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까이 고전2:1~2, 골1:20 2002/08/21 (52분) 스크랩, 출처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옥한흠 목사
원래 하나님의 은혜는 마지막이라는 거 같아요. 그렇죠?
엊저녁에 목사님 이야기 들으니까 벼랑 끝에 앉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는데
막바지에 이르면서 소낙비도 오고 성령에 불도 오고 막바지에 임하더라고,
하는 이야기 인상적인 이야긴데요.
저는 뭐 그런 경험이 없어 막바지에 오는지 일찍이 오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끝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임하시고,
또 우리가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져 있을 때 임하시는 것.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자주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저와 또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와주시기 바라고
우리의 영혼을 다시 한 번 새로운 자리에 세워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그 강의를 하시면서 우리는 항상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변질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짤막한 이야기를 한 마디 하고 넘어가는 것을
저는 아주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성령의 창조적인 사역에 의해서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성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맛보게 되어 있고,
또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이 있고 일이 있습니다.
그 뜻과 일이 일치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절대 변질되어서는 안 될 것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목사는 그렇게 변질이 잘 될까요.
왜 변질이 된 목사님들이 그렇게 많을까요.
나 자신을 돌아볼 때도 어떤 때는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내가 왜 이렇게 달라지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신학교 갓 졸업하고 대학생 하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이 영혼 바로 세우면 하나님께서 이 영혼 하나를 통해서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는 위대한 이적을 일으킬 것이다 하는 그 순수하고 소박한 비전 때문에
한 사람에게 매달렸던 내 자신이 교인 몇 만 명이 되고 나니까
나도 모르게 이상하게 변질되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는 것. 나도 모르게 변질되는 거예요.
전도사 시절에는 성가대 지휘자보다도 내 사례가 더 작았어요.
그것 때문에 집사람이 마음의 고통을 앓는 모습을 제가 보았는데요.
그것도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며칠 전 쉬는 사이에 옛날 일기장을 꺼내서 읽어보았더니
사례비를 정했는데 성가대 지휘자보다도 사례비가 적은 것 때문에
집사람이 속병을 하고 있는 이야기가 잠깐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때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사례비가 얼마냐에 대해서 신경도 쓸 줄 몰랐고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지도 않았고.
단순히 주님이 나에게 시키신 일을 위해서는 거지가 되어도 좋고,
남에게 욕을 먹어도 좋고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 하는 그 일념을 가지고 뛰었던 때가 있는데.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저 자신이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대형 교회 목사가 얼마나 변질되기 쉽다는 거 여러분이 잘 모르실 거예요.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나 하는 것도 여러분 잘 모르실 거예요.
진짜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을 혼자 다 받아 누리다가도
모자랄 정도로 유혹을 받는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기울어지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가치관이 달라지고 그래요. 그러다가 자신이 변질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인들을 끌고 가는 것은 큰 교회의 목사에게 식은 죽 먹기예요.
신약 성경말씀을 조금 접어두고 구약적인 성경 말씀에 무게를 두고
신도들을 휘어잡으면 목사는 대제사장이 되고
신도들은 다 대제사장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전락을 합니다.
그러면 제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못할 것 하나도 없어요.
한국에 보면 큰 교회가 아닌데 벌써 그렇게 변질이 되어버려서
구제 불능이 되어버린 목사들도 있더라고요.
제가 뭐 확인은 안 해봤지만 들으니까
목사님 차는 1억이 넘고 또 부인 차는 어떻고 딸 차는 얼마고
집은 연건평 400평이고 교회가 얼마나 되나, 교인 숫자도 몰라요 기껏해야 몇 천 명 되겠죠.
그 정도 몇 천 명 데리고 있는 교회도 목사가 변질되어 약간 이상하게 가버리고
또 성경 신학의 기초가 바르지 못해서 신약을 가지고 구약을 해석해야 될 사람들이
구약을 가지고 신약을 해석하는 엉뚱한 발상을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이상해져버리는 거예요. 그런 사례를 한국에서 한두 건보는 게 아니에요.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목회자들 중에 그런 변질된 목회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 이건 기가 막힌 현실이에요. 제가 이해를 합니다.
