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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LNCK 2024. 4. 19. 15:4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로잔 운동>

 

오리엔테이션 2차 오프닝 메시지 - YouTube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행7:46~50

4차 로잔대회 오리엔테이션 2차 오프닝 메시지                

◑로잔 대회는, 세계 복음주의 선교 운동

4차 로잔 대회가 2024년 9월에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로잔 대회가 어떠한 역사적,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지 다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3차 로잔 케이프타운 대회 때,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에 참석했는데, 
아마 전 세계에서 로잔 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이런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잔 운동이 어떤 역사가 있고, 또 어떤 유산이 있고, 
또 이번 4차 대회에 어떤 중요한 이슈들이 있는지, 함께 공유함으로써 
여러분들께서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들 나누고 또 배우실 수 있도록 
준비위원회에서 준비했습니다. 

▲로잔 운동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4가지 키워드를 설명하면 됩니다. 
그것은 세계/ 복음주의/ 선교/ 운동 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 두 가지만, '복음주의' 와 '운동'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복음주의 Evangelicalism
복음주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즉 회심을 강조하는 운동입니다. 
사실 복음주의는 교단도 아니고, 어떤 신학의 한 분파라고 말하긴 힘들 정도로 
브로드한 개념인데, 

복음주의 시작이 18세기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주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그 이전까지는 '청교도주의' 라든지, 그 이전의 종교개혁에서는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을 강조했다면, 

복음주의는, 그것과 더불어서 
하나님과의, 살아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그러한 신앙운동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신학자 데이비드 배빙턴은,   David Bebbington 
복음주의를 네 가지 키워드로 요약했습니다.

①성경주의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무한 절대적인 규범과 진리로 믿는다. 

②십자가주의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다. 

③회심주의 
구원은 단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회심의 체험이 필요하다. 

④행동주의 
그렇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전도와 선교를 해야 한다.

배빙턴은 이렇게 4가지로 복음주의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복음주의 신앙을 relision of the heart 라고 부르죠. 
우리 마음의 신앙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사랑이 곧 우리가 선교에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2) 운동 Movement 
그러한 복음주의적인 유사함을 가지고 시작된 운동이 '로잔 운동'인데, 
우리가 '로잔 운동'이라 부르는 것처럼 로잔은 운동 즉 무브먼트이지요. 

'운동'과 대비되는 개념이 '제도 institution' 입니다.   *제도 또는 기관 
운동과 제도는 서로 대비되는 사역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운동은.. 공통의 비전에 근거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형태이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다 다른 단체와, 다른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내가 원해서 '세계복음화'라는 강력한 그 비전에 동의하기 때문에 
운동 movement 에 참석하셨습니다. 

반면에 제도는.. 규칙, 규정, 절차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제도이지요. 
제도는 과거로부터 받은 유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존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WCC가 어떤 제도, 352개의 세계 교단의 연합체로서 
제도의 모델을 보여준다면, 
로잔은 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도는 아젠다를 정할 때, 탑다운 top-down 으로 내려옵니다. 
위에서 아젠다를 정해서 그 아젠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라면, 

운동은 바로 바텀업 bottom-up 이죠. 
밑에서 실제로 사역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떠한 선교적인 전략과 필요를 느끼고 있는지 
함께 공유하고, 그것이 위로 올라가서, 전 세계 교회에 나눠지는 것이 운동의 형태입니다.

▲4차로잔대회를 위해서, 지난 2년간 전 세계에서 공청회가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 이 시대에 복음주의 선교에 있어서의 기회가 무엇인지? 
또 우리가 더 노력해야 될 갭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청회가 
전 세계에서 14차례에 있었고요. 
그것을 이끌었던 분이 문상철 원장님이고, 그 분께서 그 공청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실제로 사역하시는 분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 로잔 운동입니다. 
그래서 로잔은, 제도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세계복음화에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글로벌 플랫폼이죠. 
플랫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페이스북, 유튜브, 아마존... 다 플랫폼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 공간이 플랫폼인데, 
마찬가지로 로잔 운동은,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세계선교를 위한 비전과, 전략을 함께 공유하는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미전도 종족'이라는 개념이 처음 발표되었던 것이, 제1차 로잔 대회였고요. 
'10/40창' 이라는 개념이 처음 발표된 곳이 제2차 로잔대회였습니다.  *마닐라

'Business As Mission BAM' 은 이제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교 전략인데, 
이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었던 것이 제3차 로잔 대회였습니다.  *케이프타운

이런 중요한 선교 전략들이 제안되고, 채택되고, 공유되는 그런 플랫폼이 
바로 로잔 운동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또한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로잔 대회는 매 대회마다 오전에 성경강해 시간이 있습니다. 
이번 4차 대회의 성경강해 본문은 사도행전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전 세계로 나아가서 어떻게 사역을 섬겼는지,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말씀 가운데 도전을 받고자 하는데요. 

로잔 대회를 준비하는 한국 준비 위원회에서는 
<사도행전 공동설교 프로젝트>를 준비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목사님께서 귀하게 섬겨주고 계십니다. 
현재 온누리교회, 지구촌교회, 주안장로교회 등 전국의 많은 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본문을 '사도행전'으로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대구동신교회에서도 사도행전으로 주일 설교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범어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도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니까,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 있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성도님들이 너무너무 신기하면서도, 기대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면 개교회주의에 빠진 한국교회가, 공교회 정신을 회복하는 아주 좋은 계기라고 믿습니다.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7장 말씀은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고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스데반의 설교에 대해서는 
아시는 분도 계시고, 그러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 중에서 가장 긴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바울의 아테네 설교보다, 
행7장 스데반의 설교가 훨씬 더 길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7장 전체 내용을 알려면 ☞스데반의 설교 https://rfcdrfcd.tistory.com/15973054 

                                      ☞ 그 사람 스데반 rfcdrfcd.tistory.com/15981609

여기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인데,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는 
자기에 대한 거짓 고소에 대한, 자기 변증이거든요. 

