이다.

음식점에서 단체로 식사 후에 그 중에 한 사람이 쏜다’(값을 치른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와 같다. 한 사람이 값을 치르면 나머지 사람은 값을 치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대속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짐승이 내 대신 내 죄값을 치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내 대신 내 죄값을 치러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치를 필요가 없다.

 

대표의 원리

어떻게 예수님 한 분이 수 백 억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속할 수(치를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대표의 원리;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온 세상 인류가 모두 죄인이 되었고(5:12),

예수님 한 분의 순종으로 인해 온 세상 인류가 모두 의인이 되었다(5:15-19).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승리는 나의 승리고, 패배는 곧 나의 패배가 된다.

마찬가지로 대표자 아담의 패배는 모든 인류의 패배였고,

예수님의 승리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승리였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나의 대표가 되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예수를 대표로 인정할 의사가 있느냐/없느냐에 따라 구원(구원의 시작)받는다. 행위가 아님.

 

다른 예로, 집에 아버지가 잘못 보증서면 온 집안 식구가 길거리로 내몰리는 피해를 본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집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녀()가 잘못이 없더라도 아버지의 대표의 계약의 결과에 따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아버지가 좋은 계약을 성취하면, 온 가족이 그 혜택을 누린다.

아담은 우리 온 인류의 대표로서, 마귀의 종이 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대표로서, 마귀를 이기시고 왕이 되는 계약을 체결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아담의 계약에서 그리스도의 계약아래로 들어오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 집을 내 놓아라고 차압이 들어오면, 우리는 계약이 갱신되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맺은 새계약을 내세우면, 마귀는 꼼짝 못하게 된다.

마귀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이런 새계약이 맺어진 사실을 가급적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새계약 아래 들어왔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것이다.

우리는 왕권이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대표로 마귀를 이기시고 왕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것이다.

 

[기도]

과거에 망할 아담의 계약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계약 아래 놓였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종노릇하는 인생이 아니라, 왕노릇하는 인생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나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모든 양떼가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도리어 나 한 사람의 기도와 승리 때문에 모든 양떼가 잘 되는 역사 일어나게 하소서.

 

개인적 믿음, 개인적 영접이 중요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만 구원받는다.

 

예로, 어떤 마을에 전염병이 들어서 모든 주민들이 병에 걸렸는데 치료약이 도착했다.

치료약은 있지만 모든 주민이 낫는 것은 아니다. 그 약을 먹는 사람만 낫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놋뱀을 세워주셨지만,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만 구원(치료)받았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죄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그 계명에 순종했느냐/안했느냐(행위) 이전에, 순종할 의사가 있느냐/없느냐(믿음)를 보신다.

의사만 있으면 구원(더 자세히 구원의 시작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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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십자가의 영광

(‘십자가는 죽는 것인데, ‘영광이란 말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순이지만)

 

영광이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십자가는 영광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지시는 일을 영광을 얻는 일로 여기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뒤이은 24)

성경에서 <영광>이란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곧 십자가를 가리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영광>-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는 삶이다.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영광>이다.

 

한국 교회엔 영광이 사라졌음

30년 전 까지만 해도 한국 교회는 하꼬방(판자촌) 같이 작고 볼품이 없었다.

남들 보기에 겉으로 드러낼 만큼 대단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엔 복음의 영광, 십자가의 영광이 있었다.

사람들은, 작고 볼품없지만, 교회에 뭔가가 있다고 인정했다.

 

지금은, 겉으로 보기에 드러낼 만큼 대단한 건물과 규모가 있지만

사회가 도리어 교회를 향해 걱정할 만큼, 한국 교회에는 <영광이 사라져 버렸다>.

왜 한국의 교회가 수치를 당하고 있는가?

십자가의 정신-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잃어버리고

예수 믿어서 잘되고, 형통하고, 부자되는 번영(성공)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십자가는 수치, 모욕, 형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십자가가 왜, 어떻게 영광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그렇게 당당했고 능력이 있었나?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었기 때문이었다. 죄의 형벌의 십자가가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자

스스로 선택해서 십자가를 질 때, 앞으로 한국 교회에는 소망이 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찬송가)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의 예

2백년 전에, 윌리엄 캐리가 소명감이 충만해서 인도에 선교사로 갔지만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자녀는 말라리아로 죽고, 부인은 정신이 미쳐서 12년 동안

감금 생활을 당하다가 결국 죽었다.

근대 선교의 선구자로서 캐리가 받은 영광 이면에는 처절한 십자가 고난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고난의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했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에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 묘비 수 백 기를 볼 수 있다.

일례로, 언더우드 선교사도 미국에서 상류 계층의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서 한국으로 와서 선교사로 헌신했다.

 

구역장, 순장을 하다보면 말씀 준비는 물론이고 물질로 섬길 일도 많아진다.

열심히 하지만 열매도 안 나타날 때도 있고, 도리어 무시를 당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꿋꿋이 자기 사명을 계속 수행하는 사람이 고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의

주인공이다. 이런 사람, 이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는 영광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불신자들에게 영광과 존경을 받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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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와 같이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다.

 

핍박을 이기는 능력

오늘날 (한국 성도는) 옛날처럼 뺨맞고 머리털 뽑히는 식의 고난은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형태로, 보이지 않는 정신적 핍박이 있다. 그것은;

교회 일에 앞장서서 헌신 봉사했는데, 세상적인 존경과 인정을 못 받을 때가 많다.

 

예수 믿고 일생을 희생했지만,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을 못 받을 때가 있다.

성도는, 보상을 받기 위해, 그것을 바라보며 희생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감사해서 나도 스스로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그런 희생의 십자가가 주는 삶의 만족과 행복이 어떤 것인줄 맛보아 안다.

