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 이어 Gap Year
경험이 쌓일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슬기를 깨칠수록 감정을 억제한다 잠17:27
인생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아서 뒤로 갈수록 빨리 풀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30대보다는 40대가, 40대보다 는 50대가 무섭게 빨리 지나가더라는 것이
인생선배들의 ‘증언’이고 보면 웃어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가장 천천히 지나가는 시절을 살고 있는 미국의 십대들은,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서 두려운 어른들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더 여유있게 산다.
이른바 ‘갭 이어(Gap Year)’ 즉,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 사이에
1년의 간격을 두고 다른 일을 해보는 것이다.
길고 긴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이라는 새로 운 세계로 뛰어들기 전에
‘외도’를 하는 십대들의 안식년 ‘갭 이어’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영국의 윌리엄 왕자도 3년 전에 했고,
해리 왕자도 이번 달에 시작한, 전통이 있는 관행이다.
그런데 요즘 미국에서도 ‘갭 이어’에 뛰어드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비행기에서 콜로라도주에 사는 자넷이라는 고등학교 2학년생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테디베어 인형을 안고 너덜너덜해진 ‘제인 에어’를 읽고 있던 자넷은 우등생 중 우등생이었다.
자넷은 지난 반년 동안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받았고,
일단 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은 후에는 일본에서 1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왜 대학교에 곧장 진학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넷은
“일단 대학 문을 들어서면 다른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 전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학점 따는 일에 골몰하다 대학을 마치고 취직 전선에 뛰어들어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엉뚱한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이 당돌한 여고생의 주장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자넷이 말한 것이 바로 ‘갭 이어’였던 것 이다.
미국의 대학들도 일단 합격한 학생들이 입학을 1년 연기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버드대학의 경우는 지적·정서적으로 성숙할 기회를 주는 갭 이어를 권장할 정도다.
요컨대 ‘너희들은 그동안 교실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으니,
잠시 나가서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강의실 로 돌아와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성인의 세계로 가는 첫 관문에서 얻은 자유를 ‘맛있게’ 요리한다.
남들은 대학 신입생이 되어 두꺼운 대학교재에 푹 파묻혀 있는 동안,
어떤 학생은 하와이의 돌고래 연구소에서 조수 일을 하고,
또 어떤 학생은 아프리카 여행에 나서기 위해 배낭을 꾸린다.
자원봉사활동도 하고, 환경보호운동도 한다.
외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후진국에 가서 빈곤층 어린이들을 돕기도 한다.
대입에서 과외 활동 점수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감 있게 오랫동안 해보는 것이다.
창의적인 ‘갭 이어’를 보내고 싶어 하는 십대들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들도 늘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학생들에게 대학의 자유를 누리기 전에 먼저 ‘낯선 곳에 가보라’고,
그리고 ‘어른스럽게 책임을 감당하는 역할을 해보라’고 권한다.
그런 활동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서 성숙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60세에 은퇴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시대에 이미 들어섰다.
100세까지 살 것에 대비, 젊어서 뼈 빠지게 일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시대가 온다.
그러니까 첫걸음은 더 신중해야 한다. 남들은 하지 않는 일을 하며 1년을 보내는 것이나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졸업 장을 받는 것이 긴긴 인생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 이다.
십대 후반에 더 넓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남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배우는 것.
오로지 대입을 목표로 살벌한 입시지옥에서 일로매진하는 한국의 입시생들이야말로
이런 선택과 선물이 필요한 것 같다. <2003-08-08 <조선일보>
*이 글이 한국적 입장에 잘 맞는지 안 맞는지 깊은 고려를 요함.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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