얼마나 유혹이 많다는 걸요. 얼마나 잘못되기 쉽다는 걸요.
얼마나 최초의 자리에서 빗나가기 쉽다는 걸 저 자신이 알고 있어요.
여러분 총회장하기 위해서 목사된 사람은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총회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인간적인 술수를 다 쓰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픈 거예요,
왜 저렇게 변질되었을까. 왜 저렇게 변질되었을까.
양떼들이 영적으로 갈급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그냥 모른 체하고는 날마다 정치판에 뛰어들어서 일주일 내내 돌아다니면서,
할 필요도 없는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고는
주일날 돌아가서 그저 적당히 설교에서 그저 자기 역할을 하고는
그 다음에 돌아가서는 또 옛날 버릇 그대로 하는 목사들 한 두 명이에요?
그 사람들 신학교 갈 때는 그런 마음으로 가진 않았을 거예요.
그 사람들 목사 안수 받을 때는 그들의 초심이 그렇게 엉망이었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그런데 어쩌다가 언제부터 저렇게 변질되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저 자신이 고민을 하다가 답을 얻었어요. 그 답이 뭐냐 하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십자가의 영성이 점점 흐려지니까 사람이 변질되는구나.
십자가의 영성으로부터 사람이 점점 멀어지니까 변질되는구나, 하는 것을
저 자신으로부터 답을 얻었어요.
십자가와 십자가의 주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나는 변질되기 쉽다는 것을 저 자신이 발견한 거예요.
십자가의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나는 변질되지 못한다는 것을
내 자신이 발견합니다.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오늘 우리 주변에는
십자가 영성과는 거리가 먼 많은 이야기들이, 화두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보다는 부활의 주님 쪽으로 강조를 더 두는 것이
기독교적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너무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신앙이 부정적이다, 하는 그런 혹독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십자가를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기보다
시대적인 상황, 너무나 권한의 권한을 점철하면서 역경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부활보다는 십자가 쪽으로 더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오늘 한국 교회 기독교가 이런 성향으로 빠졌다고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은 승리의 주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건강과 번영의 기독교를 가르쳐주는 주님이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런 면에 관심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도 어두운 이야기는 특히 싫어합니다.
현실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급적이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해도 성도들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목회자들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통해서 얼굴이 환해지고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하면 그 사람이 은혜 받은 줄로 착각을 하는 때가 참 많습니다.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될 부분은 하나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주님이 탄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눈을 감으려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지금 그런 것을 가지고 문제 삼느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백 프로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 우리는 찬양합니다.
그 분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분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항상 희망의 종교입니다. 미래의 종교입니다. 완성의 종교입니다.
능력의 종교입니다. 그것을 절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깜빡 깜빡 잊어버리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1950년대 여러분 이 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나 하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기성 교회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병든 자를 놓고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어요. 그것이 그 당시의 교회 풍토였습니다.
그럴 때 이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 병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결국에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 말씀 들고 나와서
믿으면 부자 됩니다, 믿으면 병 낫습니다. 하는 메시지를 던진 것에 저는 절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읽는, 또 그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30년, 40년이 지나고 나서 기독교가 기복 신앙을 앞세우는
좀 변질된 신앙을 저희가 보기는 합니다만 그런 부작용이 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 할 때
우리가 크게 잘못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요즘에 성공을 많이 논하는 기독교 안의 인사들, 적극적인 사고를 많이 논하고,
또 행복의 중요성, 개인이 인생을 즐겨야 하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 많이 하는 분들
한 번 가보세요. 그것이 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만
한 가지 결여된 것을 우리는 금방 느낍니다.
십자가가 빠져요. 십자가를 건너뛰어요. 이런 경향들이 목사를 자기도 모르게 변질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뭐라고 하실까.
◑사도 바울을 우리가 가만히 연구해보면요. 사도 바울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인 못 할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부활 신학일 것 같은데,
부활 신학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 신학입니다.
그의 구원관을 한 번 보세요.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말씀이 바울의 구원관의 중심입니다. 십자가에요.