그래서 세상적인 보상과 인정을 못 받아도덤덤하다. 괜찮다. 아예 기대조차 없다.

십자가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 못 해도 그것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

 

죄를 이기는 능력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늘 보혈 찬송을 부르며, 늘 회개하는 사람은

점점 승화되어 죄를 이기는 능력을 가진다.

(설명이 다소 불충분한 부분은 몇 년 후 다시 보충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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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십자가의 승리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2:15)

 

승리의 시제tense에 유의해야 합니다 already,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십자가의 승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2천년 전에 이미”already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not yet 완성된 것은 아니다. 완성은 재림의 때에 된다.

 

뱀의 예화

뱀이나 도마뱀은 머리를 잘라도 즉사하지 않고, 한 동안 살아서 꼬리가 퍼덕거린다.

사단은 십자가를 통해 이미already' 그 머리가 파쇄되었다(3:15 예언의 성취)

그러나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아직not yet' 살아서 세상에 활동하고 있다.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사단은 불못에 던져짐으로써 완전히 패망하고

성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미래 천국'의 행복을 누릴 것이다.

 

D-Day V-Day 예화 (Decision-Day, Victory-Day)

* D-Day2차대전 당시,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를 상륙한 날이다.

연합군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함으로써, 아직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연합군은 이미이긴 것과 다름없었다.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비교하면 더욱 쉽게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하심은 D-Day. 마귀의 머리를 짓이긴 날이다.

아직 꼬리가 남아서 퍼덕이지만, 치명타를 입고서, 이미 진 것과 다름없는 날이다.

 

* V-Day는 연합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군에게 항복 받은 날이다.

전쟁은 완전히 끝났고, 연합군이 최후 승리했다.

재림해서 사단을 불못에 던지고 '미래 천국'을 이루실 날이 V-Day.

우리는 이미’ D-Day(십자가와 부활)를 지났지만,

아직’ V-Day(재림과 최후심판)를 미래에 바라보고 살아간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예화

"번쩍!" 눈 깜짝 할 사이에 히로시마의 30만 명이 재가 되어 확 날아갔다.

일본은 원자 폭탄 한 방을 맞고서 치명타를 입었다.

열 개를 군데군데 떨어뜨리면 전 일본 열도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국이었다.

그 날 이후로 전쟁은 태평양 등지에서 계속되었다. ‘아직끝나지 않았다not yet.

 

그러나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날 일본은 이미’already 졌다.

결국 천황이 맥아더 장군에게 완전히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종지부를 찍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같다. 마귀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2:15). 그러나 아직 전쟁은 재림 때까지 계속되어질 것이다.

 

목회에 적용

1. 죄와 사단의 권세

죄와 사단의 권세는 이미already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철퇴를 맞았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not yet 살아서 퍼덕거린다.

우리는 지금 사단의 최후의 발악(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못된줄 알고 크게 분내어. 12:12)

시기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머리가 뭉개진, 머리에 치명타를 입은 부상당한 뱀이다.

 

지금 우리는 사단의 권세를 너무 두려워해선 안 된다 이미 원폭을 맞았다 already.

반대로 사단의 권세를 너무 무시해서도 안 된다 아직 최후의 발악에 당한다 not yet.

예를 들면, 요일 3:8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하심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멸해버렸다, 그래서 완전하게 끝난 께임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아직 마귀는 살아있고, 완전히 멸망받고 불 못에 던져지는 재림의 심판날이 아직 남아 있다.

 

질병과 저주의 권세

"저가 나무에 달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3:13)

이런 성경 구절을 대할 때 이제 우리는 병들 필요 없고, 저주받을 필요 전혀 없다

해석하는 것은 일면 맞다. 성도들은 성경을 몰라서 무작정 질병과 저주의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의를 요한다.

본질적으로 이미, 아직’already, not yet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완전히 질병이 없는 곳, 완전히 저주가 없는 곳 거기는 '미래 천국'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천국'에서는, 이미 질병과 저주가 패배했지만, 아직 살아있다.

(물론 우리가 질병과 저주에 너무 억눌려 종노릇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혼 구원과 아울러 '삶의 전 영역'을 구원하신다.)

 

다 끝냈다(이것과 함께 봐야 합니다)

It is finished! 19:30, 개역성경엔 다 이루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시던 모진 고통이 다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 피로 이루신 대속 사역이 다 끝났다는 뜻이다.

원어적으로 이 말은 상거래에 있어서 다 갚았다. 값이 다 치러졌다 paid in full"는 뜻이다.

더 이상 갚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들의 죄 값은 완전히 치러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는 모두 제거되었다. 이제 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접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진 것이다.

(인류의 죄 값은 다 치러졌다. 그러나 아직 마귀는 최후 심판 때까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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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십자가와 성공

 

진정한 성공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온다

성도는 이 땅에서 백 배의 축복을 받지만, 그것은 핍박(십자가)과 겸하여 받는다(10:30)

아직도 "큰 일 해야 된다. 크게 성공해야 한다"고 자꾸 설교하면 안 된다.

"십자가 지라, 희생하는 삶을 살아라, 비록 작은 일이라도 충성해라"가 옳은데...

큰 일하고 성공하라는 설교에 십자가를 통해서가 빠지면 소위 성공주의가 된다.

 

그렇다고 꼭 잡초같은 보잘 것 없는 패배자 인생으로 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엇으로 살든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희생하고 자원해서 십자가 지는 것이 복음이다.

좋은 대학 붙고, 상류층에 진입하고, 귀족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결코 아니다.

십자가(희생을 의미)를 뺀 성공과 비전을 외치면, 자기 생각이지, 기독교는 아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후에 커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13:19)

위 말씀에는 <땅에 떨어져 죽은 후에, 십자가 후에>라는 문귀가 생략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그대로 있으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와 병행해 보라.

