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척량 계11 :1~2, 겔40 :1~5 11.03.20.김성수 목사 설교일부녹취
계11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사도요한에게) 성전을 척량하라. 11 :1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은, 곧 성도를 가리킨다.
즉, 성도를 척량하라는 것이다.
위 구절에도 성전과 경배하는 자(성도)가 동시에 척량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1
고전3:16에 ‘너희(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고,
그 성도는 계21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 :2
그래서 성도=성전= 새 예루살렘 성이다.
척량한다는 뜻은, 무슨 건물을 지으려 할 때,
또는 짓는 과정에서 삐뚤어지면 허물고 고칠 때.. 척량한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관심 있으시다.
그래서 성도를 척량 measure하신다.
그래서 오늘도 성도를 허물기도 하시고/건설하며 세우기도 하신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1~2
‘성전 밖’은.. ‘성전’과 반대개념인데, ‘이방인’ 즉 불신자를 가리킨다.
위 본문에도 ‘성전 밖’은 ‘이방인’의 차지라고 나오는데, 비슷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 밖’ 또는 ‘불신자’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성전’ 즉 ‘신자’에게만 있다. 그래서 성전(안)만 척량하신다.
척량한다는 뜻은.. 비슷하게 ‘다림줄로 잰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오직 성도만 ‘다림줄로 재듯이 척량해서’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전 밖 이방인들은 척량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방인들이 자행자지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은 오직 성도에게만 있으시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시선/척량의 대상이기 때문에,
약간만 잘못된 길을 가면.. 호되게 혼난다.
하나님이 그들을 늘 척량(자로 재시기) 때문이다.
그 잣대(기준)를 벗어나면.. 어김없이 징계가 찾아온다. 사랑의 매를 맞는다.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2
‘저희’는.. 이방인, 불신자이고
‘거룩한 성’은.. ‘신자=성전=예루살렘 성’이라고 서두에 설명 드렸다.
즉 성도가 이방인들에게, 즉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
‘42달 동안’ .. 역사 내내 짓밟힘을 당한다는 뜻이다.
※42달=1260일인데, 초림~재림 사이의 세상역사를 뜻한다.
즉, 성도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역사 내내(42달 동안) 그들에게 짓밟히게 된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계속 설명하겠지만,
성도는.. 세상에 낙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장망성(장차 망할 성)이요, 빨리 빠져나와야 할 곳이요,
성도가 바라볼 곳은.. 오직 천국이라는 것이다.
이건 <탈속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 세상과 세속에서 탈피하는 것을 뜻하며,
성도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 속에서 자기 사명 감당은 계속 해야 한다.
다만 죄악 세상에 동화되거나, 거기서 우위를 점하려고 아등바등 하지는 않는다는 뜻.
세상과 구별된다는 뜻.
◑해석 및 적용
▲1. 계시록에서 ‘거룩한 성, 성전 안’만 척량하라고 하신 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성도는,
스스로의 노력/자격/자원에 의해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건축(척량)해 가시는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함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순간마다 ‘척량’하셔서
성도를 이끌어 가신다. 세워주신다. 건축하신다.
필요하면 징계도 하신다. 삐뚤어지면 허물고 새로 쌓으신다.
나에게는 육적 자아, 우리가 나면서부터 쌓아놓은 옛 성전, 옛 자아가
우리 각자 안에 있다.
그것을 척량해서 부수어 버리고,
다시 하나님이 척량해서 세워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며, 신앙생활의 실상이다.
▲2. 그런데 그 일이, 성전 밖, 이방인들에게는 안 나타난다.
성전 밖은 척량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시73편처럼,
그들은 오히려 우리보다 돈도 더 잘 벌고,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는다.
그래서 ‘42달 동안’ 이방인의 뜰은 척량에서 면제된다.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래서 이방인은 죄 짓고도 어쩌면 편하게 산다.
▲3. 이방인(불신자)에게 심판은.. 유보되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척량되면서/심판을 받으면서/세워지면서..
마지막 최후 심판을 통과한다. 영생에 처한다.
이방인은.. 이 세상에서 척량되지 않으면서/심판도 없고/세워지지도 않다가..
마지막 최후 심판 때 절단난다. 영벌에 처한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심판을 미리 경험하면서 (본문의 표현으로는 ‘척량을 당하면서’)
그 최후 심판의 재앙을 미리 경험하고
‘야, 빨리 도망가자!’ .. 이 사람만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계18:4에 ‘나와라’ 그랬다. 거기서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이 진리인양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척량에서 제외된다.
그게 얼핏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심판유보이다. 결국 호되게 당한다.
그렇게 세상은 심판에서 유보된 상태를 산다. 그 이후에는 완전히 멸망된다.
그런데 이 역사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만 척량을 당한다. 심판을 당한다는 것이다.
