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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

LNCK 2006. 5. 31. 06:33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    고전1:30       07.04.04. 설교 녹취



십자가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구경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달려서, 거기서 비참하게 죽어있는, 그 모습을 믿고/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1.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나님이 마음 놓고 내게 복 주신다.




▲십자가로 사는 사람에게만.. 십자가의 영광을 누린다.


이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주제를 <십자가의 능력과 그 영광>으로 정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정말 ‘능력과 영광’으로 보시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 드린다.




십자가를 능력과 영광으로 보려면, 먼저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는데,


그렇게 해야 비로소 십자가가 능력과 영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해결과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할 때, 십자가가 영광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내게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면.. 십자가가 ‘무거운 짐’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갈2:20


이 말씀도 내게 “아멘”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 고백은 사도바울이나 할 수 있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그에게 아무 능력/영광이 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제 자신도, 모태에서부터 신앙생활 해왔지만, 오래 동안 십자가가 영광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내 안에, 내가 정말 십자가를 지겠다는 마음 각오가 없었고,


십자가와 함께 죽은, ‘나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동안 십자가를 그저 바라만 보면서.. 신앙생활 해 왔던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그제야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고 누리는데,


십자가가 오히려 짐/부담으로 여겨졌으니.. 살살 피해서 다녔던 것이다.




▲장성한 신앙이 되고 나서, 세상 축복도 받게 된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 축복 받기 위해서, 잘 되기 위해서, 또 높아지기 위해서,


이런 세속적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러면 결코 십자가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더욱이 내가 바라던 축복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많은 성도들이 세상 축복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열심히 섬기는데,


실제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축복의 사람은..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축복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별 효험 없음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손만 바라보는 것과 같다.




물론 초신자일 때는, 하나님이 그런 신앙자세도 기꺼이 이해하시리라.


그가 아는 것이 ‘세상 축복’이 전부니까, 하나님도 용납해 주실 것이다.




우리 부모들도, 어린아이가 떼를 쓰면서 뭘 사달라고 하면.. 귀여워서 사 준다.


그런데 장성한 어른이, 여전히 욕심 부리고, 떼를 쓰면... 난감하고 보기 싫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지, <하나님의 손>이 아니다.




세상 복을 주고 싶어도 못 주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아시는가?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이 세상 복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주는 세상 복은... 그에게 복이 아니라,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 벌고 출세해서... 죄짓고, 망하고, 교만해지고, 타락하는 것을


우리가 실제로 주위에서 보고 있다.




물론 장성한 신앙이 되고 나서도, 십자가 복음대로 정확히 살고 나서도


세상 복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세상 복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복, 영광, 평안, 은혜>를 풍성히 주신다.


그래서 세상 복 받은 것 안 부럽게 산다.



사도 바울, 여러 순교자들, 특별히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에게 <세상 복>보다 말할 수 없이 더 귀중한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2. 내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죽어야 한다.








◑3. 내 실상이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나는 죽어야 한다.




내 비참한 실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길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나 자신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비참해진다.




저는 제 자신이 상당히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다.


그렇게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이 제 자신을 열어서 보게 하셨다.


제 자신이 비명소리가 질러질 만큼 더럽고, 추악하고, 음란하고, 정욕적이고,


가증하고, 교만하고, 욕심 많고, 거짓말하고.. 그게 나 자신이었다.




성령 체험할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먼저 회개케 하신다.


그런 비참한 나 자신이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숨기기 시작한다.


왜냐면 이전에 안 보이던 자기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다 서로를 숨기며 산다.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산다. 그래야 적당한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다 드러내었다가는 큰일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충 다 가리고, 숨기며 산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상태에서 예수 믿는 분이 많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비참한 것은 아는데, (은혜 조금 받아서)


그 결과, 철저히 숨기고 위장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의 삶은, 열등감, 두려움,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산다.


진짜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고, 다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나는 철저히 죽어야 한다.





◑4.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위해 ...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살면.. 창조의 원형이 회복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에덴동산이 회복된다.




▲안 죽으면.., 귀여운 새끼 호랑이가 커서 자연히 맹수가 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성품을 갖고 있다.


늘 교만하고, 늘 자랑하기 좋아하고,


그러다가 자기 자신의 실상을 한 번 보게 되면 완전히 좌절하고...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예수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것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황홀해지기 시작한다.




여러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태어난다. 죄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부터 모든 인류는,


어린 영아라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태어난다.