믿음만 있으면 무조건 -십자가 없이- 열매맺으리라는 고정관념이 되면 안 된다.

(적극적 사고방식이 이런 십자가 빠진 성공을 주장한다. 십자가에 대한 강조점이 약하다.)

 

우리의 추구 방향은 성공적 열매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성공적 열매는 자연히 뒤따라온다.

 

내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주로 팔레스틴에서 왔다 갔다 하기보다는 더 멀리 애굽과 소아시아 너머로 인도까지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가시적 성과를 위해 초대교회 건물 건축도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한 가지 일은 빼 먹고 나서 애교로 봐달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포커스는 십자가였다. 그래서 4복음서에는 이 십자가 사건을

부피적으로 1/3에서 1/2까지 지루하리만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12:23)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초점은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굳이 성공을 말하고 싶다면(성공도 인생에 필요하다) ‘십자가를 통한 성공이다.

 

변질되는 복음

지금 우리는 성도들을 달래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도들은 성공의 메시지에 목말라하는데,

목회자는 십자가의 영광을 전하면 성도들은 풀이 죽는다.

그리고 오늘에 나올까, 내일이면 나올까하며 강단이 성공의 메시지를 회복해서

예배 시간에 힘을 얻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아무리 (세속적 의미의) 성공이 인간의 당면한 본능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마땅히 응답해야 할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라고 할지라도

자기 부인이 없는 자아 성취또는 십자가 없는 성공은 좌우로 치우친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최근 미국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속죄같은 성경 언어를 희석시킨 나머지,

예수를 자신의 행복과 자아 완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이같은 복음은 구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신다는 식의 기복적 신앙으로 치우치는데

이런 형태의 신앙은 미국의 텔레비전 (일부) 복음 전도자들이 널리 유포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 없다"고 외쳐대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라고

엄하게 질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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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십자가와 지식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바울이 편지를 쓴 고린도는 당시에 현란한 지식의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성 최고 주의로 살아가고 있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교만하게 할뿐이다(고전 8:1).

(무식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3:8)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그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다.

십자가 사상을 알고 그대로 사는 사람은 참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이요,

십자가 사상을 모르고 세상 지식으로만 사는 사람은 참 지혜와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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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십자가의 탁월성(십자가와 탁월함은 서로 모순 논리)

 

예수를 확실하게 만나면, 세상에서 머리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진다.

탁월하게 뛰어남보다는 <반대로> 되도록 무명하게 일하려고 애쓴다.

 

드러남보다는 사라짐을 좋아한다.

높은 자리보다는 낮은 자리를 택하며, '왕건'을 보며 흐뭇해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져도 별로 슬프지 않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탁월성은 -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것이다.

내가 스스로 탁월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낮아짐으로 남을 높이고

내가 가난해 짐으로써 남을 부요케 만들고

남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목숨을 건다.

남들이 안 하는 일들을 찾아다닌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external appearance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important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2:6-7)

-이것은 예수만 믿으면 세상에서 병신되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탁월함(다니엘, 요셉, 다윗 등)은 모두 십자가를 통해서나온 것이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탁월함은, CEO(최고경영자)의 탁월함인데, 그들에게서 배울 점들은 배우되

그것이 십자가만큼은 탁월하지 못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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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십자가는 고통의 동참

 

고통에 동참하시는 주님

모세가 마라의 쓴 물에 던진 나뭇가지는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십자가(나무)를 상징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이 세상에서 고통의 완전한 의미를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통 속에 간절히 기도하면 한가지 분명한 대답을 얻는다;

'!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같이 고통 당하시는구나!'

'하나님 아프고 힘들어요, 그렇지만 주님이 저를 사랑하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가난/질병/자녀 여러 문제로 고통을 당해서 괴로움을 토로하며 기도하면

비록 내가 원하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잔잔한 주님의 음성이 메아리친다;

'나도 너 속에서 함께 고통/모욕/슬픔을 당하노라...'

나는 주님의 십자가와 슬픔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주님은 나의 죄와 슬픔에 대해 같이 고통에 동참하시고 울어주신다.

 

십자가가 나를 변화시켰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나를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십자가라는 나무가, 목걸이가 나를 변화시켰는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내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신, 대신 감당하신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마라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엘림을 향해 힘차게 걸어간다.(15:22, 27)

 

탈북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선교사의 편지

우리가 사는 북만주 연변 땅, 두만강 변에는 눈도 많이 오고 춥기도 합니다.

으슥진 동네마다 먹을 것을 구걸하러 오는 탈북자들,

그들이 내민 때묻은 손,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모습, 초조함과 두려움의 쫓기는 눈빛,

그들은 불법월경자라 쫓기고, 우리는 선교사라고 쫓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쫓기며 함께 삽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이 쫓기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같이 먹고 같이 삽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가난한자들 앞에서 같이 가난해주고 아픈자들 앞에서 같이 아파 줄뿐입니다.

배고픈 자들에게는 먹을것이 꼭 필요할 줄 알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위로입니다. 사랑입니다. 더욱이 자기들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에 참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감격해합니다.

 

춥고 굶주린 자들, 병들어 버려진 자들 곁에 우리 선교사들은 다가서 줍니다.

주님은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려 주셨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들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님(자신들의 처지와 똑같음)을 보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목말라하시고 시장해 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먹고 같이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 목숨이 희생되어 많은 사람의 영혼을 건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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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십자가와 자기부인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기 때문.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16:24) <자기 부인>이란 예수님을 몰랐을 때 가졌던 세상적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속에는 부패한 옛 본성이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갓 낚은 갈치가 무섭게 날뛰는 것처럼, 내 안에 옛 자아의 소욕이 그대로 날뛴다.

이런 것을 죽이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즐길 수 없을 때가 많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다 수용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나님의 자녀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가운데,

신앙생활이 자기부인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다.

