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데스티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데스티니' 라는 단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라는 뜻이죠.
영어 단어의 뜻은 '운명, 팔자' 인데, 원래는 이런 뜻이 아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백라운드에서 형성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어요.
데스티니 이라는 단어가 없고, 그냥 가장 비슷한 것이 '운명, 부르심'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획' 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시고 지으실 때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다는 거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연습삼아 우리를 만들어 본 것이 아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계획이 있으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어떤 배경에서 태어나게 하고 어떤 삶을 살게 하고, 그래서 어떤 축복을 누리게 할 것인가에 대한 아주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걸 우리가 데스티니 destiny 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목적은, 이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 원래 계획하셨던 계획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면 우리 안에 내적인 충만함과 만족감과 행복감과 풍성함을 누리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삶에 조금 부족한 것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가면 자기 삶이 행복하고 풍성하고 만족해요.
그런데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고,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고 돈도 많고, 명예도 있고, 전부 다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계획,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지 않으면 사람은 공허함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도 경험하셨을거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열심히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봤지만 그것이 결국 내 안에 보면 뭔가 부족하고, 2% 부족하고, 공허하고 '인생이 이게 다가 아닌데..' 하는 그런 공허함과 부족함들을 아마 경험하셨을 거예요.
그것이 데스티니 에서 오는 공허함입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서 있지 않을 때 우리 안에는 항상 그런 부족함이 있다는 거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아담부터 시작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도니야를 살펴볼 텐데, 살펴보면서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고 그 계획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계획이 어떻게 안 이루어지는지, 왜 망가지는지 이런 것들을 고찰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메시지를 줍니다.
그렇죠. 이 사람들의 인생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똑같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인생도 역시, 성경에 등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그런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성경에 등장하는.. 성공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사람들처럼 우리 인생도 우리를 향한 데스티니를 이루어갈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잘못된 선택은 우리의 데스티니를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쭉 살펴보면서 우리의 데스티니에 대한 교훈과 메시지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데스티니를 살펴보면서 제가 발견한 게 한 가지 있어요. 이건 뭐냐하면 한 사람도..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이제껏 스물여섯 분을 살펴보았는데, 26분 뿐만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부 다 살펴보십시오.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다 각각의 아주 고유한, 유니크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그 독특하고 고유한 그 사람만의 데스티니가 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저희가 아도니야 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아도니야는 다윗의 아들 중의 하나입니다. 넷째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도니야 위로 있던 아들들은 전부 다 비명횡사 했어요.
첫째 암논은, 압살롬에 의해 죽죠. 셋째 압살롬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요압에게 죽었죠.
둘째 길르암은, 아비가일의 아들로서 이 사람은 일찍 죽었던지, 장애가 있었던지.. 성경에 이름 한 번만 나오고 더 이상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남은 남은 아들 중에 제일 큰 아들이 아도니야 에요. 아도니야는 솔로몬과 함께 왕권을 다투었던 인물이에요. 그러다가 솔로몬한테 밀려나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이 되었죠.
제가 그 전부터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설교를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아도니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세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시리즈설교를 해보려고 해요. 솔로몬, 압살롬, 아도니야
압살롬과 아도니야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 데스티니를 말아먹었다는 거에요.
원래 압살롬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아도니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는데 이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는 거에요.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데스티니가 왜곡되고 그래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데스티니) 를 말아먹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주위에 있던 사람 중에 요압이 있죠. 요압도 자기 데스티니를 말아먹었던 사람이에요.
이 삼부작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데스티니가 망가지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거를 지혜롭게 피해 가자는 것이죠.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이야기들은, 과거에 끝난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이지요. '우리도 이렇게 하면 똑같이 말아먹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도 이렇게 하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본론 / "아도니야의 말아먹은 데스티니" 모든 왕위 계승이 그렇듯이, 다윗이 나이가 들자 왕자들 간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암투가 벌어지는 거죠.
자 그중에 가장 먼저 액션을 취했던 사람이 본문의 아도니야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개국공신이었던 사람 두 명과 손을 잡습니다.
