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951ee968MqU
◈피학, 가학, 대속 심리 히9:22 영문번역
http://www.backtogod.net by David Feddes
CRUELTY, VICTIMHOOD, AND ATONEMENT (Date 03/17/02) 출처 휘발
▶아즈텍의 인신 제사
옛날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은 ‘인신 제사’human sacrifice의 악습이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 수 천 명의 포로들을 잡아와서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아즈텍인들은 포로들을 피라밋 꼭대기의 제단에 끌고 가서 산채로 불태웠다.
제사장들은 고통받는 포로들의 가슴을 갈라서 살아서 뛰고 있는 심장을 꺼냈다.
제단 주변은 피가 물처럼 흐르며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포로의 목은 잘려져서 몸체는 피라밋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머리는 전리품으로 보관되었다.
이토록 인간이 잔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학하는 아이들 - 타인에게 잔인함
위의 아즈텍 인들의 만행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양상은 오늘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학교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희생제물(왕따)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을 고문하고, 놀리고, 인격적 모독을 주며,
그 제물된 아이가 고통받아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며 오히려 웃고 즐긴다.
문제아들만 왕따 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나 인기 있는 운동선수같은 모범생들도 똑같이
다른 학생들을 왕따 만든다.
그들은 비록 아즈텍 인처럼 심한 육체적 고문을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희생자에게 인격적 모독과 고통을 가하는 본성은 똑같다.
청소년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괴로움과 불만족을
타인을 괴롬힘으로써 해결하려는 심리가 있다. 그렇게 타인을 학대하면서,
그 학생을 왕따로 만들면서도 그가 스스로 학대받을 원인이 있다고 뒤집어씌운다.
그의 말씨, 행동, 옷차림, 생김새가 특이하다며 괴롭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내재된 불만족과 괴로움을 잔인하게 남을 통해 해소시키는 것이다.
▶자학하는 아이들 - 자신에게 잔인함
많은 청소년들이 자학하며, 자해(自害)한다. 정신을 잃도록 까지 마약하고,
술 마시고, 성적 타락에 자신을 방임한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이 병들고,
인격적으로 파멸되며, 파괴되어져 가는 것에서 묘한 짜릿함을 느끼는 아이들도 있다.
또한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뚫기piercing 수술을 받으면서
고통 당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 동시에 즐기는 면이 있다.
거식증anorexia 역시 빼빼 말라 가면서 고통 중에 그 고통을 즐기는 면이 있다.
좀 색다르게 자신을 자학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환경과 지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공부를 하지 않거나 시험을 보면 틀린 답을 일부러 골라 쓴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자학>self-punishment의 한 형태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자격이 없다고 단정하며,
그런 고통을 겪으며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럴 만한 죄인이니까....
▶학대와 자학의 원인
위에서 우리는 ①‘타인에게 잔인한 경우’와,
반대로 ②‘자신에게 잔인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이런 잔인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뭔가 ‘자기를 무가치 하게 여김 unworthiness’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마음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속이 후련하다>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사상(롬 6:23)임과 동시에 인간이 보편적으로 타고난 일종의 본능이다.
자기 자신이 치르든지, 타인이 자기 대신에 치르든지, 그 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속이 시원하다.
자기 자신이 치르는 것이 ‘자학’이고,
타인에게 전가해서 치르는 것이 ‘가학’이다.
문제는, 인간들은 이런 타고난 정신적 생리(자학과 가학)에 의해
자기 삶이 끊임없이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실체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데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끊임없이 죄를 짓고 산다.
그리고 그 죄 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속이 후련해지고, 그대로 놔두면 마음이 시원치 않다.
그래서 나든지, 아니면 나대신 타인이든지, 누군가는 고통을 받아야 하며(죄값으로),
그래서 죄값을 치러주는 일(대속atonement)이 절실히 요구되어 진다.
아즈텍 인들은 포로들을 바침으로써 죄값을 치렀으며, 오늘날 청소년들은
자학과 가학의 형태로 끊임없이 자신의 죄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
▶대속 심리는 인간의 본능
이와 같이 죄의 값을 치러야 속이 시원해지는 ‘대속atonement 심리’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대속 심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족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atoning sacrifice이 되셨고,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셨다(요일 2:2).★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사람은 <따로 인간적 대속 제물을 찾지 않는다>.
곧 자신에게 자학하지도 않으며, 타인을 학대하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끊임없이 대속물을 찾는 인간의 본능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족시켜 주신 것이다.
▶가학대 만족증
이런 자학/가학적 심리는 청소년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 자란 성인에게도 나타난다.
자기 죄와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타인이 벌받게 함으로써 만족하는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다.
일이 안 풀리면 자기 부인을 구타하거나 자녀를 괴롭힌다.
특별히 동거남녀 중에 이런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부인에게 화를 내며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는 대속 본능(사업상 안 풀리는 것을 누군가 대신 죄값을
치러야 만족하는 심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분풀이 심리와도 매우 유사하다. 후배들을 자주 불러모아 군기잡는 선배,
학생들을 자주 체벌 주는 분들에게도 이런 심리적 불안정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학대는 하면 할수록 더욱 발전된다.
▶피학대 만족증
알콜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가 이런 부류이다.
자기 자신을 아무런 쓸모 없는 인간이라 여기며 술과 마약 중독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간다.
