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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2장, 측량줄 잡은 자의 환상

LNCK 2022. 11. 22. 21:16

◈슥2장, 측량줄 잡은 자의 환상 여러 설교 정리

 

스가랴가 본 8개의 환상 중에, 본문 슥2장은

세 번째 환상인데 <측량줄 잡은 자의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재건은   (*성전이 아니라, 성의 재건. 4절,

나중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 본문의 예루살렘 재건은 성전과 성벽, 그 속의

집들을 포함한, 폐허에서의 포괄적인 재건을 예언함) 

 

일차적으로 당시 존재하던 역사적 예루살렘의 복구이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통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의미하죠.

 

본 장의 황폐한 성이 재건되고, 그 안에 성전이 복원되므로

예전의 영광을 되찾게 된다고 예언하므로

 

당시 실망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이 세상의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래에 이루어질 교회와 새 예루살렘을 대망하게 합니다.

 

▲본문의 배경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로 지내며 온갖 수치와 모욕 속에서도

견디고 견디어 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레스를 통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으리라’는 예언을 믿고 *렘32:41

약 5만 명의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졌던 집과 터전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그들은 약 1천 킬로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바벨론~예루살렘

제단도 세우고,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도 지키며, 성전건축을 시작했죠.

 

그러나 사마리아인의 방해라는 현실의 벽 앞에 주저앉아 버리며

성전건축은 16년 동안 멈추어져 버렸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심에 빠져버렸습니다.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라며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고국에 왔지만

현실의 벽 앞에 주저앉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신앙과 현실,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 앞에 갈등하고 타협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학개,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셔서

잠든 그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슥2장 해석 

 

아주 멋진 해석입니다.

 

슥2:1~13 과거, 현재, 미래의 예루살렘 (tistory.com)

 

2:1~13 여호와께서 일어나심이니라 (tistory.com)

 

 

 

◑적용

 

하나님이 과거에 건설하셨고,

현재에도 세우고 계시며

미래에 완전히 세우실 ‘새 예루살렘 성’은 다음과 같은 약속이 있습니다.

 

▲1. 불성곽의 보호를 받는 백성

 

앞으로 재건되어 세워질 예루살렘 성에 대하여,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하죠.

 

4절 ‘예루살렘은..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장차 예루살렘은, ‘성곽이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는 쇼킹한 예언이죠.

그래서 외국에 보면, 실제로 ‘담 없는 집’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주실 줄 믿기 때문이죠.

 

5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겔38:11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

즉 ‘평원의 고을’(플라자)에 거주하는 백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성벽과 빗장 없이 사는 백성’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성벽’, ‘문빗장’. ‘불성곽’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 https://rfcdrfcd.tistory.com/15971941

 

 

▲2. 하나님은 성전을 측량하십니다.

 

본문 슥2장을 계11:1~2의 성전 측량과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죠.

https://rfcdrfcd.tistory.com/15973587

계11장의 성전 측량은, 본문 슥2장의 성전 측량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은, 신약적 의미로 곧 성도를 가리키죠.

즉, 성도를 척량하라는 것이죠.

 

고전3:16에 ‘너희(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고,

그 성도는 계21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지칭되기도 하죠.

그래서 ‘성도=성전=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주님은 성도에게 관심 있으시고, 성도(성전)을 온전히 세우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성전)를 측량 measure 하십니다. 2:1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다림줄(본문에는 측량줄)로 측량해서 *암7:7

성도를 허물기도 하시고/건설하며 세우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시선/척량의 대상이기 때문에,

약간만 잘못된 길을 가면.. 호되게 혼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늘 척량(자로 재시기) 때문이죠.

 

그 잣대(기준)를 벗어나면.. 어김없이 징계가 찾아옵니다. 사랑의 징계죠.

그것이 스바냐서에는 ‘여호와의 (심판의) 날’로 나타났습니다.

 

이렇듯 신약성경에도 ‘건축’에 대한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도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건축에 대해 말씀하셨고요.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든든히 서 가다’는 오이코도메오 인데

‘무너진 곳을 수축하다, 다시 회복하다, 집을 짓다’는 의미죠.

 

우리는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육신과 옛 자아가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측량한다는 것은, 말씀의 기준에 맞추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모자란 것은 보충한다는 뜻이죠.