군대장관이었던 요압, 그리고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 이 두 사람과 손을 잡고, 어느 날 크게 잔치를 열고 다윗의 모든 용사들과 신하들과 왕자들을 다 초청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거죠. 세를 규합을 하는거죠. 왕자들을 초청했던 것은 '나를 보라'는 거죠.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보라는 거죠. 요압의 지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오늘날도 결국 군대의 힘을 잡고 있는 사람이, 결국 권력을 잡잖아요. 그러니까 요압이 지금 나를 지지하고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했던 게 뭐냐면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기 때문에 '제사장'이죠.
근데 '제사장 아비아달도 나를 지지하고 있다' 라고 보여주는 겁니다.
잔치를 열어서, 많은 신하들에게, 또 다른 왕자들에게 '조용히 해라. 왕은 내가 될 거다!' 이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조금 걸리는 인물이 솔로몬이에요. 그는 그렇게 해서 제압될 인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솔로몬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잔치에 부릅니다.
자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인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처럼 보입니다. 왜냐면 맏아들이고, 그 위에는 다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도니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다는 거죠. 아도니야는 왕이 되는 것이, 자기 데스티니가 아니었다는 거에요.
그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는 거에요. 그것이 뭔지는 우리 몰라요. 왜냐하면 그가 이뤄낸 적이 없으니까! 때문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뭐였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여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다른 거였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되리라'고 다윗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솔로몬의 데스티니가 왕이 되는 것이었고 아도니야 에게는 다른 데스티니가 있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도니야는,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데스티니를 욕심냅니다. 그러다가 결국 원래 하나님의 계획대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이제 아도니야는 물러나게 되죠.
그랬다가 나중에 다윗의 마지막 여인이었던 아비삭을 달라고 밧세바에게 부탁했다가, 솔로몬에게 찍혀가지고 비참하게 죽게 되는 이것이 아도니야의 인생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인생을 한마디로 딱 정리하면 "자신의 데스티니가 아닌 것을 취하려 했을 때 맞이하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데스티니가 아닌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데 그것을 무리하게 욕심내서 취하려고 했을 때 어떤 비극이 오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도니야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다음 질문을 던져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왜 아도니야는, 자신의 데스티니가 아닌 것을 욕심내게 됐을까요?'
그 근원을 살펴보면, 아버지 다윗이 있습니다. 이 아도니야의 빗나간 데스티니는, 다윗에 대한 부러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까지, 저의 데스티니는 '교수'라고 생각했어요. '이거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저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거든요. 제 아버지가 저한테 참 좋은 분이었어요.
근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아버님이 교수님이셨는데 참 좋아 보이는 거예요. 시간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맨날 테니스 치시고.. 이런 거 보니까 '교수 할만 하겠다' 그런 것도 있지만, 하여간 교수가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나의 데스티니는 교수다!' 근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죠. 제가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제 데스티니가 바뀌게 되는데...
어쨌든지 간에 이 아도니야도,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것 같아요. 제가 아도니야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아요.
그가 왜 왕이 되고 싶어했는가 하면, 실질적 장남으로서 아버지 다윗을 늘 옆에서 보고 있는데 다윗 왕을 보니까.. 이게 좋은 거예요.
권력이 있으니까, 왕이 말하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또 사람들을 어쨌거나 다스리고 호위를 받으며.. 이런 거를 보면서 권력 맛을 본 거죠. '저렇게 살면 좋겠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마음 가운데 다윗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면서, 그래서 그는 자신도 왕이 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추구하지 않고, 그냥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자신의 데스티니로 삼은 거지요.
아도니야는 자신의 데스티니를 살려고 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데스티니를 흉내내려 한 사람이죠. 다시 말하면 다윗의 카피캣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카피캣 copycat'입니다. 이 단어를 잘 기억하세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도니야의 길을 좇아가고 있다는 거에요. 아도니야 처럼 남을 카피하는 인생을 선택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부르심이 있어요. 고유한 부르심, 데스티니가 있어서 다른 사람의 흉내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나만을 향한 아주 특별한 부르심과 정확한 계획이 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주변에서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서 자기의 인생을 거기에 걸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에게 장래되고 싶은 장래 희망 1 순위를 물어보면 몇년 전까지는 '가수'였어요. 왜 그래요?