그래서 죄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점점 크면서 자기가 알아서 짓기 시작한다.


마치 호랑이 새끼가 귀여워도, 크면 무서운 맹수가 되는 것과 같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나면, 아담의 타락 이전, 창조 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즉 에덴동산 때 가졌던 그 ‘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놀란다.




타락한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 결코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내 진짜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평생 열등감, 좌절감,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은,


그 하나님의 형상을 아직 완전히 회복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저도 그랬고,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속에 기본적으로 열등감을 깔고 있다.


(그렇게 머리 나쁜 물고기, 새들도.. 열등감 없이 저렇게 잘 사는데...)


그래서 누가 내게 말 한 마디만 잘 못 해도, 마음이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른다.


아직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등감,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것은, 원래 내 모습이 아니다.


마귀로 인해 주어진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질 때,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형상’ 즉 원래 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5. ... 내가 죽고난 다음부터 이제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내 근본이 마귀로부터 타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내가 원래 비참한 죄인의 처지가 아니었다) 고전1:30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죽고 나면, 이 고전1:30절의 고백이 진짜 내 고백이 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산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구체적인 예


‘예수는 ...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은 내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내가 다시 사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말씀이다.




내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내가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이런 노력 강조는 율법주의로 빠진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이제 내 거룩함이 되었고,


그분의 의로움이 이제 내 의로움이 되는 이 역사가, 


<나는 죽고, 예수로 더불어 산 사람>에게 나타나는 역사다.


이게 자기에게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죄에서 용서해 주신 것 아니다.


단순히 십자가의 은혜는 그런 뜻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불쌍하게 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진리는


십자가의 오묘한 진리를 1/100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럼 십자가의 중요한 진리가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시려고,


(자식을 한 번 잃어버려 보셨나요? 죽어가는 자기 자식을 한 번 보셨나요?)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단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였다.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진리는


- 그 잃어버린 자녀/죽어가는 자녀를.. 다시 생명으로 되살리고/회복시키는 것이다.




▲질문 : ‘예수 믿어도, 나는 아직까지 내 혈기, 정욕, 과거 본성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목사님은 왜 자꾸 <죽었다고 여기라>고 하십니까?




여러분, 자기 어린아이를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이 아이가 고아처럼 길거리에서 살았다.


그러니 행색이 남루하고 더러운 것은 둘째 치고,


보고 배운 게 없으니, 교양이 엉망이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나서 자기 아이를 되찾았는데,


하루라도 집에서 같이 지내보면, 자기 아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그의 말, 태도, 생활습관을 보면, 우리 집에서 크는 다른 아이와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내 아들인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었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루아침에 확 변화되지 않는다.


여전히 과거의 죄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지혜, 거룩함, 의로움이 되셨다고 여기며 살아야 한다.



왜냐면 나의 신분이, 예수의 생명을 받은, 예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점점 연단/성화되어 간다.




그렇게 10년 만에 자기 집/자기 아빠에게 되돌아온 아이가


하루 속히 그 집에 적응하는 길은


느낌은 안 오더라도, 자기 입술로 자꾸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그 분의 아들이야, 그 분은 내 아버지야..,’ 


그래야 점점 변화되는 것이지, 자기 느낌대로 살면 적응 못하고 가출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안 죽었어요, 나는 여전히 옛날 그대로예요’


만약 늘 이렇게 고백하며 산다면, 진짜 그렇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예수님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나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갈2:20


이제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고전1:30a


예수님이 이제 나의 생명이시고, 내 거룩함, 내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고전1:30b


이렇게 고백하면서 살다보면, 점점 그 고백대로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다.


그저 십자가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쳐다보고 지날 것인가?



아니면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당당히 고백하고, 믿고,


그 십자가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가 나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이 되시는 삶을 살 것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 ‘믿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끝으로,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은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걱정/염려하지 않는다.


날마다 아침에 자기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여쭈어 보면 된다.


‘예수님, 오늘 하루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주님은 뭐 하기 원하시나요?’


그러면 주님이 내 속에서 지시해 주신다...




그리고 굶기나/살리나... 예수님께 다 맡겨버리시라.


자기가 죽은 사람은... 염려 안 한다.


최악의 상황에 혹시 가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면서 받아들이면 된다.



굶는 상황이 필요하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로 인도하시고,


유족한 상황이 필요하면, 그리로도 인도하실 것이다.


그냥 맡기고 살면 된다.



가난하고/유족한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무슨 길이든지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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