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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을 새롭게

LNCK 2020. 7. 2. 17:36

▣ 심령을 새롭게                               엡4:17~24                       2002.01.06.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설교

 

 

▶성전, 성소, 지성소

바울의 신학을 연구해보면 인간을 상징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뜨락(마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코 지붕 덮힌 건물 실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 전부 마당에 서서 예배드리는 거지

성전 안에 와서 예배드리는 게 아닙니다.

 

가끔 가톨릭에서 신년미사 같은 거 할 때 봐도 마당에서 서 있지 않습니까?

마당에서 예배를 드려요. 이게 성전입니다.

 

성전 뜰이 성전이고 그 다음에는 그 성전 뜰 안에 성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성소가 바로 제사들이 드리는 기구가 있고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 곳입니다.

 

이게 성소고, 그 다음에 성소 안에 지성소라고 있습니다. 거룩한 중에 더 거룩한 곳이다,

그 지성소,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습니다.

 

▶몸(성전), 혼(성소), 영(지성소)

성전 안에 성소, 성소 안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몸이라는 것이 있고,

혼이라는 것이 있고

혼 안에 다시 영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핵입니다.

 

성전이 성전되는 것은 지성소 때문입니다.

지성소가 없다면 성소도 없고, 그 넓은 뜰은 운동장만큼 넓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문제는 그 지성소 때문에 이 성전 전체가 거룩해지는 것이올시다.

이 이론에 의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①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프뉴마, 바로 ‘영’을 말하는 것이요,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요. 우리 영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요.

 

②그 다음에 우리의 ‘이성’이 있어요. 그 이성이나 지성이나 양심이 뒤따릅니다.

그래 이게 <성소>입니다.

 

③그다음에 그를 싸고 있는 ‘몸’이 있습니다. 그건 <육체>입니다.

 

▶육체 ←정신(이성) ←영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육체는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하고,

이성은 영의 주도하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그때에 멸망이 오는 것이올시다.

 

자, 보세요. 요새 심령의학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육체가 병들면 정신이 치료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육체가 병든 줄 알지만, 병은 정신에서 오는 거예요.

정신력이 약해져서 생긴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원인은 정신이에요.

 

여러분, 하룻밤만 고민하면서 잠을 못 자보세요. 다음날 아침에 콜록거리는 거 아니에요.

그거 잊지 말아야 되요.

 

암 환자들도 보면 내과의사의 기록대로 보면 3년 전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충격이 오늘에 와서 암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 고로 정신이 건강할 때에 육체가 건강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신은 영이 건강할 때 그 정신이 건강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육체가 병들면 정신으로 치료합니다.

정신이 잘못되면 영으로 치료합니다.

영이 병들면 무엇으로 치료합니까? 이게 끝이라는 거예요.

 

▶육체 주도적 사람 (↔영 주도적 사람)

그런데 ‘육신/육체의 정욕 주도적 인간’과

또 ‘이성이 병들고 영도 잠들어 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어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 병든 이성이 영을 지배하게 될 때 영은 잠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상태를 오늘 성경에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는 허망하다 vanity 그랬어요(엡 4:17).

목적을 상실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허무하고 허망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 지를 모르겠어요.

사업을 하나 결혼을 하나 목적이 없어요. 의미가 없어요.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②그 다음에는 ‘그들의 총명이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엡 4:18).

‘어두움’ (스코티조 darkened) 라고 하는 말은 지성적 결여,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진다’ 그랬어요.

판단하는 능력, 총명이 흐려져서 어두워졌어요.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졌어요.

 

③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다 그랬어요(엡 4:18).

‘하그노이안 ignorance’ 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이 모호해집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지고,

 

④그 다음에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지고’(지각이 어두워지고) 그랬습니다(엡 4:18).

강퍅해지는 거요. 고집만 남아요.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⑤그 다음에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어요(엡 4:19).

‘감각 없는 자가 되어 Having lost all sensitivity’

 

이건 완료형분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무감각해요.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어요.

 

⑥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엡 4:19).

방임,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포기상태입니다.

거기다 기대를 걸 수가 없습니다. 인간 됨을 포기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존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들을 재판할 때

그 재판 판결문에 사형을, 사형을 선언하는 판결문에서 마지막 말을 제가 자세히 들었습니다.