TV를 보니까 가수들이 나와요. 막 사람들이 환호성하고... 이런 거 보니까 가수가 좋아보여요. 그래서 청소년들 장래희망 1순위는 가수 또는 연예인입니다.
또 부모들이 보기에는 '의사들 봐, 돈 많이 벌고 존경받잖아!' 그래서 대학입시 1순위는 의대입니다. 뭐 이런 거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좇아서 우리의 데스티니를 살아내고자 하냐면 그냥 주변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직업들을 보고, 그것을 좇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아도니야의 삶'이라는 거에요.
아도니야가 다윗을 보고 다윗의 카피캣이 되고자 했듯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소녀시대'를 보고 소녀시대의 카피가 되려고 하죠.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나는, 남의 것을 흉내내는 존재로 부름 받지 않았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흉내내는 존재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창의력이 부족한 분이 아니세요.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정말 독특한 데스티니를 다 디자인하고도 남을, 창조의 근원이시잖아요.
그래서 지구상의 인구가 70 억 있다고 해도 단 한 사람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고요. 그 얼굴이 각자 다른 만큼이나, 각 사람의 데스티니도 각자 다르다는 거죠.
그 사람만의 아주 독특한 인생을 살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거든요. 무한한 창의력을 가지고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유니크하게 만드셨어요.
아도니야의 데스티니는 다윗의 카피캣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도니야의 데스티니는 아도니야가 되는 거에요.
다윗의 삶이 좋다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아도니야만의 고유한 부르심, 인생 디자인이 있다는 거에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청년들이, 누군가의 카피캣이 되려고 합니다. 물론 인생의 선배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 인생의 롤모델을 갖는 것.. 이런 건 좋은 거죠.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보조적인 도구일 뿐이에요.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지 그 사람의 인생을 그대로 카피하는 것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죠.
우리 삶에는, 아무도 살아보지 않은, 여러분이 처음으로 살아가는 또 여러분 만을 향한 맞춤형 인생이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공장에서 이렇게 대량으로 찍어낸 공산품이 아니고 예술가가 아주 손으로 빚어낸, 아주 정성스럽게 만든 수제품이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대량 생산된 본차이나 접시가 되려고 한다는 거죠... 그게 보면 비싸고, 백화점에 진열돼 있는 거 보면 화려하고 그래서 그걸 되고 싶어 하겠지만, 여러분의 한 하나님의 계획은 '본차이나'가 되는 게 아니에요. *유명 그릇 브랜드
우리가 이렇게 자기 데스티니 를 깨닫는 것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 사회는 그게 조금 더 심한 것 같은데 젊은이들 보면, 막 답답할 때가 있어요. 얘를 보나 쟤를 보나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똑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아요.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규격으로 찍어낸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도 거기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어요.
제가 이걸 보고 있으면 답답해 죽겠어요.
한국에서 태어나면, 중학교 때는 뭘 해야 되고 고등학교 때는 뭘 해야 되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면 그 대학의 졸업장을 가지고 딱 인생이 결정되죠. 그래서 일류대학 나오면 대기업에 들어가고.. 이렇게 가는 길이 정형화되어 있죠.
인생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딱 짜여져 있어요. 완전히 정형화 되어 있고, 거기서 한 걸음 이라도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의 인생이 다 벽돌 찍어내듯이 비슷하게 살아가는데 근데 이게 정말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사회인가요? 아니라는 거죠.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창의력이 없으신 분이 아니세요. 저와 여러분을 다 독특하게 만드셨어요. 이것을 깨닫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아도니야는 불행하게도 한번 실패한 후에도 여전히 다윗의 카피캣이 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근데 이게 보니까.. 병이에요. 누군가의 카피캣이 되는 것에 끌리는 사람은, 끊임없이 그 사람이 카피캣이 되려고 합니다.
제가 '레이디 가가'가 한국에 왔을 때 알았어요. 그 흉칙한 거를 흉내내고, 막 분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병이구나!' 이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저걸 흉내내고 싶을까?'