 

즉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말씀과 성령의 기준으로 측량해서

늘 기준에 맞춰서 세워나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며, 신앙생활의 실상입니다.

 

요즘 부동산(집)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TV오락 프로까지 ‘집을 구하는’ 방송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관심’에

내 관심을 정렬 align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성전을 측량’하시며

당신의 성전(성도 또는 공동체)을 새롭게 건축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성전은, 금년에 리모델링 renovation 되고 있나요?

아니면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도 리모델링 한 적이 없어서,

아주 거미줄이 가득 쳐져 있고, 비가 새고, 창문이 흔들거리지 않습니까?

 

교회나 집을 리모델링 할 때는, 경제적인 부담도 많이 됩니다만

하나님이 ‘나의 집’을 리모델링 하실 때는, 경제적 부담이 전혀 필요 없죠.

하나님이 ‘나의 성전’을 리모델링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성도는 세상에 안주하면 안 되고, 세상에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2:6~9절은 북방 땅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포로된 땅에 머물고 있는 백성들의 귀환을 촉구하는 내용이죠.

 

6-7절,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그곳에서 도피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곳이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강한 제국들의 포악함과 교만함을

벌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귀환을 포기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었고

열국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망하던 사람들에게는 잠잠히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현실에 안주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보다

사라질 현실 세상(바벨론)의 안락함에 안주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없어질 세상의 영광과 편안함에 취해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심판을 미리 경험하면서 (본문의 표현으로는 ‘척량을 당하면서’)

그 최후 심판의 재앙을 미리 경험하고

‘야, 빨리 도망가자!’ .. 이 사람만 바벨론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18:4에 ‘나와라’ 그랬죠. 거기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과거에 우리가 늘 부르던 찬양이 있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 이제 다가오리라」 사11:3~9 등

 

위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인데요.

 

그런데 요즘은 찬양 자체를 아예 안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대한 기대가 없어진 것인지

이런 찬양이 쑥 수면 아래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본문 슥2장에서 말하는 ‘미래의 소망’은 다음과 같습니다.

 

2:4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예루살렘) 가운데에 머물리라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이런 소망은, 과거/현재/미래의 3가지 시제로 해석할 수 있죠.

본문의 말씀이, 오늘 내 현재에도 이루어져야 하며,

앞으로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 오늘 현재에 이루어지는 사람만,

앞으로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히로시마에 1945년 8월 14일 원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8월 6일 비행기 한 대가 히로시마 상공을 날면서

삐라를 뿌렸습니다.

원자 폭탄을 떨어트릴 터이니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피한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비웃고 떠나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늦기 전에, 진노가 임하기 전에, 분노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폼페이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날에도,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갑자기

폭발해서 사람들이 화산재에 뒤덮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날 새벽부터 화산 폭발 징후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울었고’(쿵쾅거리는 소리가 났고)

작은 화산재들이 품어져 나왔습니다. 그때 도피한 사람은 다 살았던 거죠.

 

실제로 당시 폼페이 주민은 2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그 중 사망자는 대략 2천 명 정도인 듯합니다.    *위키피디아

(물론 폼페이 인근 도시들에도 사망자 많이 발생)

 

즉 나머지 1만 8천 명 가량은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다는 거죠.

그래도 최소 인구 10%의 인구가 사망할 정도였고,

부상자는 더 많았을 테지만, 도시 인구 전체가 다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징후가 보일 때.. 빠져나와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포로로 잡혀 있는 땅(바벨론)’은 어디 입니까?

컴퓨터 게임, 매일 들여다보는 주식 변동 그래프, 부동산 시장

그 외에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바벨론은, 우리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6-7절,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참고로, 1~3차 귀환 때,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 계속 남아 있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 대부분은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탄생 때 별을 보고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바벨론 지역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의 후예라고 보는데...

그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유명무실한 존재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하나님이 ‘도피하라’ 즉 빠져 나오라고 부르실 때는,

속히 도피하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2:6

 

오늘 우리가 너무 바벨론(현실 세상)에만 푹 빠져 살고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1도 없으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있다가 유명무실하게 사라졌던

대다수의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영생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지어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