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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9:1~24 하나님이 알아주신다

LNCK 2006. 12. 13. 19:29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    시139:1~24     2006.12.07.녹취 *원제목 : 주님에게 배우라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또는 ‘아버지 말고는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

구절들을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좀 더 깊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1.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비밀

 

미국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아버지가 제일 잘 아신다!’는 말이 있다.

Father knows best! - 아버지 의견이 대개 항상 옳다는 뜻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연속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정말 아들을 아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진정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시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역시 자녀인 우리들도 정말 잘 아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믿음의 기초단계로서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잘 아시는가 하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더 먼저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가깝게 지내기를 정말 기뻐하시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승리의 비결

예수님의 공생애 때,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와 배척을 받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묵묵히 지시고, 최후까지 승리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또한 인정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나를 몰라주어도, 아무도 내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심지어는 내 육신의 부모, 내 배우자, 내 자녀까지도 나를 몰라주어도

그래서 간혹 내가 슬플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알고(인정 포함)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란다.

 

사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그 익명성은 (편할 수도 있지만)

공포로 내게 다가 올수도 있고, 외로움으로 나를 낙심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거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 He knows you(me)! 이다.

 

▲다윗의 역경 중 승리의 비결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시고, 이름도 아시고, 사랑하시고, 동행하신다.

저는 강사로 와서, 여러분을 거의 모르고, 알아도 피상적으로 알다가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주신다.

 

이것이 지난 수 천 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 여정에 승리한 비결이다.

다윗도 이 비밀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139:1~6

 

이것이 오랜 세월 고난을 당한 다윗의 승리의 비결이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아신다, 알아주신다는 것이다.

 

 

◑2. 혼혈아로 자라는 고난 중에 깨닫다

 

저는 한국에서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았다.

저는 한국인(김장환 목사님)과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기 때문에

생김새가 전형적인 한국학생들과 조금 달랐다. 그래서인지

제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저를 모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저는 그들을 다 몰랐지만, 전교생 2천 여 명이 모두 저를 알았다.

 

제가 느끼기에, 수원 시민들 모두가 저를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게 괴로운 것은, 그들은 진정한 저를 모르면서

그저 피상적으로만 저를 안다는 것이었다.

 

저는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사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특히 저를 부를 때 ‘튀기, 뺑코, 아이노쿠’ 등으로 불렀다. 

저를 안다는 것이 그저 '혼혈아' 정도로 아는 것이니, 매우 가슴 아팠다.

 

▲쉽게 라벨 붙이지 맙시다!

이렇게 우리는 사람들에게 쉽게 어떤 꼬리표label를 붙이는 습성이 있다.

자기 멋대로 분류categorize해서 그를 이해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사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게 된다.

 

‘장애인, 사생아, 고졸, 이혼녀, 호남사람, 칭스(중국인, 동양인 비하의 뜻)’ 등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을 제멋대로 쉽게 분류하고, 그런 선입견으로 쳐다본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기를 스스로 차단하고 거부해 버린다.

 

 

하나님은 그렇게 피상적으로 우리를 보시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을 보시고, 있는 그대로 봐 주시고, 진정으로 우리를 깊이 아신다.

 

지금은 하인스 워드의 방한 이후, 혼혈아들이 좀 인정받는 세상이 되었지만

제가 자랄 때만해도 혼혈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매우 편협 적이었다.

 

사람들의 병폐는 ‘쟤는 아무게 인종이야!’ 이렇게 라벨붙이고 차별화categorize

하고는, 더 이상 그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깊이 알고계신다.

세상과 우리를 창조하기 이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시고, 더 알아주신다.

이 사실이 얼마나 우리가 건강한 자아를 갖도록 도와주는지...

 

▲초등학교 4학년의 추억

혼혈아로 자라는 큰 충격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제가 4학년이 된 첫날, 선생님은 내일부터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날 저는 어머니랑 수원영동시장에 가서 양은nickel 도시락 통을 구입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도시락을 신문지에 싸서 제 책가방에

넣어주셨다. 저는 난생 처음 도시락을 싸간다는 흥분에 약간 들떠있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너 무슨 반찬 싸왔어?’ 서로 질문했다.

 

당시는 아직 한국이 가난했던지라, 넉넉지 못한 집 아이의 도시락반찬은

콩자반이었다. 그는 부끄러운지 도시락을 책상 아래로 감추며 먹었다.

 

방앗간 집 아이는 좀 넉넉했는지 쌀밥에 계란후라이를 덮고, 장조림을 싸왔다.  

그는 매우 의기양양했다. 친구들이 그의 반찬을 빼앗아먹으려 했다.

