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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LNCK 2005. 11. 25. 15:18

◈자아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갈6:14          09.04.06.설교일부녹취 정리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예수님이 나의 주인/주님이 된 사람에게는

 

중요한 특징이 한 가지 나타나는데.. 자기 자아의 죽음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갈2:20)

 

다름 아닌 <내 자아의 죽음>입니다. 진짜로 죽으면 안 되잖아요!

 

 

자기 자아가 죽은 사람은

 

입술로 ‘나는 죽었다’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 소용이 없고,

 

나의 삶 속에서 ‘내 자아가 죽은 증거가 나타나야’ 하는데요..

 

 

 

 

◑1. 자아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비난을 받을 때.. 반응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전에는 누가 나에게, 안 좋은 말 한 마디만 던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자연인의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자연인은 자존심 하나로 사는 것이니까요!

 

 

자아 충만한 사람,

 

자아 중심인 사람은

 

자기 자존심이 약간이라도 건드려지면,

 

거의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아직 십자가에 안 죽었을 때는

 

과거에 우리가 모두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내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말이 아니라) 삶에서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은,

 

누가 자기를 비방하고, 공격해도.. 이제는 달라진 반응을 나타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성품으로 반응하는데요..

 

예수님은 맞받아치지 않으시고,

 

그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죄를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면서,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즉 ‘자아가 죽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장 사람들 눈에 확 띄는, 달라진 변화는

 

<주변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와 비난, 핍박에 대해>

 

거의 달관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자기가 죽지 못한 사람’을 분별하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고의적으로 한 번 툭 찔러보면 됩니다.

 

    ‘그 사람 참 형편없는 사람, 조심해야 할 사람이야!’ 이렇게 한 번 툭 던져보면,

 

    즉시로 독사가 머리를 드는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즉각 반격으로 나온다면

 

    ‘아직 자아가 죽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할 때

 

그때 자아가 죽은 사람은,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자기가 고통가운데 (고통을 안 느낀다는 뜻은 결코 아님) 기도하는 중에

 

그는 이런 내적음성을 듣습니다.

 

‘네 속에 있는 내가 고통을 당하노라. 내가 모욕을 당하노라!’

 

그것이 자기 속에 계신 주님이 함께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의 믿음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고,

 

주님과 깊은 교제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제부터 나는 죽고 예수로 삽니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형제들마저도, ‘정말 잘됐군요. 정말 부러워요. 저도 기도로 돕겠어요.’

 

이런 긍정적 반응이 나오기보다는,

 

 

‘저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정말 별나게 믿네. 자기 혼자만 예수를 잘 믿는 건가?’

 

이렇게 부정적 반응이 나오기 쉽습니다.

 

부모 형제들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자아가 죽은 사람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그런 부정적 반응 하나 하나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됩니다.

 

 

 

▲저도 여기저기서 부정적 반응을 듣습니다.

 

책도 쓰고, 알려지면서

 

저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들이 들려옵니다.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비난과 오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前과 같으면, 심하게 고통을 받았을 것인데

 

‘나는 죽었습니다’ 하며 기도하고 나면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성경에 주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잖아!’

 

도리어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너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잖아!

 

그때 천국에서 네 상급이 크다고 그러셨잖아!’

 

오히려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칭찬만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면, 즉 자아가 죽은 사람은

 

이제 칭찬만 듣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내가 잘한다는 평가만 듣기 원했습니다. (이것이 자아가 살아있는 증거죠)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섬기다가

 

오히려 욕을 먹고, 비방을 당하는 것을.. 괴롭지만.. 기쁘게 감내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유지해 나가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때 3차원이 아니라, 4차원적인 삶(성령에 취한 상태)을 사는 것이죠.

 

 

 

◑2. 자아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찾기로 작정하면, 세상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전에 내 자아로 살았을 때는,

 

그래서 타인에 대해,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저게 문제이고, 그 인간은 그게 문제야!’

 

 

 

교회에 가서 은혜 받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자동차에 타는 순간부터, 비난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그렇게라도 비난을 쏟아내야, 속이 좀 후련해지고,

 

남을 흉보는 재미가 솔솔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은 사람은

 

‘비난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얘기해야지,

 

나쁜 것은 나쁘다고 얘기해야지

 

그게 왜 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당신이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인 것처럼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정말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어떤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고,

 

그 허물과 죄를 지적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다시 못 박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이

 

    사고 친 아이 부모를 불러다 놓고

 

    그 부모 앞에서, 아이를 야단치고, 혼을 냅니다.

 

    그것은 사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 부모의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하지 못한 부모는, 막 화를 내며,

 

    오히려 선생님께 대들기까지 합니다.

 

    (부모-자식 관계라는 이유로)

 

    부모가 아이의 죄를 대신 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죄는 주님이 다 져주셨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는,

 

다른 사람의 죄도 주님이 다 져주신 것을 모릅니다.

 

 

자기 죄가 주님께 다 탕감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도 주님께 다 탕감 받은 사실을 인정해야지요.

 

 

 

예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자기 죄인 것처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의 죄를 비방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거나, 그 공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믿음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진짜 눈이 뜨이고 나면, 사실은 남의 죄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고, 자기가 탕감 받은 1만 달란트를 생각하면

 

자신 있게 다른 사람의 죄를 비난하고 지적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혹시 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비난하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은 아직 눈이 뜨이지 못했거나

 

아니면 과거에 눈을 떴어도, 현재는 믿음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실족한 상태인 것이지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는, 절대 타인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조용히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변화 중 한 가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의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3. 자아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세상 정욕에 대해 자신을 못 박았습니다.

 

 

 

 

 

◑4.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반응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로마에서 네로 황제로 인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서 도피하여 길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원해서, 그렇게 피신을 떠난 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교회의 머리인 베드로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로마를 급히 빠져 나오는데,

 

베드로 사도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로마로 급히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에 들어가노라."

 

(내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 지는 것을 외면하고,

 

그가 떠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들어간다.)

 

 

 

베드로가 그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를 당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기는 과정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때 고난을 피해서 도망가는 사람이 있고,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몸에 채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자아)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나(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므로

 

    고난이 올 때, 무조건 피해서 도망가지 않습니다.

 

    기도로 그것을 분변하면서, 내가 감당해야할 고난이면,

 

    그 속으로 기꺼이 들어갑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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