그리고 그의 성화 론을 한 번 보세요. 바울의 성화 론을 보면
로마서 6장 1절 이하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우리의 성화를 이야기하는 가장 중심적인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이게 바울의 성화 론이에요.
여러분 바울의 교회 론을 알고 계시죠? 바울의 교회 론의 중심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갑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이게 바울의 교회 론입니다.
십자가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바울의 교회 론이에요.
바울의 세계관을 여러분이 한 번 보세요.
바울의 세계관은 에베소서 2장 16장 또 1장 10절 보면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 되게 하는 것이 바울의 세계관이에요.
십자가 빼놓고는 바울의 세계관을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검토를 하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목회 관을 우리가 보면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그가 어떻게 목회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날마다 눈물이고 날마다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권리조차도 요구하지 아니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것이 바울의 목회입니다.
십자가 빼놓고는 바울의 목회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는 성공을 떠벌리지 않았어요.
적극적인 사고를 떠벌리지 않았어요. 인생의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복을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 듣기 싫은 이야기를 피하지 않았어요.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교인들에게 유익하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말하는 것을
절대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울의 목회관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그 목이 날아갈 때까지 그는 변질되지 않았어요. 십자가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십자가 신학은 바로 십자가 영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신학이 베이스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영성은 항상 십자가의 영성이었음을 금방 우리는 말씀을 보면 다 압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2장 1절 이하를 보세요.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그 말을 우리말로 바꾸면 밤낮없이 바울의 생각은 십자가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있었다는 겁니다.
모든 사고의 중심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울의 영성이에요.
빌립보 2장 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임을 압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다 거부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주님.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복종하신 주님. 그 분이 바울의 영성의 중심이었어요.
그 주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울의 영성이었어요. 자기를 철저히 비우는 것.
그리고 낮아지는 것.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이것이 바울의 영성의 중심이었는데 그게 뭡니까 십자가였어요.
골로새서 1장 20절 보세요,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의 영성이 뭐에요? 목회자로서의 영성. 십자가의 고난을 계속 짊어지겠다고 하는
의지와 각오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성이에요.
이와 같이 십자가의 영성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요,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요, 철저히 그 앞에서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의 영성이었는데
바울은 바로 이 영성을 가지고 그는 한 평생 하나님 앞에 충성하다가 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못 박았느니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자기 이야기 하는 거예요. 바울이 자기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영성과 바울의 십자가의 영성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우리가 젊은 여기 후배 교육자들.
여러분이 지금 듣고, 또 강의 듣고 생각하는 영성은 어떤 스타일의 영성입니까. 어떤 성격의 것이에요.
그 영성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조심하세요, 십자가가 빠진 영성은 반드시 그 목회자를 변질시킵니다.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변질시킵니다.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변질시킵니다.
결국은 주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자리까지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지나치게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는 것을 굉장히 우려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미국 교회 목회자들의 정신적 또 신학적 또 사상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교회는 3, 40만개가 되는 교회 중에서 불과 1프로 밖에 안 됩니다.
왜? 기라성처럼 떠오르는 몇 개의 교회를 통해서 그것이 모든 미국 교회를 대표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고, 그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이 써낸 책들을 통해서
우리는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받는 일들이 많아요. 그 분들이 훌륭합니다.
정말 우리와 비교되지 아니할 만큼 경건합니다. 그건 제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은 여러분 미국이라고 하는 배경을 우리가 놓고 볼 때 우리가 미국 교회를
무조건 따르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입니다.
성경적으로 바른 해석을 한다고 해도 미국 교회 목사들은 자기의 상황을 벗어나서 성경을 보지 못합니다.
그 상황에 자신들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난 반 세기동안
그 본토의 어떤 전쟁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부를 누리고 살아왔지 않습니까.
GNP를 따지면 우리나라와 한 5배 차이입니다만 축적된 부를 따지면
우리나라와 20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나라 아닙니까. 그 나라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굉장히 실제적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계산적입니다. 상당히 인간적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해도 잘못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 비해서 굉장히 인간적이에요. 현실적이에요.
