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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의 기도 눅11:2, 갈4:6 도서 스크랩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중
기도의 진정성은 ‘마음으로 간절히’ 드려지는 데 있다.
통성기도든지, 묵상기도든지 중요한 것은 ‘간절한 마음’인데
어떻게 그런 기도의 간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1. 아바의 기도
마음의 기도는 "아바"의 기도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6
당신은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 체험이 있는가?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과의 깊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이다.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물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103:13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어머니라는 말도 사용하신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사66:13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깜짝 놀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부모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새로운 개인적이고 친밀한 방법으로 부르라는 권유이다.
제자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반응에 말문이 막혔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저 이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눅11:2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했던 충실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같이 친근하게 하나님을 부른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바abba와 이마imma -아빠와 엄마- 는 유대의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다.
그리고 아바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친근한 용어이기 때문에
온 우주의 위대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그 누구도 그 말을 감히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하신 것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유대 문학을 다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아바(아빠)로 부른 예는 단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놀라운 친밀함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12살 때 이미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의 육신의 부모님께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9 말씀하셨다.
18년 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눅3:22
다시 변화산 위의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막9:7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서의 놀라운 변화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친밀함을 체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체험하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이상의 것들은 물론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깊고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사역 속에 깃들어 있다.
존 달림플(John Dalrymple)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계속적인 아바 체험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아셨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그 친밀한 관계를 우리도 똑같이 누리도록 초청 받는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무릎에 앉아
그의 사랑과 위로와 치유와 힘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마음대로 웃을 수도 있고, 공공연하게 울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 품에 안길 수도, 위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경배할 수도 있다.
◑2.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기도
‘마음의 기도(진정한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기도의 세 단계를 말하였다.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범주화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기도에 도달하게 되면
성령이 기도의 주도자가 되시는 수준에 들어가신다는 사실이다.
마음의 기도를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계속하게 하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마음의 기도에 들어서면, 우리는 자아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해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는 쓰지만 잘 안 된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개입하시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때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그 영을 통해
'아바 아버지' 라 부르게 된다. 롬8:17-26)
◑3. 마음의 기도의 다양한 외적 표현
마음의 기도를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이러한 역사를 너무 세심하게 분류하거나 구별할 수 없다.
그렇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레마(말씀)를 통한 기도
우리가 기도할 때, 특별한 깨달음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 올 때가 있다.
그것은 자기에게 직접 오기도 하고, 연합 기도 중에 타인을 통해서 오기도 한다.
‘기도응답 받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런 어떤 깨달음의 말씀을 받으면, 확신이 생기고, 더욱 기도에 탄력을 얻으며
받은 말씀을 주장하며 기도하게 된다.
▲방언을 통한 기도
방언은 마음의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갑자기 기도 중에 깊은 방언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의 입술을 빌어 방언으로 내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롬8:26
‘방언기도’를 가리킨다고 본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의 톤tone은 평상시 톤이 아니다.
어떤 격정적인 기도의 톤이 생긴다.
▲'웃음, 미소, 기쁨' 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환희의 웃음이 퍼져 나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저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다.
때때로 이 기쁨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중에 체험하기도 하지만,
모인 회중에게 임하는 경우도 더 많다. 그것은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웃음이란 것은 결국 공동체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웃는 사람들이 술 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들은 취한 것이다. 성령에 취한 것이다.
이런 체험을 통해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치유해 주신다.
종종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슬픔과 애통함이
거룩한 웃음을 통해 은혜를 받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주제별 분류] 기 도 http://blog.daum.net/bible3/10089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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