아도니야가,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하루는 솔로몬의 엄마인 밧세바를 찾아가죠.
그래서 다윗의 마지막 시중을 들던 여인이었던 아비삭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왜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달라고 했을까요? 이유가 분명치 않아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것을 '정치적인 의도' 라고 해석하고 결국 아도니야를 죽이는데
이게 그렇게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정치적인 의도였다면 그걸 밧세바는 왜 몰랐을까요? 정치적 의도가 아니었던 거죠.
아도니야가 왜 아비삭을 달라고 했을까요? 이유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아도니야가 다윗의 카피캣이었다는 거에요.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다윗의 삶을 굉장히 부러워하고, 그것을 흉내내고 싶어했던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아마 아비삭에게도 끌렸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걸 보니까, 그 안에 있던 내면이 확 꿰뚫어지는 겁니다. '아도니야가 아직도 다윗의 카피캣 되는 병을 못 버렸네? 그렇다면 이 여인뿐만 아니라, 결국은 다윗이 살았던 왕으로서의 자리까지 아직 포기를 못 했겠구나..'
그래서 솔로몬이 밧세바에게 '그 여인뿐만 아니라 왕위도 물려주시죠?' 그러잖아요.
아도니야가 '제 2의 다윗이 되고 싶은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아도니야가 죽임을 당하고, 그의 인생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 아도니야가 비극적으로 망가진 이유는 그가 자기 인생을 살려고 하지 않고 다윗의 인생을 살고 싶어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아도니야가 다윗 인생을 복사하려고 했던 이유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시다. 그렇다면 왜 아도니야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윗의 카피캣이 되고자 하는 병을 고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누군가의 카피캣으로 살아가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근본 원인을 우리가 드러내고 뜯어고치지 못한다면 우리도 역시 아도니야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하여튼 이유가 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왕상1~2장에 나오는 아도니야의 스토리를 천천히 묵상해 보면 세 가지 정도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아도니야가 다윗의 카피캣이 되고자 한 첫번째 이유는 세상의 법칙, 또는 세상의 순리, 또는 세상의 흐름.. 이런 것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왕상2: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아도니야가 '이 왕위는 원래 내거였다'는 거에요. 여러분 '왕위가 원래 아도니야의 것입니까, 아니면 원래 솔로몬의 것입니까?'
왕위는 원래 솔로몬의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거든요.
근데 아도니야는 뭐라고 굳게 믿고 있냐면 '왕위는 원래 내 것이었다'는 거죠. 아도니야의 주장은,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거예요. 자기가 맏아들이잖아요.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치, 세상의 흘러가는 방식, 세상의 가치관을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카피캣이 되려고 한다는 거에요.
'세상에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 거야,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거야!' 그러면 그것을 진리로 믿고, 거기에 자기 인생을 거는 것이 사람들이 누군가의 카피캣이 되는 첫번째 이유라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가치를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죠!
아도니야의 실수는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디자인 하실 때, 왕으로 디자인 하셨는가? 아니면 내게 다른 데스티니가 있는가?' 아도니야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했어야 돼요.
그런데 아도니야는 그렇지 않았어요. 세상의 이치를 따랐던 거죠. '나는 다윗의 맏아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왕이 되는 것이 나의 데스티니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것을 더 따르십니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그것을 더 따르십니까?
'주변 사람들을 보니까 다 저 길로 가네' '대학? 대학은 다른 사람들은 다 저 길로 가네, 나도 따라가야지!'
대학 가는 게 잘못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대학에 가십시오. 근데 왜 가는지 이유가 자기한테 명확히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크리스천들도, 세상의 흐름대로, 무작정 따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모든 선택들이 '왜 그렇게 하는데?' '남들 그렇게 하니까!'