그들의 책을 보면 알아요. 그러므로 어떤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정면충돌하는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자주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 배경 때문에 성경을 보는 안목이 우리와 다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습니다.
비교가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면
미국 사람들보다 미국 교회 목회자들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의 영성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우리 쪽이 훨씬 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가르쳐야할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우리는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오만가지 프로그램 오만가지 좋다하면 다 끌어다가 한국 시장에서 장사하는
그런 상황이 돼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하게 비판하고 분석해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온갖 잘못된 것에 오염 돼 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요, 우리의 사고입니다.
우린 말씀을 주목해야합니다. 우리가 미국 교회 목사들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진짜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기 때문에
그 영성은 고난이 무언가를 아는 우리를 통해서 그들이 배워야 돼요.
한국 교회를 통해서 미국 교회가 배워야 돼요.
◑저는 이용도 목사님에 대해서 젊었을 때도 관심을 가졌습니다만,
최근에 감리교회에서 그를 복권시키고 나서 그에 대한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짧은 33년의 생애에 마지막에서
약간 좀 너무 교회로부터 반발을 받으니까 참 아쉬운 부분이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분의 중심은 정확합니다. 한국이 낳은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탁월한 목회자입니다. 부흥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에 대해서 연구한 자료들을 좀 검토할 필요가 있어요.
비록 시대는 그때와 지금이 너무나 다르지만 십자가를 이해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 분에게 배워야할 것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깊지 못해요.
그래서 그 분의 글을 읽는 중에, 그 분이 그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권력을 휘두르던
구라파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기도하는 스타일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제국주의는 맘몬의 손에 들어가서
부정한 환희의 춤을 추고, 전쟁 욕, 권세욕, 소유욕, 세에 만연한 구라파의 노변에서
잔치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주님, 저 구라파 천지에는 당신이 유하실 곳이라고는 일간 두옥도 남지 않았습니다.
보시옵소서. 그리스도여, 발길을 돌려 이리로 오시옵소서. 아시아에서 당신의 처소를 잡으시옵소서.
참, 그 말씀에 뭔가 있잖아요. 우리 한국 지도자들이 고난의 역사를 점철하면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그 은혜의 폭은 다른 그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어요.
그 대표가 바로 이용도 목사에요. 주님이 유럽에 거처할 곳이 없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미국에 주님이 거처할 곳 하나도 없습니다. 오시옵소서. 주님 한국으로 오시옵소서.
그만큼 그는 무언가 긍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영성에 있어서 이 긍지마저도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나.
무언가 너무나 싸구려 기독교를 우리는 선호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벌써 염증을 느끼고 돌아서는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내 교회만 조금 부흥하면 천지가 더 잘되는 것처럼 착각해버리는 환상에 젖어있지 않는가.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 변질된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십자가의 영성으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탐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자꾸만 높아지려고 하는 그리고 대접받으려고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요.
남하고 비교하면서 자기를 자꾸 비하하고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조금만 무엇이 잘 되어도 자기 자랑하기 바쁘고 유명해지려고 하는 이 본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겉으로는 신학으로 옷을 입히고 겉으로는 아름다운 이론의 옷을 입혔지만 속에 들어가 보면
그것은 주님의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
이 변질된 모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성도를 위해서 희생하려 하고 성도를 위해서 자신을 던지려고 하는 자세보다는
어떻게든지 성도를 이용해서 자신이 좀 더 기쁘게 즐겁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려고 애쓰는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이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다 십자가에서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변질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나 사이에 지근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으로
항상 우리는 죄를 가지고 재야합니다.
나하고 십자가의 주님과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얼마나 될까. 얼마나 될까. 이건 영적인 거리입니다.
얼마나 될까. 가까울수록 더 좋겠죠. 더 가까이 갈수록 좋겠죠.
그러나 거리가 멀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는 거.
베드로가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다가 나중엔 완전히 실패하는 것처럼.
