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막15:34 06.04.09.
이성희 목사
▲대신 매 맞는 고통
미국에서 공부하다 아빠를 따라 한국에 귀국한 십대 아이는
소위 한국의 ‘단체 기합’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 한다.
‘저 학생이 잘못했는데 왜 아무 잘못 없는 나까지 벌을 받아야 되느냐?’
하소연한다.
맥스 루케이도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가 딸을 키우다 보면, 큰 분노심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러나 딸은 한 번도 아버지가 자기에게 분노를 품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딸을 데리고 뒤뜰로 나가서 거기 있는 나무를 보여 주었다.
원래 큰 나무였지만, 거기엔 밑둥치만 댕그라니 남아있었다.
“나는 네게 대한 분노가 일어날 때마다, 여기 뒤뜰로 나와
이 나무의 가지들을 꺾고, 자르곤 했다. 그래서 이제는 밑둥치만 남았다...”
하나님은 죄와 마귀에 대해 항상 분노에 차 계셨다.
하나님은 분노하셨을 때, 예수님을 치시고, 예수님을 자르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신 못 박아 죽게 만드셨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대신 받는 고통....
같은 고통이라도, 가중적인 고통이다.
▲하필 유대인으로 오신 고통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
키케로의 글에 의하면
“십자가라는 이름 자체는 로마 시민의 몸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눈과 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십자가 형벌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필 유대인으로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에 못 박히셔야 하셨다.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다.
아무도 없이 홀로 당하는 고통이야말로 가장 괴롭다.
고통이 닥쳐도, 같이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위로가 되겠건만...
‘고통’이 ‘고독’을 만나면 더 가중된다.
온 인류를 위해서 죽으시되, 아무도 같이 죽으실 수 없어서
혼자 외롭게 죽으셔야 했던 것이, 고통 중에 또한 가중되는 고통이었다.
또 아버지마저도 고개를 돌리시고 외면하셨을 때, 그 고통이란....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실 때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어렵고
인간 편에서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홀로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함께 산다. 갈 2:20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①예수님은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
거기서 학자들과 함께 성경을 변론하고 계셨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는 “얘야, 왜 이렇게 속을 썩이니?
우리가 사흘 길을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느냐?” 말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양친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눅 2:50
그 부모조차도,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남들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주지 못하는 그 심정...,
심지어는 가족들에게조차도 “미쳤다”고 단정 받는 그 고통
그것도 보통 고통은 아니었다.
②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수난을 예고하셨지만, 말을 해도 전혀 못 알아들었다.
하실 수 없어서, 예수님은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서 함께 수난을 의논하셨다.
③사랑하는 제자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셨다.
유다는 그가 메시야인지 몰랐다.
제자의 입맞춤이 도리어 배신의 표시였다.
(옛날에는 사진도 없었고, 그래서 누가 예수인지 잘 모르니까,
측근 유다는 자기가 입 맞추는 사람이 예수라고 찍어준 것이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당하는 괴로움 중에 하나가 이런 "오해"이다.
현지인들은, 선교사가 선교비 다 잘라 먹고 자기들은 굶긴다고 생각한다.
(선교사는 주고 싶어도 그들이 돈 때문에 타락할까봐 극도로 조심한다.
그들이 굶어도 안 되고, 타락해도 안 되는, 그 양쪽 중간에서 줄타기를 한다.)
중국 등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선교사를 배신하고 팔아 넘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선교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던 최측근이라고 한다.
교회 봉사 하는데도, 가장 어려운 것이 오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봉사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더 잘 한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외로우심과 오해받으심을 깊이
묵상하며 이겨나가야 하겠다.
▲“다 이루었다” 하실 때까지 죽음을 참고 기다리심
어느 목사님이 호주를 방문 중일 때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서둘러 일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셨다.
공항에서 병원으로 막 바로 달려가 보니 어머니는 혼수상태셨다.
큰 아들(목사님)은 이미 몇 일째 혼수상태로 누워계신 어머니께
“어머니 저 왔습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어머니는 누운 채로 갑자기 눈을 번쩍 뜨셨다.
그리고 큰 아들을 한참 쳐다보셨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시더니... 그 길로 소천 하셨다.
죽기 전에, 아들 얼굴 못 보면 죽지도 못하는 것이 어머니 마음이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절규하시지만
스스로 일찍 돌아가시지 못하신다.
고통이 온다고 마음대로, 무턱 대고 함부로 죽으실 수도 없으셨다.
모든 십자가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기까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예수님은 돌아가시지도 못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참으셔야 하셨다.
아무쪼록 이런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 부르시다가 “하나님”으로 불렀을까?
복음서에는 약 2백번 정도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나온다.
요한복음에만 약 1백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 로 부른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다.
이렇게 해서, 높이 엄위하게 계시던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친밀하신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 or 하나님
①겟세마네 동산에서는 기도하실 때는 “아버지여!”
아바(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막 14:38)
②십자가에 달려서는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시 22:1
여기서는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르셨다.
③십자가의 가상칠언 중 마지막 말씀을 보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나님” - 공적인 부름이다. 공적인 호칭이다.
“아버지” - 사적인 부름이다. 사적인 호칭이다.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공적 사명을 완수하시면서
또는 그 사명을 다 완수하시는 과정 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 외 사적인 기도에서는 “아버지”라 부르셨다.
▲옛날 조선 왕조 때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왕자들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면 왕자들은 돌아와서 조정에서 보고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 때 “아바마마”(아버지여!)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전하!” 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공식적 석상, 공식적 보고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들로서 간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신자격으로서 갔기 때문이다.
비록 친아들이셨지만, 십자가를 지실 때는
부자지간 그런 사적인 감정을 떠나서, 또는 배제하시고
메시야로서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아들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주님의 종이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사명 을 감당할 때에는
아들보다는, 종의 자리에 서야 한다. 예수님처럼!
아무 사례 없이 묵묵히 감당해야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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