유대인들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서 말했다' 라고 고소했기 때문에 
스데반이 '아니다. 나는 율법과 성전을 거스르지 않았다' 라고 반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데, 
특별히 '율법과 성전'이란 두 가지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은 그 중에서도 "성전"을 중심으로, 
스데반이 하나님의 어떠한 면을 강조하고자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을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84: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의 궁정, 그 성전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는 고백이죠.
성전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성전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갇혀 있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이사야 66장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행7:48~49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이 그분의 보좌요, 땅은 그 분의 발등상인데 
어떻게 인간이 만든 성전 안에 하나님을 가둘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성전 안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과 전통 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스데반이 선포하기를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곳으로도 하나님을 제한할 (가둘)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 눈에 보이는 성전과 전통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라는 외침입니다. 

영어 단어 중에 domesticate 단어가 있습니다. 
'동물을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입니다. 

야생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동물을,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서 
사람에게 순응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domesticate 라고 부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domesticate 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초월적인 그 하나님을, 나에게 익숙한 전통 안에 가두고,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도록.. 그렇게 조종하는 것입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 안에 갇힌 거인 지니 처럼 
하나님을 우리가 만든 제도 안에, 울타리 안에 가두고 
내 소원을 성취해주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행7장에 나와 있는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우리가 결단코 하나님을 domesticate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을 결코 이스라엘 안에, 성전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유심히 살펴보면, 한 가지 강조점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리적인 제약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행7장 앞부분에 보면, 여러가지 역사적인 예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 지역 안에 갇혀 있지 않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2절에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9절에 '요셉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다'
29절에 '모세가 미디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애굽, 미디안이 나오는데 
그 어느 곳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이방 땅이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면서 
그분의 구원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이고, 그의 발등상은 온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제약에도 갇힌 분이 아니시고요, 
어떠한 특정 민족만 사랑하시는 민족적인 구원자가 아니십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우주적인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 하나님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국가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한 교회, 한 교단, 혹은 한 단체보다도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혹은 우리 단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 있는 그곳에, 우리가 나아가 함께 동참하고 헌신할 때 
그때 부흥이 있고, 그때 회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영원하고 궁극적인 그 목적을 위해서, 사실 부흥이 필요한 것이죠. 
부흥 자체가 결단코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더 영원한 목적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 
하박국 2:14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우리가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선교의 시작은, 내가, 혹은 우리 단체가, 우리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인생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면 내 인생은 그렇게 길지도 않고, 그 영향력이 크지도 않기 때문이죠. 

제가 고등학생 때, 아주 신앙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너무 마음이 뜨거워서, 새벽마다 기도를 하고 
또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로 섬기고, 매일매일 큐티도 열심히 했습니다. 

제 신앙이 너무 뜨거워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날은,
절대 비를 안 내리실 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날씨가 흐려도, 제가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한 두 번은, 신기하게도 제가 우산을 안 가져가면, 그 날은 비가 오지 않았죠. 

근데 하루는 등교길에, 제가 우산을 안 가져갔는데도, 
비가 억수같이 와서, 제가 흠뻑 비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안에, 고등학생 때, 혼란스러웠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왜 내가 우산이 없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렸는가?' 

이렇게 제가 혼란스러워 할 때, 바로 그 다음날 
큐티책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중심으로 일주일 날씨를 계획하지 않으신다"

그때 제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구나.. 
하나님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운영하지 않으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관련글 : '하나님은 당신만 사랑하시나?' https://rfcdrfcd.tistory.com/15973323

여러분 세상에 중심에는 내가 있지 않고, 우리 교회, 혹은 우리 단체가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계신 줄로 믿습니다. 

내 삶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또한 심판하실 그 하나님께서 세상의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나를 중심으로 읽으면 해석되지 않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어느 단체에서 일해야 되는지, 어느 나라로 선교사로 나가야 하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마법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계시하는 생명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중심에 계신 그 하나님을 기준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내 인생을 바라볼 때 
그때 의미가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기준으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아야지.. 그 의미가 이해되지, 
영원하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영원한 것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템플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멤버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자기 멤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합니다. 

정부, 기업, 학교, 친목회는... 자기 멤버들의 유익을 위해 힘씁니다. 

예를 들어서 서울시청은, 서울시민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인천시민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교회는, 세상의 모든 단체와 달리, 
자기 멤버가 아닌 외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자기 존재 목적을 상실한 교회는,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금방 가라앉고,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교회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오셔서 우리 교회를 축복해 주세요. 
우리 교회가 성장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 
저는 이것이 가장 조심해야 될 일이라고 믿습니다. 

한국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개교의주의, 성장주의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큰 문제입니다. 

왜 개교회주의가 있을까요, 왜 성장주의가 있을까요?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 교회, 내 교회 안에 가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domesticate 하려고 하는 그 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령충만했던 스데반은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7:48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건물, 제도, 전통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곳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며,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선교가 무엇일까요? 
저는 선교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안전지대를 떠나는 것이.. 선교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안전지대가 있겠지요. 
내가 편안한 곳, 내게 익숙한 곳, 나와 신학적으로 동일한 곳, 
혹은 나와 사역 방법이 비슷한 곳... 그 안전지대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내가 이 안전지대를 떠나겠다고 결단하고, 기도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4차 로잔대회를 통해서,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이 선교의 비전이, 한국교회와 전 세계에 확산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