무리 없이 십자가에서 거리가 멀면 멀수록 실패할 확률이 많고 시험 받을 확률이 많고
주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릴 확률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날마다 나와 주님과의 십자가의 주님과의 지근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것을 매일 한 번씩 점검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훗날 우리를 만났을 때 너의 믿음이 얼마나 좋았느냐 이것 따지지 않는 거 성경 보시면 알잖아요.
기도 얼마나 했느냐 그거 따지지 않는 거 아시잖아요. 주님이 보시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 아시잖아요.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라고 했지, 부활의 주님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어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걸어가면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 니라고 말했어요.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라고 했지 다른 길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와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안타까움을 자주 느낍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현실적인 실천 사항이 있어요. 두 가지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교회 갱신을 하자고 하는 정신이 어디 있습니다. 무엇이 교갱(교회 갱신)입니까.
난 이제 교갱의 일을 하다가요, 어떤 면에는 좀 한계에 부딪힌 거 같아요. 끝이 없어요.
현실적으로 문제되는 일을 씨름하려니까 제 옷이 전부 더러워지는 걸 봅니다.
씨름할 수가 없어요. 점점 나이가 젊어질수록 사람들은 더 악랄해지는 것을 봅니다.
옛날의 목사들 정치하는 사람들 그렇게 악랄하지 않았어요. 순진한 데가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 40대 50대 초반의 목사들 얼마나 악랄하고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상대를 할 수가 없어요. 점점 어둠이 우리 주변을 덮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에요.
저 사람들이 신학교 갈 때는 저러려고 가지 않았을 텐데 어쩜 저렇게 변질되어버렸나 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요즘에는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어떤 목사님의 이름을 듣고 나도 모르게 기도하게 되요 너무 안타까워서요.
그런데 그 사람들 일일이 데리고 싸워야 갱신이 되니까, 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갱신하자고 모인 우리 목회자들도 저 자신부터 시작해서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이러다가 오늘날 합동 교단이 어디로 갈 지 잘 모르겠어요.
제비뽑기 하나 실행해서 이제는 총회장 선거풍토는 조금 정화가 되는 것 같으니
거기에서 이제 재미가 없으니까 상비부 쪽으로 막 몰려가지고 거기서 막 무조건 돈 쓰고
이래가지고 지금 막 한 마디로 말하면 엉망을 치고 있는 지금 상황을 여러분이 다 깊이 모를 거예요.
끝이 없어요, 끝이 없어요. 왜 이렇게 교회가 변질되고 지도자가 변질되었는지 끝이 없어요.
◑십자가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실천하자고요.
첫째는요, 날마다,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합시다.
어떤 것보다도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도 아니하고 자랑하지도 아니하고
말하지도 아니하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그 십자가의 주님 앞에 매일 서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서는 연습을 해야 돼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을 마음에 두고
그 분을 생각하고 그 분이 오라고 하는 길을 다시 한 번 귀담아 듣고
그 분이 가라고 손가락질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확인하고 하루하루를 시작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영성을 가져야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나도 바울처럼 마음을 철저히 비우기를 힘써야 하며,
낮아질 대로 낮아져야 하며,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며,
나중에는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내 생명도 아끼지 않고 희생해서
나는 죽고 교회는 살고 나는 죽고 예수가 살기를 소원하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매일, 매일을 살면 우리가 변질될 수가 없어요, 믿습니까.
여러분. 제가 찬송가 중에서 크로스비 찬송을 참 제일 좋아합니다.
페니 크로스비 찬송을 좋아하는데, 그 분의 찬송가 중에서
이 십자가를 날마다 가까이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부르는 찬송가가 몇 개 있죠.
십자가로 가까이 Jesus keep for me near the cross라고 하는 이런 찬송,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인도하옵소서. 왜 그런 찬송을 이 거룩한 시인이 계속 이야기합니까.
왜 계속 가까이 십자가로 가까이 인도해달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우리가 그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219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우리나라 가사는 번역이 정말 잘못됐어요.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가오니, 내가 간다고 되어있지 않아요.
원문에는 draw me draw me, 나를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주옵소서,
주님이 피 흘리신 고혈의 십자가 앞으로 나를 이끌어주옵소서.