또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려는 분들이 왕왕 눈에 보인다.

'자기부인'보다는 '자기인정'하기에 바쁘고,

자기를 포기하기보다, 자기의 야망을 '성취'하는 데 신앙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무언가 <희생>을 치르는 것이 있는가? ", 그렇다"

신앙에는 십자가의 희생이 요구된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숨기려 하지 않으셨고, 솔직하게 제자들에게 드러내 가르치셨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의 귀에 듣기 좋은 메시지를 전하다가 십자가를 놓치고 있다.

 

"너희 집안 식구가 너희 원수가 될 것이다. 아비나 자녀나 아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4)

좁은 길을 바로 걸어가면서 신앙생활 하려면, 어떤 때는 인간의 정도 끊어야 한다.

날마다 내 남편, 내 자식이 우상이 된 사람은 신앙생활을 정상으로 못한다.

주님은 "값을 치러야 되는 것이 있다면, 가족이라도, 주저말고 값을 치르라" 하신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도 진실하게 더 잘 사랑할 수 있다.(우선순위 문제)

 

자기 부인의 거룩한 삶의 십자가에 영광이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이 말씀을 다르게 설명하면 "세상 사람은 성도를 우습게 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도 역시 세상에 대해 관심 두지 않는다"(우습게 안다)는 뜻.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라"(5:24)

성도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거룩한 교회와 성도에겐 영광이 드러난다.

성도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내고

세상과는 구별된 가치관과 영생의 삶을 추구할 때, 거기엔 존경과 영광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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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십자가와 기쁨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부지런히 땀 흘리고 뒤따라가는 자만이

황홀한 기쁨이 있다. 진정한 기쁨은 십자가 후의 기쁨이다.

지금 당장은 '넓은 길'이 쉽고 편하겠지만, 그 길의 끝은 기쁨이 아니라, 멸망이다.

성경에, 이런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5:2)

찬송가에도,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때 나의 <기쁨 넘치리라>"(5444)

십자가의 고난 중에도 이런 놀라운 황홀감 같은 기쁨이 있으면

그는 좁은 길을 가는 성도이다.

 

십자가의 웃음

예수님은 웃기 위해 사셨다. 구원의 웃음을 웃기 위해, 십자가를 참으셨다.

그 앞의 즐거움(기쁨, 웃음)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12:2)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서 눈을 감고 웃으시는 예수님이 그려져 있다.

진정한 웃음은 십자가의 희생 후에 웃는 웃음이다.

해산의 수고와 희생 뒤에 아기를 품에 안고 웃는 엄마의 웃음같은....

고로 오늘의 고생과 탄식을 비관하지 말자... 웃을 날이 바로 저기 코앞에 있는데....

 

십자가와 삶의 보람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삶의 보람이다. 물질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단기 선교 여행을 다니면, 잠 자리와 식사, 샤워 등 불편한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런 고생을 뛰어넘는 삶의 '보람' -복음 전하는 것- 이 있다.

고생중에 보람이요, 십자가 중에 행복이다.

 

이런 보람이 없는 인생은, 아무리 호사스럽다 할지라도, 거기에 행복이 없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비록 좋은 음식은 못 얻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얻었고, 믿음의 승리를 얻었다 이것이 보람, 행복, 성공이다.

 

물론 후에 하나님이 높혀 주셔서 총리가 되어서 좋다.

그러나 비록 총리가 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성공했고 삶이 행복했다.

예수님도 그 앞에 즐거움을 바라보시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참으셨다(12:2).

자기 소명을 찾으면, 일이 자연적으로 즐거워진다.

 

십자가와 찬미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26:30)

처절하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나아갈 때, 예수님은 아이러니하게 <찬미>하셨다.

 

주님도 마음속에 공포가 있었고, 할 수 있으면 그 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제자들과 더불어 <찬미>하셨다.

성도에게 고통이 닥치더라도, 찬미하며 나아가면

거기서 하나님의 숨은 뜻을 발견하면서 진짜 믿음이 더해진다.

 

장례식 때도 찬송을!

불신자는 장례식 때 한 맺힌 곡mourn을 읊조린다.

그러나 성도는 장엄한 찬송을 부른다.

김활란 박사는 "내 장례식은 축제와 같이 하라!"고 유언했었고,

김정준 목사는 '저 좋은 낙원이르니' 찬송을 부탁했었다.

 

김용식(전 장관)씨는 '인애하신 구세주여'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유언했었고

어떤 신앙인은 '참 아름다워라'만 부를 것을 당부했었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에서는 그 외 다른 찬송은 일절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부를 찬송은 무엇인가?

지금 살아 있을 때에도, 무슨 사망의 고통이 닥쳐도, 성도는 찬미하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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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십자가와 죽은 뒤 (부활)

 

죽은 뒤에 기대하라

선인의 사업은 그가 죽은 후에 더욱 번영하고

악인의 사업은 그가 죽은 후에 망한다.

사람의 선악은 그 사업의 계속성으로써 나타난다.

심판은 땅에서도 있고, (죽은 뒤에) 하늘에서도 있다.

 

죽은 뒤에 기대하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죽으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2)

 

일생은 씨 뿌리는 시기다.

씨의 열매와 수확은 그 뒤에 온다.

물론 생애 중에 올 때도 있겠지만, 생애 후에 더 확실히 온다.

 

죽음 직전에

죽음 직전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을 비로소 구분한다.

내가 어떤 집에 살았으며 무슨 차를 탔는지는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무슨 학교를 나왔으며,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졌는지 역시 중요치 않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구분도 시한부 인생, 임종의 순간에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 한다.

 

이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부귀공명의 권세도 모두 꺾어버린다.

