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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엘리사의 저주

LNCK 2006. 5. 25. 07:57

◈엘리사의 저주 (왕하 2:23-25)



▲난해 구절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그런 본문중의 하나이다.

이 본문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다.

쉽게 말하면, 엘리사를 보고 아이들이 “대머리, 대머리” 놀렸는데

엘리사가 저주했더니 곰들이 튀어 나와서 이 아이들을 다 찢었다.


이런 사건을 보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비판의 요지다. 너무 심하거나 잔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본문을 근거해서 설교자들이 설교하기를 무척 꺼린다.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처음 듣는 분도 아마 있을지도 모른다.

설교자들도 피해가는 본문, 사실 저도 설교하고 싶지 않은 본문이다. 


▲모든 성경은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라고 분명히 믿는다면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성경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전제 한다면,

비록 내가 소화하지 못할지라도, 또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이라 할지라도

이 말씀에 분명히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어떤 교훈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따라서 이 본문이 내가 좋아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해도,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다보면

우리 몸이 이상하게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내 몸이 좋아하지 않는 음식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먹을 필요 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런 유형이다.


◑본문 해석의 4가지 관점


▲1. 두 개의 ‘대조적인 기적’ 의 관점

왕하 2장 19-22절에, 여리고의 샘이 다 쓰게 먹지 못하게 되었다.

도시 전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나와서 좀 도와 달라고 고쳐달라고 호소했다.

엘리사는 그 샘물을 치유했던 기적을 이루었다. 


그것에 비해, 연이은 성경 본문(왕하 2:23-25)은 큰 대조를 이룬다.


①한 마디로, 하나는 살리는 기적 ↔ 죽이는 기적 의 대조이다.


      <왕하 2:19-22>                 <왕하 2:23-25>

치유의 기적(물을 치유) ↔ 심판의 기적(아이들을 저주)

        살리는 기적         ↔           죽이는 기적


사랑의 기적 ↔  공의의 기적 의 대조

우리는 선행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접근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여리고(저주받은 성읍에서 축복) ↔ 벧엘(축복받은 성읍에서 저주)

물샘을 치료했던 장소는 여리고 였다.

여리고는 과거에 여호수아에게 저주 받은 성읍이었다.  수 6:26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하는 과정에서 한번 저주를 받았던 성읍이었다.


벧엘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집(벧:집, 엘:하나님),

야곱이 들판에서 꿈꾸다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던 축복의 땅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행하는 기적은 저주 받은 성읍에서의 축복이고

오늘 본문은 축복받은 성읍에서의 저주의 사건이다.

정 반대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의 존경 ↔ 하나님의 사람의 모독

또 두 기적은 그 동기에서 서로 대조를 이룬다. 


선행하는 여리고의 기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는데서 시작됐다.

그를 통해서 우리의 도성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경에서부터 

그 기적은 시작된다.


그러나 벧엘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모독에서부터 시작된다.

모티브가 아주 대조적이다.



▲2. 보다 세밀한 관찰 에 의한 관점


아이들이 놀린 것 같고, 곰이 나타나 아이들을 찢고 죽이고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 해도 너무하신다. 하나님 정말 끔찍하시다. 

이것은 피상적 관찰이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보면 안 된다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일종의 조크(놀림)를 가지고

저주로 응수한 끔찍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아이들 왕하 2:23

우리 느낌에는 어린아이들로 여겨지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다 큰 청년까지 의미한다.


그래서 NIV는 youth : 청소년들이라 번역했고,

개역성경에는 ‘젊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본문에서 동정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이들’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린아이들이 아니다. 상당히 큰 아이들이다.

그저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조그만 아이들이 아니다.


②단순한 선지자 개인에 대한 놀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도전


‘대머리여 올라가라!’ 에서 ‘대머리’만 관심을 갖고 흥분하는데 왕하 2:23

‘올라가라’ 에 주목할 필요 있다. 왜 이런 표현을 아이들이 반복했을까? 


엘리사는 선지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엘리사는 누구의 뒤를 이었는가?  엘리아의 뒤를 이었다.

엘리야는 승천했다. 실제 본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여튼 소문은 자자했을 것이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여기서 조롱하는 사건에서

“너도 올라가라. 네 스승도 하늘로 올라갔잖아? 너도 올라가. 너도 꺼져!”

-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신 그 일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 기적을 믿지 않았을 뿐더러, 다시 재현해 보여 보라는 조롱이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도전이고 조롱이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엘리사가 그냥 저주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했다고 했다. 왕하 2:24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도전이었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꾸짖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어난 저주였고 기적이었다.

그저 단순한 선지자의 놀림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사역에 대한 도전이었다.


③우발적인 놀림이 아니라, 계획적인 위협이었다.

그들이 ‘성읍에서 나와’ 길을 가고 있는 엘리사에게 나왔다. 왕하 2:23


성읍, 도시 안에서 나와, 한적한 길을 가는 엘리사를 �아 나온 것은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 도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어딘가에 가고 있는데,

최소한 틴에이저이상, 20대의 젊은이들이

한사람이 아니라고 곰이 나와  찢은 사람들이 42명이라고 했다. 