가사가 그런데 우리나라 가사는 엉뚱하게 거꾸로 번역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경건한 시인이 왜 날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나를 draw me, draw me to the cross. 왜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합니까.
그만큼 경건하면 됐지, 그만큼 주님 앞에 살면 됐지, 뭣 때문에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가까이 인도해달라고 기도합니까.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명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지 아니하고 그 분 앞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없이는
어떤 거룩한 것도 잘못되고 어떤 선한 것도 부패한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거예요.
◑두 번째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하는 위대한 선배들, 동료들을 다 마음에 두고 자기와 비교하세요.
이건 실제적인 비교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부산에 있는 모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그 때 함부선 선교사님이라고 미국 정통 장로교회에서 파송 받아서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에서 선교를 하셨던 참 훌륭한 분이 계세요.
그 분 가족이 나와서 특송을 하는 것을 지금도 저는 생생히 기억해요.
그 특종에 특송한 찬송가는 이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마지막 절은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그 선교사님 부부와 딸 둘 아들 하나 서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왜 그 십자가의 찬송을 특별히 선택해서 불렀을까? 그 어린 나이에는 제가 미처 몰랐어요.
그러나 점점 제가 나이가 들고 신학을 하면서 그 때 그 반가웠고
은혜 스러운 장면을 마음에 떠올릴 때마다 그 선교사님은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살았구나.
그랬으니까 일제 시대에 선교사들을 다 추방할 때도 이 선교사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평양 감옥에 갇혀서 옥살이를 했죠.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때 그분이 은퇴하신 다음에 저를 찾아와서
같이 인사를 나눈 일도 있습니다. 옥중에도 갈 수 있었어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주님을 위해 끝까지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국 교회에 심어주었어요.
이런 위대한 선교사들, 뭐 세상 적으로 말하면 함부선이 누군지 아는 이가 누구 있겠어요.
그러나 주님 앞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런 분들과 나를 비교하는 거예요.
자꾸 비교하면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나 하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어요.
저는 지난 번 일본 목회자 세미나를 안성수양관에서 했습니다. 제자 훈련 세미나죠.
그래서 일본 목회자들이 사십 몇 명인가 왔는데요. 한 주간 세미나를 마치고
우리 교회의 주일날에 와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기다니 신죠라는 목사님이에요.
그런데 그 부부가 제 사무실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가 얼마나 마음으로 감동을 받고 또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일본 목회가 얼마나 어렵다는 거 아시죠. 그런데 이 신죠 목사님 사모님은 의사 딸이었습니다.
지금 나이가 이제 육십 넘어가는 나이들입니다. 의사 딸인데 자기가 그 가정에서 제일 먼저 예수 믿었대요.
자기 집안은 300년 불교 전통을 가진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예수 믿고나 서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가정에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했는지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가 예수 믿었어요. 그리고 자기 오빠가 예수 믿었어요. 자기 남동생이 예수 믿었어요.
그래서 3남매가 다 예수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 믿고나 자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 목사 되는 거 아니에요.
자기 오빠도 아버지처럼 의사되는 것 포기하고 목사 되가지고,
지금도 일본의 시골에서 한 삼 사십 명 데리고 목회하고 있고,
자기 남동생도 시골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데 한 삼 사십 명 데리고 목회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는 딸인데 목사에게 시집갔어요, 그리고 그 신죠 목사님이 목회하는 데는 동경이에요.
그리고 그 목사님이 그래요. 지방에서 목회하다가 한 50명모이기에,
몇 년 해가지고 50명 교회가 되어서 이것 참 할 만하구나,
이럴 바에는 도시에 가서 마음껏 복음을 전해보자 하고 동경으로 옮겼는데 목사님 참 안되네요.
이러면서 씨익 웃어요. 얼마나 목회하기 어렵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일본에서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선교사와 목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내버리는 가구를 주워가는 사람이 있으면
목사 아니면 선교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말로 일본은 산 순교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목회 안하면
할 수 없는 그런 길을, 의사의 아들딸들이 걸어간 거예요. 제가 그런 일을 놓고 제 자신과 비교하는 거예요.