남들 뛴다고 같이 뛰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 아프리카 스프링벅 주1)
사람이 정한 룰이,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룰보다 더 위에 있으면, 내 인생도, 아도니야의 인생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게 당장은 미련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정하신 룰을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누군가의 카피 인생이 아니라 오리지널 인생이 되길 원한다면 사람들이 다 간다고 덩달아 뛰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시고, 거기에 무게를 두시고 선택할 때, 놀라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건 이론이 아니고 종교가 아니고 실제에요. 거기서 놀라운 하나님의 길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사실 제가 목사가 될 거라고 정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제 인생에 저도 사실 카피캣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죠.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의해서 또 특별히 아버님의 교수의 삶을 보니까 아주 좋아 보여서 제가 아버님의 카피캣이 되려고 했던 거죠. 나도 모르게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다 마치고, 박사학위를 끝내고 사람들이 거의 선택 안 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제가 교수의 길로 가지 않고, 목회를 선택했죠.
아마 제 주변에서 거의 보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제가 목회를 한다고 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굉장히 저를 많이 말렸습니다. 대부분은 말린 게 아니고, 더 심하게 '너 미쳤냐?' 그랬어요.
'네가 지금 공부한 게 몇 년인데?' 대학 4년에 대학원에, 박사과정 7년에, 한 15년 정도 공부한 것 같아요.
*서울대 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비유학생에 선발되어 미국 UC버클리에서 수학 박사 학위(Ph.D), 대전침례신학대학교(M.Div)
'네가 원하던 것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그거 왜 갑자기 관두고 딴 거 하려고 하냐?' 사람들이 저보고 미쳤다 그랬어요.
제 안에 있었던 강한 확신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근데 그 길로 가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남들이 다 가는 길에서 빠져 나와서 나만 딴 데로 가려고 하니까 '이래도 되는 건가?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내가 미쳤나?' 이런 생각도 들었지요.
근데 거기가 결국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러니까 12년 전에 그래서 전공했던 거 그냥 포기하고 다른 길(목회)로 들어섰어요.
제 주위 사람들이 거의 안 가는 길로 들어섰어요. 그리고 지금 12년이 지났습니다.
근데 제 안에 백 퍼센트 만족이 있습니다. 백 퍼센트 만족! 저는 두 번 태어난다 해도, 그냥 이렇게 계속 살 것 같아요.
지금 '내가 과거에 계속 그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아찔해요. 저희 선후배들 만나보면 불쌍해요. 교수가 옛날 교수가 아니더라고요. 한가하게 테니스 칠 시간 없더라고요.
요즘은 다들 논문 편수 때문에 비쩍말라 가지고 이번에 안 나오면 고가점수가 어떻게 되는데.. 재임용이 안 될 수도 있는데.. 세상에 쉬운 길이 없더라고요.
제 안에는, 이 목회의 길에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어요. 정말로 2백프로 만족하고요. 제가 다시 살아도 이 선택을 할 것 같고요.
모든 사람이 목사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만족하는 이유는 목사가 됐기 때문에 만족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로, 제가 선택해서 왔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죠.
여러분에게도 이 길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간다고 해도, 거기로 가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마련해주신 길이 있어요. 그리로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아도니야가 카피캣이 된 두번째 이유는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그래요.
왕상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는 평판 관리를 참 잘햇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외모관리도 잘했고요, 대인관계도 아주 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가 반란을 시도할 때 보면, 요압을 비롯한 수많은 이스라엘 중진들이 대거 반란에 참여하죠.
이게 자기의 평판 관리를 잘 못한 사람이면, 이럴 수가 없죠. 자기 관리를 아주 잘했던 사람이라는 거에요.
아니도야는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에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인정할까?'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평판은 뭡니까? 그것이 사람의 평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평가입니까?