그러나 우리에겐 현실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보다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죽음 이후에 더 잘 될 것을 생각하니 제 살을 꼬집어본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허무'할 수밖에 없었던 내 인생을 '의미'로 바꾸어주신다.

 

죽어서 성공한 사람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살아서 생전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진시황, ...

그러나 아브라함은 살아서 엄청나게 큰 성공은 이루지 못했지만(세속적 의미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은 후에 하늘의 별, 바다의 모레 같은 믿음의 후손의 복을 받았고,

오늘까지 영적 후손들이 온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죽고 나서 크게 성공했다.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별로 오래도록 일하지도 못했고(오래 살고 오래 일하는게 복인데),

세상 사람들 기준으로 실패한 사람으로서 십자가 형틀에서 죽었다.

 

그러나 죽어서 성공했고, 2천년 동안이나 세계를 영적으로 영원히 다스리고 계신다.

나폴레옹을 위해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예수를 위해 죽는 사람은 셀 수 없다.

우리도 -살아서 성공하되, 그것보다 - 더욱 죽어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절대로 죽어서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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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십자가는 영원한 긍정적 상징

 

한국인은 강한 부정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다른 민족보다 더욱 비난, 참소, 불평, 원망을 많이 한다.

또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형용사는 "없다"는 말이다. 돈 없다, 시간 없다, .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람을 통해서는 결코 일을 이루지 않으신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바리새인들과 시민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한 생명과 인격의 귀중함을 보셨다.

주님이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 우리의 가능성을 바라보시고 <긍정적>으로 보신다.

 

만약 부정적으로 보시고 발가벗기시면, 살아남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보실 때에도,

부정적으로 "이 죄인 창녀야"는 식으로 그 여인의 잘못만 꼬집어서 비난치 않으셨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시면서 조심스럽게 대화를 풀어나가셨다.

 

십자가는 영원한 긍정적 상징이다.

우리 모든 결점과 허물을 용서하신 십자가는 영원한 <긍정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다.

남들을 바라볼 때 부정적으로 모함하고 할퀴는 일을 버리자. 십자가 사상이 아님.

잘난 것, 잘된 것, 희망적인 것을 바라보고 힘과 용기를 주자. 십자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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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십자가는 윈윈 win+win 방식

 

세상의 생존경쟁 원리

세상에서는,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다. 웃을 때가 있으면 실망할 때도 오는 것이다.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철저히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미덕이다.

세상에서는, 소위 정글의 법칙이라고도 말하는 약육강식의 성공법이 지배한다.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밟고, 누르고, 선점하고, 기세로 눌러서 이기는 성공법이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문제는 - 내가 늘 언제나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존경쟁 원리의 최대 허점은소수의 성공자와 다수의 실패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람이 높이 올라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탑이 높을수록 뒷그늘은 더욱 커지게 된다.

 

우리 팀이 높이 올라갈수록 상대팀을 많이 밟는 꼴이 된다. 비록 원치 않았다 할지라도....

옛날에는 ‘80:20의 법칙이 있었다.(20%의 사람이 80%를 소유한다는 의미로)

그러다가 ‘90:10의 법칙이 나오더니, 최근에는 승자 싹쓸이법칙’=‘1:99의 법칙이 회자된다.

 

승자 한 사람은 좋겠지만, 나머지 99%의 모든 사람이 씁쓸한 패배자가 되는....

이것은 세상에서 살다가보면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방식이다.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결국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만들어낸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 경쟁 원리는, 틀렸다기 보다는, 최선의 원리는 아니다.

 

예수님의 윈윈 원리(2:6-11)

(여기서 윈윈win+win이란, 상대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것을 뜻함. 지는 쪽이 없음)

예수님은 상대를 높이고 살리시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고 죽으셨다(2:5-11).

그래서 상대가 높아지고 살았으니 - 상대는 윈win되었다.

그럼 예수님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심으로써 완전히 패했는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예수님도 부활을 통해 윈win하셨다. - 그래서 윈윈 원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법은 희생, 양보하고, 남을 성공시키고, 밟히는 사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내가 완전히 망할 것 같은데, 거기서 부활의 능력이 임해서 더 아름답게 성공한다.

 

이것은 정말 실력이 딸려서 죽은 패배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큰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시는 방식은 희생이셨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똑같이 잘 되고 성공하는 것에 대한 비전을 심고 가르친다.

목적은 서로 같더라도, 그 방법론은 서로 정반대다.

희생sacrifice없는 성공에 대한 강조는성공주의, 적극적 사고방식이다.

오직 희생sacrifice을 통한 성공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희생sacrifice"(죽음)을 통한 성공이다.

거기엔 패자가 없고, 모두가 승자가 되는 신비의 방식이다.

 

하나님 뜻대로의 신비

교회도 어떤 문제를 놓고, 부서간 또는 성도간 이익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될 때가 있다.

이 때 인간의 뜻대로 된 결정은, 시원한 쪽도 있고 섭섭한 쪽도 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그러나 모두 기도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결정을 내리면,

신기하게 모두에게 만족과 시원함이 있다. 윈윈의 결과를 가져온다.

나에게 좋은 것이, 상대방에게도 좋은 것이다.

패자가 없고 모두가 승자인 신비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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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십자가를 구하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17:1)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영광을 기도로 구하셨다.

우리의 영광은 희생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

남들이 회피하고, 등을 돌리는 일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예수를 아는 것은 -그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영광의 길' 임을 아는 것이다.

 

성 프랜시스의 두 가지 기도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허락하소서"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사랑을 제가 간직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이,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엄청난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핍박, 고난,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고행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신 명령에 순종해서 나간다.

요람에 편히 앉아서 은혜 내리기를 기다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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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십자가라는 말이 빠진 십자가 사상

 

성경에는 굳이 십자가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십자가 사상을 내포하는 말이 여럿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 십자가에 죽으면 많은 열매 있다는 비유적 표현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표현.