내가 저런 처지에 있었다면 정말 목사가 될까. 그리고 저렇게 행복한 모습을 가지고
교인 50명을 데리고도 주님 앞에 행복해할까. 자꾸 비교해요 여러분 비교해야 되요.
비교할 사람 저 주변에는 너무나 많아요. 저는 날마다 그 분들과 비교합니다.
내 사무실에 찾아오는 선교사들을 앉혀놓고 저는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요.
OM선교회 총재되는 조지 버워은 저하고 동갑입니다. 그 놀라운 위대한 정말 선교사 아닙니까.
그 분이 와서 한번은 그러더라고요. 자기 아내하고 둘이서 차를 타고 오는데 아내가 옷을 샀다고 그러더래요.
돈이 어디서 생겼냐고 했더니 누가(한국 교인이) 용돈을 주어가지고 옷을 하나 샀다고 그러더래요.
무슨 옷을 샀는데. 새 옷을 샀죠. 새 옷 샀다는 통에 선교사가 뿔이 났어요.
그거 중고품을 사면 그만큼 돈을 남겨가지고 선교하는 일에 보탤 수 있을 텐데
새 옷 입으면 뭐하고 중고 옷 입으면 뭐하냐.
이래가지고 차 안에서 부모님이 티격태격 싸웠다는 이야기를 나하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타락한 목사 중의 하나로 생각이 되어서
이런 위대한 선배하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 위대한 사람하고 나하고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나.
그럴 때마다 나를 자꾸 보는 거예요. 자꾸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로부터 주님 을부터 안 떨어지려고 멀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자꾸 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필요해요.
◑저는 이번 여름에 좀 쉬면서 짐 엘리엇이라고 하는 위대한 선교사 부인이 쓴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참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짐 엘리엇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이번에 처음으로 제가 자세히 접했어요. 짐
엘리엇은 휘튼 대학에 우수한 학생으로 졸업을 했어요. 그리고 선교사를 지망을 했습니다.
에콰도르로 갔습니다. 에콰도르로 가서 선교 사업을 아주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데,
그 에콰도르에는 무조건 사람을 만나면 죽이는 일종의 살인 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아우카 부족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백인과 접촉해서 백인이 살아나온 예가 없어요.
야자나무로 만든 긴 창을 가지고 무조건 찔러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는 정글 속으로 도망가 버리면 잡을 수도 없어요.
그 숫자가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어요.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흉악한 족속인데,
그 족속에 대한 이야기를 대학 다닐 때부터 들었는데 그는 그 때부터 마음에 빛 된 감정을 가졌습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단어도 없는 부족,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은 그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하나님 앞에 날마다 그 족속에게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일기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와 이런 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비교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짐 엘리엇이 다가간 십자가와 자기와의 지근거리와 내가 지금 서 있는 나 자신과
십자가의 지근거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 말입니다. 일기장에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 저를 어서 아우카 족에게 보내주소서. 아버지 제 생명을 취하소서. 주의 뜻이라면 제 피를 취하소서.
주의 삼키는 불로 제 피를 태우소서. 제 것이 아니기에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 가지시옵소서. 다 가지시옵소서. 제 생명을 세상을 위한 희생으로 부으소서.
피는 주님의 제단 앞에 흐를 때만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의 것이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 찬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저의 기도와 이 사람의 기도는 너무나, 너무나 거리가 멀어요.
이런 기도를 계속 하다가 드디어 그는 친구 네 명과 함께 조그만 경비행기로 아우카 족이 살고 있는 곳을
정찰한 다음 그 아우카 족이 살고 있는 정글 옆에 모래톱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강이 흘러가는 강가에 모래톱이 있었어요. 저기다가 비행기를 강제 착륙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기 부인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부인이 그런 말을 했어요. 남편이 문을 열고 나갈 때 직감적으로 '저 남편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두 살짜리 딸이 있어요. 배 안에는 아기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하려고 친구 네 명과 경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래톱에 경비행기를 강제 착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제가 읽었습니다.
자 이제, 비행기 뜨기는 틀렸네. 톱이 짧아가지고 비행기를 다시 띄우려면 활주로가 좁아서 뜨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물이 아주 기적적으로 빠지길 기다리던지.