찢기지 않은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면 5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홀로가고 있는 여러분들을 �고 있었어요. 

여러분들은 위협을 느꼈을까, 안 느꼈을까?


혼자 가다가 십대 2명만 �아 와도 섬뜻하다.

적어도 5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한적한 길에서 계속 한마디 말이

“대머리야 올라가라, 너도 올라가, 너도 너의 하나님께로 가!’ 라며

계속 뒤따라오고 있다. 어땠을까?  상당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젊은 깡패들의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너무하셨다는 생각이 드는가 안 드는가?


④ 찢었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죽음은 언급하지 않음

여기서 찢어 죽였다는 말이 없다. 그냥 찢었다고 했고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42명을 찢었더라고 했다. 어느 정도 상처를 주었는지 언급되어있지 않다.

충분히 경고를 줄만한 선에서 하나님이 끝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하나님이 너무하셨는가?


 

▲3. 이 기적이 필요했던 상황 의 관점

이 기적이 정말 필요했나?

우선 우리가 고려할 것은 이것이 엘리사의 초기 사역이라는 점이다.

처음 사역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먼저 필요한 것이 권위(authority)이다.


사역자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갖지 못할 때,

그의 사역은 형편없이 무시당할 수 있다. 그런 시점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이 종종 역사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서

사람의 관점에서는 좀 지나친, 그런 심판의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신 경우가

성경에 적지 않게 있다.


일례로 사도행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 앞에 속여서 바쳤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절반 바친 것도 잘한 일인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셨는가? 두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네가 성령을 속였다!”

이 한마디 사도의 선포 앞에 두 사람이 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하나님이 좀 너무하셨다.

목숨까지 가져가시는 것은 너무 하셨다, 하겠지만


그런데 이 상황은 초대교회가 막 시작되는 때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소위 교회 안에서 중요한 멤버 안에서 속이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될까? 교회의 거룩성이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교회 초기에 교회의 권위를 세우고 교회의 정결함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단의 특단의 조치로 해석한다. 특별한 심판이었다.


엘리사의 기적을 같은 맥락에서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엘리야를 뒤이어서, 엘리사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텐데

놀리고 조롱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만약 그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종의 권위를 세워 주셨다.


마지막으로 왜 이런 것을 성경에 기록했을까?


 

▲4. ‘교훈’ ‘레슨’의 관점 에서 이 기적을 해석하면

성경의 모든 기록은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다. 

그럼 어떤 교훈인가? 이 본문에서 배워야할 레슨이 무엇인가?
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①조롱의 위험 의 교훈

조롱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조롱의 위험성. 

여기에 나타난 사건은 조크의 수준이 아니다. 


특별히 신체에 대한 조롱을 조심해야한다.

어떤 사람의 신체에 대해 몸매에 대해...


우리 신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본인하고 상관이 없다.

그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어떤 이의 신체 특징에 대해 코멘트 할 때는 특별히 조심할 필요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머리 등)


우리 신체의 결함에 대해 조롱을 받았을 때, 그것이 깊이 상처가 된다.

평생의 상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결코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


함부로 대머리인 분에게 대머리라고 하지 마시라.

미에 대한 기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중국여행 중 양귀비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통 뚱뚱한 여자가 아니다. 옛날에는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현대에는 뚱뚱한 여자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져서

핸디캡이 아닐 수도 있다. 제 아내도 결혼 전에 뚱뚱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상대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것 조심하자.


②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중 의 교훈

엘리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세우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만약 그가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해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쓰시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 할 때 조심해야한다.


나는 목사가 특별히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똑같이 약점을 갖고 있고 똑같이 실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셨고 세우셨다면

하나님의 일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설교 별로 안하는 데 성경에 나와 있으니 한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시편105:15


그가 잘못하면 내(하나님)가 책임 질 테니까

네가 함부로 그를 조롱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구약이지 신약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신약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을 아시는지?

마태복음 10장 40-41절, 예수님이 당신의 종을 내보내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심부름을 위해서 그 사람을 보냈다면

하나님의 미션을 위해서 그 사람은 존중 돼야 한다는 말이다.


저도 목사지만 요즈음 가만히 보면 존경받을 수 없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추락시키는 종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매우 조심해야한다.


③사랑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엄위하신 하나님 의 교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 두개의 기적이 나란히 연속적으로 나온 것이다.


먼저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봤다.

샘물을 치료하는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도 분명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구약의 하나님은 그렇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 라고 하는데

로마서 11장 22절을 보시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 하심과 준엄 하심을 보라. (둘 다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심과,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우리 시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성도들 까지도

너무 쉽게 죄에 빠지고 너무 쉽게 하나님의 스탠다드에서 멀어지는 원인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룩한 사람의 인생의 열쇠는 무엇이냐?

거룩한 삶을 사는 열쇠는 -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 7:1


말할 때도 행동할 때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내가 서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 삶이 거룩함을 이루고 깨끗함을 입는다. 

심판의 교훈이 이 시대를 향한 우리의 교훈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 드린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6.01.29. *원제목 : 엘리사의 심판의 기적 (왕하 2:23-25)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872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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