△아도니야와 대조되는 인물이 있는데, 다니엘이에요. 다니엘의 이름의 뜻은 뭐냐면 '하나님이 나의 심판주이시다'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나의 심판관 이시다'
다니엘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고위층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식민지에서 잡혀 온 포로였고요. 아마 포로로 잡혀와서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거세 당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합니다. 아마 내시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의 인생은, 별로 그렇게 세상적으로 화려한 인생이 아니에요. 이 사람이 총리를 하고 어쩌고... 여러분, 포로로 잡혀온 식민지의 아이가 총리를 했다고 하는 것은 관리를 잘하고 똑똑하니까 그 일을 시켰다는 것이지 실제 권세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목숨이 늘상 파리 목숨 같잖아요. 실제로 파워가 있고 권위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어요. 그냥 관리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워낙 똑똑하니까 큰 관리를 맡긴 것 뿐이죠. 실제 파워를 갖고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에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에게 심판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거죠. 사람들이 다니엘을 보고 뭐라고 평가하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뭐라고 평가하느냐? 이게 중요했다는 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 인생가운데는 어떤 평가가 중요하십니까? 사람은 결국 여러분 심판관이 누군가에 의해서 그 인생이 디자인 되게 되는 거 아세요?
심판관이 사람인 사람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에 따라서 자기 인생을 살게 돼 있어요.
2010년도에 김연아 선수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죠. 근데 금메달을 따고 나서, 일본 사람들이 약간 마음이 상했습니다. 자기들도 유명한 선수들이 있었죠. 아사다마오.. 이런 선수들이 있었는데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는 걸 보고 약간 마음이 상했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바로 한 게 있는데, 피겨스케이팅의 룰을 바꿨습니다. 그 전에는 예술성, 이런 거에 점수를 많이 줬는데 '이제는 회전을 더 많이 하는 사람에게 점수를 더 많이 준다' 이렇게 심사 기준을 바꿨어요. 왜냐하면 아사다마오가 회전을 잘 하는, 트리플 악셀을 당시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룰이 바뀌니까 그 다음에 재밌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선수들이 자기의 연기를 다시 디자인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는 선수들이 회전하는 것을, 안무에 많이 집어넣었어요. 왜냐하면 점수를 많이 주니까. 심판이 룰을 바꿔버리니까, 선수들의 안무도 따라서 다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심판이 누군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누가 심판관이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근데 불행하게도 아도니야 인생의 심판관은 사람이었어요.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평가가 그의 심판관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끝끝내 왕이 되려고 했던 거죠.
그에 반해서 다니엘의 심판관은 하나님이셨어요. 그래서 그는, 왕이 되지 않아도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여러분 인생에 심판관으로 두고 계십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은 누구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까? 사람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세상이 성공이라고 제시하는 기준에 맞춰서 여러분 인생을 디자인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게 성공적이고, 이게 옳은 것이다..' 거기에 맞춰서 디자인하십니까?
이것이 여러분을 카피캣으로 만들 것인지 오리지널 인생으로 만들 것인지 결정할 겁니다.
근데 제가 이 설교를 하면서도요.. 사실은 반신반의 해요. '이 설교를 듣고 과연 몇 명이나 카피캣에서 벗어나서 오리지널(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인생)로 들어설까?' 참 회의적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여러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서부터 벗어나라는 얘기인데 여러분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요?
그래서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을 얘기하고요. 넓은 문이 아니고 좁은 문을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이 가운데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충만함까지 도달하지 않을 거에요. 거기에 도달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거예요. 그 사람은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저는 예배 전에 기도하면서 '딱 한 명만이라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 했어요. 정말 이 말씀대로 순종하기는, 살아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와 인정이 더 중요하다고 절실히 느끼며 사는 성도, 여러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요즘같은 물질적, 세속적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어져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걸 벗어나는게 여러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주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3. 아도니야가 다윗의 카피캣으로 산 세 번째 이유는, 아도니야의 잘못된 자화상에 있었어요.
'나는 어떤 존재고 나는 누구인가?' 이 자아상은 우리의 데스티니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도니야는, 자기의 대해 잘못된 근거 없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왕상1: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였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존재야!' 라고 하는... 그냥 스스로 그렇게 높인 겁니다.