아니면 여기서 걸어 나가던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판단했습니다.
거기에 내려서 나무 위에 주거할 수 있는 집을 지어놓고는
아우카 족이 나타나기를 하루 이틀 삼일, 나흘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아우카 족들이 나타나서 네 명을 완전히 죽여 버렸어요.
나중에 유복자로 남아 있는 그 분의 아들이 선교사가 되어서
아우카 족을 위해서 선교사로 다시 사역을 시작한 것을 제가 읽은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자기와 비교하는 대상이 누구에요. 사랑의 교회 옥목사 입니까.
여러분 누구를 비교하는 거예요. 큰 교회 가졌다고 해서 많은 사람에게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벌써 우리 자신이 누구와 나를 비교하느냐가 나 자신이 지금 제 위치에 서느냐 서지 않느냐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에요.
십자가의 길을 가급적이면 가까이 따라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여러분 옆에 놓고 비교하세요.
그러면 자주 자주 내가 얼마나 변질되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속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두 손 들고
다시 방향을 바꾸고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내가 건전하게 마지막까지 칭찬받을 수 있도록 살까 말까인데
그것마저도 포기해버리고 우리가 되는대로 생활한다면
나중에 여러분 주님 앞에 가서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서 있을 거예요.
저는 소문난 교회의 목사된 것을 굉장한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큰 교회 된다는 것을 머리에 넣어두고 생각한 일이 없어요.
그저 제자 훈련 착실히 해서 한 사람이라도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평신도 만든다는 이 꿈 가지고 지금까지 25년을 걸어왔는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공간도 없는 교회에 자꾸 사람을 보내주는 지 알 수가 없어요.
저는 솔직히 싫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많아질수록 한 영혼에 대한 가치가 자꾸만 내 눈에서 사라져요.
그리고 쓸데없는 칭찬 많이 들어요. 나는 이런 거 싫어요.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세상에서 상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 오면 상관없다고 했어요.
짐 엘리엇 같은 사람, 스물아홉 살에 세상 떠났어요. 아니 스물여덟 살에 세상 떠났어요.
스물여덟 살에 아우카 족 하나 구원하려다가 세상 떠난 이 사람이 주님 앞에 가서 받는 상하고,
내가 받는 상 여러분 비교가 되겠어요. 나는 세상에서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이렇게 많이 받아서 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벌거숭이가 될 확률이 굉장히 많아요.
그렇다고 제가 내 입장을 다 포기해버리고 어디 도망도 못 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 큰 교회라는 것은 너무너무 무거운 십자가에요.
나를 변질시키기 마침 좋은. 너무나 좋지 않은 환경이에요.
그러므로 저는 저보다도 앞서가는 사람 저보다도 더 주님 가까이 바짝 다가가는 형제자매들을 볼 때마다
그분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그분들과 저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어떤 사람으로 서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에요.
여러분 이거 믿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영성을 회복합시다. 십자가의 영성을 회복합시다.
이것이, 이것이 교회 갱신의 지름길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작아서 고생하는 것을 가지고
여러분 그것을 마치 불행한 것처럼 생각지 마세요.
여러분이 목사기 때문에 동창에 비해서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복음 바로 전하려다가 사람들로부터 욕먹고 여러 번 배척당하는 일 있어도
여러분 그것을 가지고 안타깝게 여기지 마세요. 그것이 다 주님이 가신 길이에요.
오직 십자가의 길을 따라 주님을 본받으려고 하면, 그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실 때는 정말로 엄청나게 은혜주실 때가 많아요.
위로하실 때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위로합니다. 안될 것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잘 되는 일들이 생겨요.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말이 맞아요. 하나님의 은혜만 역사하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엊저녁에 정 목사님 설교 들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뭐든지 가능해요.
그러나 우리들의 자세가 발로될 때 은혜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 뒤를 따라가려 하는 순수한 마음가짐 가지고
나의 십자가의 영성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거기에는 은혜의 샘이 솟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의 삶과 사역에서 매일매일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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