왜? 여기서 도망가라고!
심지어 성도는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한다.
42달 동안, 즉 역사 내내 짓밟힘을 당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지만,
이 세상이 영원한 천국인 것처럼.. 세상에 취해서 살지는 말라는 뜻이다.
일본 쓰나미는 ‘성도들을 향한 경고!’
그러니까 쓰나미가 일본 동북부 지방을 덮친 것은,
‘일본이 우상을 많이 섬겨서 벌 받아 덮친 것’이라는.. 그런 헛소리를 믿지 마시라.
쓰나미는 성도의 마음에 들이닥친 <주님의 경고>이다.
하나님은 성도에게만 관심 있지, 세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으시다.
(척량은 오직 성도에게만 하고, 이방인에게는 심판이 유보되어 있다.)
쓰나미가 시속 720키로로 달려온다는데,
그건 하나님이 한 번 재앙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시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도망갈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보시라, 그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가?
그러니까 <성도들이 경고를 받고, 빨리 피하라>는 것이
일본에 쓰나미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 순전히 ‘성도용 경고’인 것이다.
일본의 동북부 대부분 시민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그 쓰나미를 피하지 못했듯이,
최후 심판도.. 갑자기 들이닥칠 터이니
성도들은.. 미리 미리 대피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쓰나미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교훈이다!
쓰나미는 이미 2천년 십자가에서 출발되었다.
그건 시속 720킬로가 아니라, 더 빠른 속도로 지금 들이닥치고 있는데,
세상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도만, 이 역사 속에서, 지금 성령에 의해 그 심판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을 늘 척량하신다. ‘성전 밖’은 놔 두시고!‘
이 역사 속에서의 모든 재앙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교회 보고 회개하라고 주시는 싸인이다.
그때 일본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니,
쓰나미 몰려 올 때 ‘지갑 가지러 집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죽었고,
보자마자 ‘어 큰일났네!’ 하고 달려서 도망간 사람은 다 살았단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바로 지금 그 지갑을 두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데.. 그건 잘못된 신앙이다.
그러다가는, 쓰나미에 휩쓸리게 될것이다.
올바른 신앙은 ‘세상에서 제 지갑 두툼하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이 쓰나미(심판)에서 빨리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하고 부르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죄악 세상에서 속히 빠져나와야 하고, 사명 감당하기 위해서는 계속 머물러야 함)
이 역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살만한 곳이 되고(심판이 유보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고 싶은 곳이 되는 것이 맞다. 그래야 도망가니까!
이 세상이라는 곳은, 전부 미치는 약을 풀어놓은 마녀의 우물물을 마시는 것과 같고,
‘다 미쳐 있다는 것’을.. 맨 정신으로 보는 이들이 성도이다.
그 물을 안 마셨으니까!
◑이 말씀 계11:1~2의 성전척량은 겔40장에서 인용된 말씀이다.
거기로 가야, 이게 무슨 뜻인지 더 정확히 알게 된다.
겔40: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5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리고 그는 계속 성전을 척량한다.
거룩한 성이 지금 척량되고 있다.
겔40:38~39절에 보면, 번제물을 씻는 곳과 제물을 드리는 그 제단도 척량한다.
그건 거룩한 성이 곧 성전(성도)이란 뜻이다.
그 성전이 지금 척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본문 계시록11:1~2에 그대로 인용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대로 척량된다는 뜻이다.
성전 안. 바깥 마당 이외에 성전이 척량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성전’(성도)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이 함락 된 후’ 겔40 :1
이스라엘의 성과 성전이, 바벨론/이방인에게 파괴된 후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과 성전이 파괴가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성전을 또 척량한다는 것인가?
똑같이 옛 성전이 또 부정되고, 그 옛 성전이 무너진 곳에,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지금 보는데)
하나님에 의해 세워질 성전이 척량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세워진 옛 성전은 다 진멸될 것임과,
하나님에 의해 세워질 새 성전이 세워질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천사가 척량하는 것이다.
그게 바벨론 포로기에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지금 이 땅에 ‘포로’로 살고 있다.
마치 마귀가 우리의 주관자인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다.
이것이 세상에 과거에 바벨론 포로된 성도의 현실이었다.
이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 백성들의 육적 자아 죽이기의 현장이고,
그런 포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를 만드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옛 성전이 다 부수어졌는데,
거기에서 새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척량하라는 것이다.
척량한다는 것은 세우겠다는 뜻이다.
다림줄로 척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건물을 지으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척량이란.. 건물을 지을 때도 필요하지만,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삐뚤어질 경우, 고치거나 허물 때도 필요하다.
겔40장의 척량이,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지으실 새 성전에 관한 예언이라면,
계11장 본문의 척량은, 그 예언이 현재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