자기는 이런 구제불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느끼는데,
그 이면에는 죄값으로 고통받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 자체를 즐기는 심리가 있다.
신기하게도 알콜중독 부모를 만나 큰 고통당하며 자란 자녀들이 커서 알콜중독에 빠진다.
알콜 중독 남편을 만나 큰 고통당하며 살은 부인이 이혼하고 다시 알콜중독자를 만난다.
오랜 세월 속에 그런 피학대를 겪으면서, 그것이 습관화 되어버렸고 만족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 피학대 만족감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며 산다.
이런 사람에게는 피학대가 주는 만족감이 있어서,
끊임없이 자기를 고통 주는 사람을 찾아서 만나며,
고통받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본능적인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아무도 못 말린다.
(어떤 인문학자는 이방종교적 사제의 카리스마와 거기에 벌벌 떨며 모든 것을
바치는 신도들의 관계를 가학적-피학적 상관관계라고 관찰했다.)
▶(약한) 피학대 만족증의 여러 증상
이렇게 고통을 받음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심리는 실생활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안정적 직장과 보수에 늘 만족 못하는 사람이 있다.
직장에서 해고되고 수입이 없어서 허덕여야 거기서 묘한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돈만 생기면 도박을 하던지 해서 돈을 날려버리고 빚을 져서
고통을 당해야 비로소 만족이 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안정된 가정에 절대 만족 못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배우자가 잘못되도록 방임/유도하고,
거기서 생기는 부부지간의 불화와 갈등을 즐긴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평안한 삶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원치 않는다.
끊임없이 위기 상황을 조장해서 거기 당사자인 자기를 학대해서 즐기든지,
반대로 상대인 배우자를 학대해서 즐긴다.
그들은 자기가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여긴다. 그 죄값을 치러야 되는데,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속죄양을 삼는다.
그리고 자신이나 타인이 당하는 고통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즐긴다.
대속이 주는 기쁨과 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행하면서
그 원인은 모르거나 무시한다.
이런 사람들의 잘못된 행태의 표면 속에는 대속의 욕구가 숨어 있다.
즉, 죄와 잘못이 있는데 누군가는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심리다.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또는 타인에게서 죄값을 찾고 속죄양을 삼는다.
이런 피학/자학 증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예수께서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길 말고는 없다.
▶대속을 사모하는 문화
이러한 대속 본능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종교와 사회에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인간 또는 동물의 희생제물을 택한다.
또는 종교인의 자기학대와 고행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회와 모든 종교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남미 페루의 잉카 제국은 나라를 위해 어린이를 제물로 드렸으며,
아프리카 부족들과 태평양 섬 원주민들에게도
이런 인신제사와 인육 먹는 풍속을 찾아 볼 수 있다.
불교와 힌두교에도 이런 의식이 있다.
성경에 가나안 풍속에도 어린이 제사가 나오며,
이스라엘 왕이 이것을 본받기도 했다(왕하 16:3, 21:6).
오늘날 세상에 이런 못된 인신 제사의 풍속이 점점 없어진 것은
뭐니뭐니해도 기독교의 전파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현대에도 이런 풍습을 볼 수 있는데, 히틀러와 나찌는 독일의 모든 잘못된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덮어씌워 그들을 수 백만 명 학살하고 말았다.
일본이 관동대지진 때에도 한국인을 속죄양 삼아 수 없이 많은 한국인이 죽었던 적이 있다.
레닌과 스탈린은 러시아가 잘못된 모든 원인을
기독교인들과 자본가들에게 돌려서 수 백 만의 사람들을 학살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도 그 원인을 식자들에 돌려서 거의 인구 1/3을 학살했다.
모두들 대속 심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타인에게 돌린 결과였다.
▶참 대속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본능적 대속 심리가 있다.
자기 자신이 죄 값으로 직접 고통을 받거나, 그것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고통을
받게 하려는 본능적 심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것이 자학이나 가학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개인적인 자학이나 가학 행위의 참된 치료법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죄와 불행과 모든 잘못된 현실의 원인을
자기 또는 타인에게 돌려서 속죄제물 삼을 필요 없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대신 학대를 당하신 것이다.
그분은 내대신 채찍에 맞으셨고, 창에 찔리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고,
피 흘리셨다.
싸움을 하다가도 상대에게 피가 나면 죄 값이 어느 정도 치러졌다고 여기고
일단 공격이 중단되는 면이 있다.
이와 같이 피 흘림은 잘못을 대속한다는 본능적 지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성경도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말하는데 히9:22,
그것은 피 흘림은 사함(대속)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내대신 피를 펑펑 흘려주셨다.
이것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자신을 자해하거나 타인을 가학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흘리는 피는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완전하다면 한번 자학/가학하고 나서 만족을 얻고 그칠 것이다.
그렇지만 자학/가학하는 사람은 그 못된 행위를 계속 반복한다.
그 이유는 만족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예 자학/가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학대받음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세상 모든 죄를 대속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짐승의 번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단 한 번의 대속적 희생제사가 그 만큼 효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늘날 사회적으로도 계층간 민족간 갈등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자기들이 못 살고 불행한 원인을 다른 계층과 민족에게서 찾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불쌍한 인간을 속죄제물 삼을 필요가 없다.
테러리스트들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선량한 시민, 민간인을 속죄양 삼는 일을 관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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