 

자기목숨을 얻는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목숨을 잃는자는 얻으리라”(10:39)

- ‘자기 목숨을 잃는것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

-내가 사망(십자가)해야, 거기에 생명이 저희 안에 나타난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능력으로 저와함께 살리라”(고후13:3)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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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십자가의 영광

 

십자가의 영광

지금부터 70년 전(1930년대) 미국 선교사 한 분이 한국에 오셔서 복음을 증거했다. 그 선교사는 한국말도 잘 못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를 겨우 외치는 정도였다. 그 더듬거리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한 새색시가 있었다. 그녀는 경상도 안동에서 시집살이를 살고 있었다. 새색시는 예수를 믿은 이후 자기 남편의 구원을 위해 10년 안에 남편이 변화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핍박이요, 잦은 구타를 당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3년만에 남편이 회심하고 돌아왔다. 일취월장 이 남편은 평양신학교에 자원 입학해서 졸업한 이후에 목회자의 길을 걸어갔다. 당시는 일제시대여서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터였다. 남편 목사는 그것을 거부하여 감옥에 갔고, 거기서 순교했다.

 

그들은 슬하에 3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어 섬기시다가 모 교단에서 총회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셨다. 둘째 아들의 아들(손자)은 지금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목사가 되었다. 셋째 아들의 아들(손자)은 현재 선교사로서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다. 1녀는 남편과 더불어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예수 때문에 잃은 것(십자가의 고난)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남편의 핍박으로 인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다. 일찍 과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부된 이후에 31녀를 평생 힘겹게 부양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 때문에 평생을 과부된 외로움과 궁핍가운데 살아야 했었다. 예수를 믿은 이후로 삶이 외형적으로 크게 안락(부귀 영화)해지지 않았고, 어쩌면 더욱 고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 때문에 얻은 것(십자가의 영광)

그 후손들을 통해서, 지금 한국과 미국과 세계에서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영향을 주는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 새색시의 십자가와 믿음, 그 일이 70년 지난 지금 수 백만 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복음 사역의 열매로 맺어지고 있다.

 

교훈

어떤 이들은 예수 믿음을 통해 세상 영광을 구하다가 십자가의 영광을 놓치기 쉽다. 비록 당대에는 안락하게 살지 모르나, 그들은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기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목표가 현세에 맞추어져 있고, 안락할수록 거기에 만족함을 얻기보다는 더욱 더 큰 안락함을 추구하는데 여력을 쏟아 붓기 때문이다.

 

정말 부러운 사람인가?

A자매는 세상에서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때는 원하는 대로 낳는다. 아들 바라면 아들 낳고, 딸 바라면 딸 나온다. 낳은 자녀들도 눈도 크고 준수하게 잘 생겼다. 또한 머리가 좋아서 유치원 다닐 때부터 공부는 얼마나 잘 하는지... 거기에다 남편도 키가 크고 얼굴도 미남인데다 돈도 잘 벌어온다. 성격도 좋아서 한 번도 구박하지 않고 도리어 부인에게 구박을 받는다. 거기에다 부모를 잘 만나서, 남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거금을 유산으로 상속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예배에 잘 나오지 않는다. 나와도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저 돌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기도 안 해도, 예배 안 드려도 모든 일이 만사형통 다 잘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평생 안락(평안하게 낙을 누림)하게 살지는 모르나,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 받기는 매우 어렵다.

 

B자매는, 반면에, 아기를 낳았는데 아무리 봐도 객관적으로 다른 집 애들보다 외모가 떨어진다. 그렇다면 공부라도 잘했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도 못 하다. 부모 복도 없어서 남편이나 자기나 둘 다 자수성가해야 될 형편이다. 유산은커녕 부모나 형제들이 자기들에게 손 안 벌리면 다행이다. 남편은 직장 생활이 위태위태하다. 신문에 나오는 억대 연봉, 몇 백 프로의 상여금은 먼 나라 얘기처럼 낯설게만 들린다.

 

*그러나.... 이들은 기도하는 삶을 산다. 부르짖는 삶을 산다. 환경의 고난가운데서 믿음의 연단을 받으면서, 더욱 위엣 것을 찾는 신앙을 갖게 된다. 이렇게 겸손히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결국은 나중 된 자를 먼저되게 하시는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처지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보다 환난이 더 많은 일을 한다

아무리 설교해도 변화 안 되던 사람들이 환난이 닥치면 비로소 변화된다. 그러나 환난 전에 깨우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환난 전에 깨우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환난, 고난, 연단을 통해서 몇갑절 더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이 참된 본질적 인생인가?’ -그것을 깊이 성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암에 걸려 1달 남은 사람은 밍크 코트 입고 싶다. 벤츠 타고 싶다그러지 않는다. “하나님, 제게 다시 한 번 건강을 주시면,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천국을 위해 살겠습니다를 소망한다. 우리가 늙어서 임종을 목전에 앞두면 대부분 그런 결심을 품게 되지만 때는 이미 늦게 된다. 그러나 환난을 당한 사람은, 젊어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진다. 결국 자기 젊음을 보다 본질적인 일에 투자하게 된다.

 

믿음의 조상들을 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 다니엘, 요셉을 볼 때 그들의 십자가의 영광, 고난 중에 믿음을 바라봐야 한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드렸고, 다윗은 양떼(사람)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다니엘과 요셉 모두 고난 가운데 십자가의 영광을 이룬 분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외적 성공만을 바라보다가, 그들 삶 속에 녹아있던 십자가의 고난(=영광)을 놓치면 안 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신앙의 조상들은 믿음으로 살았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은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비록 숫자가 적더라도, 날카로운 믿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나오면 만족이 있다.

...................................................................