사단은 우리의 자화상을 속입니다. -근거 없이 자기를 높임으로 교만하게 하기도 하고요. -근거 없이 자기를 낮춤으로 좌절시키기도 하는데 근데 이 두 가지가 다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에요.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는, 나 스스로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나를 지으신 분이세요. 나를 창조하신 분만이, 내가 누군지 아시는 거고 나를 창조하신 분만이, 내가 어떤 어떤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아시는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내가 누군지 내 자아상이 정말 진리에 기초해서 형성되기 위해선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청종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왕이 되어야만 안심이 되고 만족이 되는 불안함 속에 갇혀있어야 됩니다. 왕이 안 되면.. '나는 실패한 존재가 의미 없는 존재야'
아담과 그 후손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써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형상으로서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고, 의미있는 존재다' 이런 건강한 자화상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되는데
자신의 존재를 자꾸 성취, 업적, 성과.. 이런 세속적 가치에 딱 갇혀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아도니야는, 자기 인생의 의미와 풍성함은 '왕이 되어야 주어진다'는 세속적 가치관 속에서 자기 인생을 파괴해 갔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삶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죠. 그것이 다윗의 데스티니 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거죠.
다윗이 괜찮은 삶이 됐던 이유는, 다윗이 왕이 됐기 때문이 아니고 그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디자인 이었기 때문이었죠.
생각해 보세요. 다니엘은 왕은 아니었지만 역시 괜찮은 삶을 살았어요. 꼭 왕이 되어야만, 괜찮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거죠.
반대로 사울왕 같은 경우에는, 왕이 됐지만 전혀 괜찮은 삶을 살지 못했어요.
다윗이 그의 데스티니의 길을 순종해서 갔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의미와 권위와 축복과 풍성함을 주신 것이지 무조건 왕이 됐기 때문에 주신 게 아니라는 거에요.
아도니야는 잘못된 자화상, 인생관을 갖고 있었던 거죠. 아도니야는 그저 다윗의 인생을 카피해서, 그가 누렸던 의미와 권위와 축복과 풍성함을 빌려오려고 했다는 거에요.
근데 인간은 '내가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 채워 채워지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자기 존재의 중요감과 안정감이 채워져야만 사람은 살 수 있는데.. 이게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근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요즘 대세인가요? 그러면 무작정 싸이를 따라가서 카피캣이 되려고 한다는 거죠... 잘못된 가치관, 인생관을 갖고 있기에, 남을 따라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만들어낸 어떤 삶의 의미들, 하나님의 축복, 인생의 풍성함... 그거는 못 보고 그 겉모습의 화려함만 카피하려는 거예요.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내 인생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내 인생도 충분히 행복하고, 그 가운데 풍성한 축복이 있다면 왜 다른 사람을 카피하려고 하겠어요?
▲마치는 말 여러분 '예수를 믿고 거듭난다'는 사실의 가장 본질은 즉 '내가 실제로 예수를 믿고 누리는 기독교인 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기준은
- '나는 무엇인가를 세상적으로 성취해서 존귀한 존재가 되느냐?' - or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는 거듭나서 자녀가 되었기에 이미 존귀한 존재냐?'
여기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되요. 인간의 머리로 그 대답을 못하죠. 성령이 가르쳐주셔서 우리는 확신하게 돼죠. 아도니야는 그게 안 되었던 거죠!
물론 우리 인생의 거듭나고 나서도, 이 싸움들이 계속 되기는 합니다. 그것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건 아니라도, 연부년 이 목표를 향하여, 그래서 결국 이 믿음에 서는 것이.. 우리 신앙의 일생의 여정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다고 하셨고,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그걸로 끝!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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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에는 ‘스프링 벅(spring buck)’이란 산양이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작은 무리를 지어 평화롭게 풀을 뜯다가 점점 큰 무리를 이루게 되면 아주 이상한 습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무리가 커지면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먹어버리고 결국 뒤쪽에 따라가는 양들이 뜯어먹을 풀이 없게 되자 좀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제일 뒤로 처진 양들은 다른 양들이 풀을 다 뜯어먹기 전에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모든 양들이 풀을 먹기 위해 경쟁적으로 앞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면 앞에 있는 양들은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내달립니다.
앞에서 뛰니 뒤에서도 따라 뛰고 그러다 보면 모두가 필사적으로 달음박질을 합니다. 결국 풀을 뜯으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다른 양들보다 앞서겠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뛰게 됩니다.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계속 뛰다가 절벽을 만나면 그대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