 

저는 제 도시락에 무슨 반찬이 들었는지, 어머니가 무엇을 싸 주셨는지

무척 궁금했다. 두껑을 열어보니 그것은 햄과 치즈가 들은 샌드위치였다!

어머니는 제가 장남이라고 무척 사랑해주셨고,

집에서 제가 잘 먹던 샌드위치를 특별히 점심으로 싸주신 것이다.

 

당시는 1970년대 초, 한국 제 또래 아이들은 샌드위치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수원에 롯데리아 등 햄버거 집이 들어온 것이 1985년 이후였다.

반 아이들 60명의 눈 120개가 동그랗게 커져서 일제히 그 샌드위치에 주목했다.

 

저는 도저히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모두 다 저를 쳐다보는데 어떻게...

저는 그날 도시락을 못 먹고 집으로 도로 가져왔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신 어머니 품에 안겨 울며 원망했다.

‘샌드위치 싸 줘서 나 망신당했어, 나 학교 안 가!’

 

저는 차라리 그 때 미국에서 살았으면 더 편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엄마 품에 안겨 울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미국인 여자로서 수원에 사시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다.

‘어머니는 왜 미국에 가지 않고, 한국에 살아요?’ 나는 물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 이란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내가 고통으로 인해 엉엉 울며 괴로워하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어머니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은 평생 잊지 못하고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예수님은 네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단다!

예수님은 네가 누구인지 알고 계셔! 너의 고통과 겪는 고난도 다 알고 계셔!

예수님이 너를 이 모습으로 창조하셨단다, 그리고 그런 너를 정말 사랑하신단다!’

 

당시 저는 10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는데,

 

비록 제 마음에 큰 고통이 있었지만

세상에 아무도 제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았고,

저 자신 역시 저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은 제가 누구인지 아시고 이해해 주신다는 사실에

저는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그 날 제 구주로 영접했다.

(마음에 큰 고통이 도리어 일찍 주님을 알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다음에는 변화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는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달려가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말 변한 것이 있었다.

주님이 내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하시고, 내 고통을 아시고, 나를 아신다는 것이

내 삶에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여전히 괴로운 환경이었지만 말이다.

외부적으로 변한 것은 없지만, 환경을 극복하려는 내 마음이 점점 변화되었다.

 

▲주님이 저를 알아주신다는 비밀

그 후 저는 점점 깨달았다.

내가 물론 혼혈이지만 한국 사람처럼 그대로 살려고 애쓰고 발버둥치는데,

나의 태어난 근본은 절대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는 다른 한국 사람처럼 똑같이 살고 싶었다. 그들과 다르기를 원치 않았다.

제 코가 높은 것이 문제니까, 온돌방에 잘 때 엎드려 코를 땅에 쳐 박고 잤다.

그러면 코가 좀 낮아질 줄 기대했다.

 

어떤 때는 제 금발 머리가 그들과 달라 보이는 게 싫어서

검은 연탄에 제 머리에 부비기도 했다.(지금은 염색하고 다닌다)

 

한국에 아무도, 내가 겪는 고통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저는 제 어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하나님, 당신은 잘못하셨습니다!

왜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저를 이렇게 혼혈로 태어나게 하셨나요?’

 

내가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하나님은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나를 쉽게 이해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이해해 주시고,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알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이다.

내 이름, 내 생각, 내 고통, 내 걱정, 내 눈물, 내 한숨, 내 출입, 내 모든 것!

 

그 진리를 내가 절실히 깨닫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하며

이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첫걸음이요, 가장 기초가 되는 믿음의 토대이다.

 

이 믿음이 조금 더 발전하면.., 내 기도제목을 올리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내 기도제목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다.

나를 누구보다 더 깊이 아시고, 나를 누구보다 더 알아주신다.

 

그래서 이제 아들인 우리도 아버지를 알게(또는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를 아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 사실이 내 삶을 변화시킨다. 이 사실이 복음인 것이다.

 

▲나도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즐거워하고, 기도응답 주심을 기뻐한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주시는 존재’로만 여기고

그분에게서 얻는 혜택을 어떻게해서든지 많이 받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진정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당신을 알(아가)기 원하신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의 고백이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빌3:8, 10

 

그렇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께 무슨 부탁해서 무슨 혜택을 얻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그것은 더 사랑한다는 뜻이요, 더 닮아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분과 더 친밀해 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연애할 때

당신의 연인이, 당신에게 항상 뭘 부탁하고 뭘 타내어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서로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친밀해 지기를 원하는가?

물론 사랑하는 자에게는 주님은 아끼지 않고 다 주실 것이다.

그러나 먼저는 사랑이고, 서로 앎이다. 매우 친밀한 관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