 

 

18. 십자가는 거치는 것

 

1. 은혜로 구원받음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5:11).

바울은 십자가를 "거치는 것", 다시 말해서 걸림돌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고전 8:9, 10:32).

그런데 복음전파에 가장 장애가 되고 거치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의 형틀이었습니다. 여러분, 한국에서 사형 당한 사형수를 구세주요,

구원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사이비 교주로 믿기가 쉽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전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 그 사람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죽었고,

그를 고소한 사람만 수 백 명인데...?" 이렇게 당시에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정말 복음전파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예수님이 도덕군자로 죽으셨다면 아마 "거치는 돌"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못 믿을 사형수요, 죄인 예수를 당시에 구세주로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못 믿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부르시고 택해주신 사람들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비리가 많고 문제가 많다고 안 믿습니다.

일면 사실입니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자기 신앙에 '걸림돌'

된다고 교회를 안 다니지만(은혜 못 받은 사람),

 

그래도 어떤 사람(은혜 받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교회를 섬깁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에 걸려서 그만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2. 행위에 있지 않음

성경에 온전한 사람으로 욥을 꼽습니다. 그는 정말 실수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

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비록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14) - 그만큼 욥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 3인 중에 속했습니다.

 

욥기 31장에 보면, 그는 자기의 순전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따라하기

힘든 만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구원받은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욥처럼 순전하면 구원받는다.

아브라함처럼 아들바치면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율법'을 앞선다

다윗이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밖에 먹지 못하는 진설병(항상 드리는 떡)을 꺼내서 자기도

먹고, 함께 한 용사들에게도 주었습니다(12:4). 다윗은 명백히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위법 행동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목적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혜), 율법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인은 모두 죽는 형벌을 받아

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과 더불어 '은혜의 법'을 또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욥도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법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은혜로 일하는 사람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남은 생애를 '은혜'로 살아갑니다. '은혜'로 일합니다.

종종 우리는 잘나고, 똑똑하고, 부자되고, 출세해야 주님 일을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도 일할 수 있겠습니다만..., 거기에는 상대적으로 <은혜가 약화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약하고, 무식하고, 천하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망하고, 다 깨어진 가운데 일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화됩니다.>

욥이 주님 일을 가장 많이 했을 때는 그가 부자였고, 만사가 형통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쫄딱 다 망하고, 가정은 다 깨지고, 건강마저 다 망가졌을 때 - 그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흘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크게 전도도 못 하시고, 무덤 바깥에 나오지도 못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동안 무덤에서 그야말로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때에 네 심중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 무리를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와졌으며 사로잡혔으며 유리하였거늘 이 무리를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되었거늘 이 무리는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49:21)

자기는 완전히 망했는데, 신기하게도 무리가 양육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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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비참한 십자가의 위력(15:33-41)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입니다.

공자, 석가, 마호메트도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주이십니다.

 

1. 나의 십자가를(짐을) 대신 지신 예수님

 

밤새도록 혹독한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사형언도를 받고

곧바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됩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당시 십자가는 180근이나 되는 통나무 십자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난밤에 심문을 받느라 한잠도 못 잔 생태에서 로마 군인들의

채찍과 발길질, 그리고 십자가의 무게에 못 이겨 자꾸만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무겁고 힘든 십자가였던가요?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건장하게 보이는 시몬이라는 한 흑인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도록 했습니다(21-22).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신 지셔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져야 할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그 무거운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다 져주시는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그처럼 주일 예배가 기다려집니까?

또 다시 내 인생의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일 때,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찬송가)

 

2. 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이처럼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던가요?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담당시키셨습니다. 떠넘기신 것입니다. 53:5-6)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가,

죄인의 신분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점이 강조됩니다.

강도 둘, 그러니까 죄인들 사이에 끼인 똑같은 죄인의 이미지, 세 강도입니다(15:27).

완전히 영락없는 죄인의 신분으로 낮아지셨음을 각인시켜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쓸쓸하게 버림을 받습니다(15:33-34)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아들이 심판 받으셔야 하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아들의 애원을 외면하십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셨으면 중천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어두워졌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3:15)

예수님은 왜 이처럼 혹독한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가요?

그는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셨기 때문입니다”(1:29)

 

예수님은 나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다 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십자가 곁의 두 죄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23:39-43)

 

한 명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버림을 받고, 한 명은 예수를 믿음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한 명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정죄를 받고, 다른 한 명은 회개하므로 사죄를 받습니다.

한 명은 끝까지 믿음을 거부하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고,

다른 한 명은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됩니다.

 

파스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사람인데,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으로,

인간은 이 두 가지로만 구분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앞으로 어느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희망이 없는 죄인, 희망이 있는 죄인"

십자가는 사람을 두 종류로만 구분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와 구원받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와 용서받은 자,

회개하지 않는 자와 회개하는 자, 거듭나지 못한 자와 거듭난 자,

 

정죄를 당하는 자와 사죄를 받는 자, 버림을 당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지옥에 떨어지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는 자, 실락원의 인생과 복락원의 인생,

왼편에 선 자와 오른편에 선 자, 영벌에 들어갈 자와, 영생을 누릴 자!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한 여인은 버림을 당하고 한 여인은 들림을 받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휴거됩니다.

두 사람이 한 방에 누워서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올라갑니다.

 

너무나도 가까웠던 이 두 사람,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만날 수 없는 차이 ! 이 좁힐 수 없는 간격 !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결정 !

 

3. 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37-38).

예수님께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시니,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여기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1930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는 한 마디입니다. 테텔레스타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신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놀라운 확신을 표명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심판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마치 세상에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는도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M. Luther는 요한복음 316절을 축소된 복음(Gospel in miniature)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에센스 중의 본질입니다. 이 짧은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최고의 애인(greatest lover)입니다.