'인간 됨을 포기하였으므로 사형한다' 그랬어요.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인간들이요.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가 터져 나갔어요.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 이거는 좌충우돌이요. 이런 방임 상태에 빠져 버린 거예요.

 

◑심령을 새롭게 하라(엡 4:23)

 

그런 고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라'

조금 원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프뉴마티 누스 휘몬"입니다. *spirit of your mind

 

‘프뉴마 spirit’ 와 ‘누스 mind’라고 하는 두 단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이거 둘을 합쳐서 ‘심령’이라고 그랬어요.

‘영’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심령’.

 

다시 말하면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라.

너희 마음 안에 있는 영을, 마음 안에 있는 영, 그 핵심 그것을 새롭게 하라.

그것은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에요.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를 새롭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2002.01.06. 소망교회 설교 녹취

 

....................

 

▶자기 마음을 못 다스린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mind control,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느냐? Mind control by my self is impossible,

이게 유명합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 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가끔 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 내 생각대로 한다. 뭐, 자신만만하게 얘기합니다만

그건 철없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소중한 요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더라구요.

그걸 인정을 하면서부터 이제 그 생활이 시작됩니다요.

 

그래서 윤리학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몸만 움직인 거니까요. 그 마음이 문제거든요.

 

▶마음도 정원 가꾸듯 가꿈이 필요함

브라이언 카바로프라고 하는 분이 쓴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원!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다.

 

그래서 거기에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곡식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요.

그런데 좋은 곡식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질 않아요.

그리고 잡초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그리고 곡식은 시들시들 말라서 그만 죽어버려요.

 

그러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그게 가꾼다는 얘기 아닙니까?

곡식을 가꾸고 김을 매주는 거예요.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그 땅에서 오는 좋은 기운을 받아서 영양을 받아가지고

곡식이 잘 자랄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자, 우리 이 마음에 정원,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무성하게 자라는 거예요.

별 노력 없이도 자라는 거예요.

 

그러나 좋은 생각과 착한 마음은 애써 보전하려고 애써도

어느 사이에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래서 불끈 화를 내고 깜짝 놀라요.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이었던가?

내 마음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올 때, 어찌 내 마음속에 이런 악한 마음이 있단 말인가?'

놀라는 거죠. 놀랄 수 밖에요.

 

▶마음을 병들게 하는 요소들

사람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회학 적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1)하나는 Social Isolation.

이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며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2)그런가 하면 Major Life Change 라고 해서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가 있어요.

바로 배우자가 죽었다던가 자녀가 죽었다던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합니다.

 

또한 자신감이 없고 자기 만족이 없을 때, 그리고 일에 대해서 불만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생의 의미를 잊어버릴 때, 그만 점점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이 허약해 질 때, 허약해지기 시작하면 가속화되면서 점점 무너져 내려갑니다.

 

3)그리고 Pessimism 이올시다. 염세주의요.

이런 잘못된 세계관, 비관주의가 내 마음을 자리잡게 됩니다.

딱 자리잡고 나면 만사가 어둡습니다. 만사가 괴롭습니다. 만사가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게 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이같이 기울어진 마음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이냐 말이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될 사람이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 졸고 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에는 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해요.

마음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정말로 마음이 원했을까?

정말로 마음이 원하면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정말로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 내일 아침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어쩌다가 돈 몇 푼만 잃어버려도 잠이 안 오는데,

어쩌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만 받아도 잠이 안와서 걱정인데,

그래 이게 잠이 올 시간입니까?

 

그러나 저들은 잤어요.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참, 이건 자비와 긍휼로 충만한 그런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만으론 안 되는 이유

이성과 마음은 별도요, 지식(이성)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도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감성(감정, feeling)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입니다.

보세요. 자, 사랑해야될 줄 알면서 사랑해지질 않아요.

마땅히 사랑해야 할줄 알면서도 만나기만 하면 미워해요.

또,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잘못했다" 하고 내가 얘기해야겠다.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얘기를 해야겠다고

입으로 외우다가도 딱 만나면은 "용서 못해" 이래 버린다고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마음이 이렇단 말이에요.

 

'정직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해요. '부지런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게을러요. 때로는 '봉사해야 되겠다. 나는 봉사하며 살아야겠다'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요. 생각하면 감사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런고로 나는 범사에 감사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와요. 걱정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에요. 마음은 별도더라고요.

이 속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이에요.

 

▶마음을 다스리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16)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실 때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성령도 그와 같으니라' 그랬어요.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실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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