"세상을"최고의 숫자(greatest number)입니다.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최고의 수준(greatest degree). 자기 생명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greatest gift)입니다.

"주셨으니"최고의 행동(greatest act)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greatest invitation)입니다.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greatest simplicity)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할 죄수가 석방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greatest possession). 영생, 그 이상의 재산은 없습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가 묻혀있는 무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용서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W. Cooper는 십자가의 구원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이신론자가 무어라고 떠들든,

무신론자가 무어라고 헛소리하든,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구원의 능력이 있다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사랑의 증표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믿으며, 그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십자가를 사랑하며, 그 십자가를 기뻐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20. 이 마음을 품으라(2:1-11)

 

그리스도의 관점을 가져야

세상 사람들의 판단, 행동이 제각각 다른 원인은 -다른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관점이 잘못되면, 잘못된 판단과 행동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이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극단적 이념주의자의 행동이 나오게 됨

*대권의 관점에서 모든 일을 풀어나가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중요치 않게 됨.

지나치게 차기 대권에 집착하면 정치적 과오를 범할 가능성 크다.

*돈의 관점에서 모든 세상 일을 보는 판단,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결혼의 관점에서 판단/행동하는 적령기의 청년들이 있다.

-주변 사람들에겐 좀 지나치지만 본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학의 관점에서 -수험생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

*성공의 관점에서 -세상 병아리 부부들의 가장 공통된 가치관

 

가장 올바른 관점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

"너희 안에 이 마음(그리스도의 관점)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그럼 ?그리스도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자기를 비움(십자가 사상, 자기가 죽는 것)

*부부 불화의 본질적 원인

-자기를 비우지 않고 그저 대화로 해결하려니까 안 되는 것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려는데 핵심적인 문제가 있음.

 

*자녀 불화의 본질적 원인

-부모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려니까 안 된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하나님을 포기하시고, 종으로 변신하신 것이다. 인간이 되신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없으면 사랑의 실체는 없다.

사랑이란, 철저히 자기 부인, 자기 비움,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

 

그것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

 

*예수님의 모범

죽는 순간까지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심.

분하고 억울하다고 소리 지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기 당했다고 소리치지 말라 -세상이 그런 것.

사기 당할 때도 신사적으로 행하면 -나중에 사기꾼이 감동받고 전도 됨.

 

*몽둥이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 한다.

우리 민족이 변화되려면, 그리스도인들의 대가(희생)가 필요하다.

 

*죽되 조용히 죽자

예수님의 죽음은 초라했다. 시체를 앞장세워 정의를 부르짖지 않았다.

오늘날 예수님처럼 죽는 사람을 지나치게 영웅화시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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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학 피학의 대속 심리   http://blog.daum.net/rfcdrfcd/15978177


◑22. 그 외 십자가에 관한 짧은 글


교도소 전도 다니시는 권사님의 간증

교도소에서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짧은 형기를 살고 빨리 출소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더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사형에서무기로 감형된 사람이다.

 

무기수로 평생 교도소 담장 안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도 비통한 일인데,

그는 자기 생명이 연장된 데 너무 감격하고 기뻐한다.

사형 받는 날이 언제인지 몰라서 날마다 순간 순간 뿌리칠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떨며 살았었는데, 이제 그 공포가 떠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모두 지옥 영벌의 사형수 신세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우리를 사형무기로 감면이 <아닌>,

사형무죄로 감형해 주셨다. 우리가 어찌 크게 기뻐하고 기뻐해야 되지 않겠는가...

 

 

잃어버린 설교 제목들

오늘날 교회가 복음에 머무르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과 단절된 해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값싼 회개'를 통한 그릇된 구원의 안전,

심령의 본질적인 변화(회개)를 거치지 않은 '심리학적인 믿음'

구원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이는 복음서와 단절된 체 서신서 만을 해석함으로써 오류를 초래하고 있다.

복음서가 제시하는 복음의 주된 주제는;

"십자가, 부활, 심판, 회개,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 핍박, 지옥, 천국..." 같은 것이다.

현대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설교 제목들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화석화 되어가는 교회

점점 화석화되어가고 있는 중에서도 일부 교회들은 생명이 있는체 가장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항상 수많은 행사들을 주최하고, 여러 가지 내용의 현수막을 교회

바깥에 내걸기를 좋아한다. 교회는 사람들로 붐비고 기관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생명의 증거들은 좀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행사를 즐기지만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도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 없을뿐더러,

인격이 변화되며, 세상에 대항하고, 진리를 위해 싸워가는 전투적인 모습이 없다.

 

홉스와 니체가 끼친 반기독교 사상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고난의 의미를 철저히 부정했다는 점이다.

과거나 현재나 목사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특히 목사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고난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 기독교를 무능하다고 비판하기 쉽다.

특히, 기독교의 희생적 고난에 대하여 근본적인 무의미함을 주장하였고,

대신에 힘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토마스 홉스(1588~1679)는 객관적인 진리나 윤리를 부정하고

동물적 투쟁과 이기주의를 옹호했다.

홉스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이리?만인은 만인에 대한 전투?상태에 있다.

더 많은 소유와 쾌락을 얻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희생적 고난이란 약자가 당하는 패배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하나님의 죽음과 반도덕주의를 외치며

모든 전통적 가치와 규범의 전복을 시도하였다.

그에 의하면, 도덕이란 항상 당하고 패배하는 약자와 노예들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상은 모든 규범과 도덕을 거부하는 영웅적 인간이다.

강자의 횡포와 공격과 지배, 그리고 약자의 억압과 고통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다.

그는 이런 부조리에 대항해서 오로지 힘에 의한 지배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나라를 위한다고 훌리건처럼 난동을 부리면 안 된다.

힘을 폭력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일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힘을 기르되, 남을 섬기고 희생하는 방식으로 -죽음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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