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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예수님의 마음 읽기

LNCK 2006. 12. 22. 20:14
 

◈예수님의 마음 읽기             빌2:5~11          06.12.17.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원제목 : 문 두드리는 소리: ‘마음 된 교회’를 위하여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5~11


▲예수님의 마음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본질을 나타내기에 그렇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마음을 올곧게 알아내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인물을 따르는 제자들은 좌파로 그리고 우파로 갈라지게 되지요.


예수의 마음읽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 탄생을 기리는 이 계절에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우리 가슴으로 깨닫는 일에 분주해야 할 터인데,

예수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은 아예 실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탄절은 예수의 참 마음을 올곧게 이해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 마음1 - 자기 낮춤


▲예수 마음 = 자기 낮춤

원래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습니다.

예수는 자기 속에 신성(神性)을 본질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마음은 이 신성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성을 짐짓 드러내거나 자랑하거나 광고하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가 하나님과 동등함을 낚아채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데도 동등함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의 진정이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충동에 빠져

사탄의 유혹에 빠졌던 아담과 이브가 예수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점이 신과 같은 절대 권력을 탐하는

우리 인간들과 다른 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자기에게 약간의 신비한 능력만 있으면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경지에 오른 참된 영성은 ‘자연스런 인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차이에 주목해야 합니다.

神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과,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神간의 엄청난 차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神이 되고 싶어 안달합니다.

그런데 정작 참 신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려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정말 부끄럽게 합니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신은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한 존재입니다.

이런 神은 곧 인사(人事, greeting)를 즐겨하는 겸손의 신입니다.

인사는 서로 몸을 낮추어 절하며 자연스럽게 상대를 높이는 몸짓입니다.

 

한문의 人이라는 글자는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어 타인을 존중하는

두 존재가 마주 서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될 때 서로 절(인사)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고파하는 겸손의 신은 사람들에게 절하고자 합니다.

절 뿐이겠습니까? 낮고 천한 사람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시려 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 주셨지요.


예수의 神性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는 그 천한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그들에게 새 존재로서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마음을 지니신

지극히 인간적인 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낮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사회의 낙오자들을 쉽게 무시하거나

열등인간으로 판단하지는 않나요? 예수처럼 낮아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낮아지신 주님을 영접하라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시는 예수의 모습,

낮아지시려는 예수의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를 저 높은 곳, 저 거룩하고 거룩한 곳으로 쫓아 올려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경건한 예배의식을 통해, 그를 지극히 높디높은 곳으로 모시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되고파하신 神이 얼마나 섭섭하고 불편해 하시겠습니까.

경건한 종교의식으로 자기를 왕따 시키는 교인들의 모습,

특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경건하게 따돌리는데 열렬한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시지 않겠습니까?

“왜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나!”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우리 곁에 조용히 다가오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神인 예수를, 친구 예수를, 섬기는 종 예수를,

우리는 따뜻하게 맞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그 분을 경건의 이름으로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그 분의 진정을, 그 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그 낮춤의 마음을 말입니다.



◑예수님 마음2 - 자기 비움


낮춤과 비움은 항상 함께 갑니다.

비움 없는 낮춤은 한낱 허례허식일 뿐입니다. 위선일 뿐입니다.

참 낮춤은 언제나 자기 비움으로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비워야합니까?


▲탐욕을 비워라

먼저 내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나쁜 것을 비워 제거해야합니다.

탐욕과 독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이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는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탐욕과 독선의 시련을 몸소 겪었습니다. 끝없는 물질적 욕구,

막강한 지배 욕심, 불사(不死)의 종교적 탐욕으로 시달렸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이 시험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그의 공적 사역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그의 하나님다움은 이 같은 탐욕의 비움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의 대부분은 지도자들이 이 같은 탐욕과 독선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같은 유혹에 함몰되게 되면

처럼 행세하고파하는 유아독존적 추악한 인간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탐욕이 있으니까 괴롭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밑바닥에서 언제나 꿈틀거리고 있는

탐욕, 독선, 교만의 달콤함을 비워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잠 못 이루는 긴 밤을 보내며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이 유혹을 비워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저도 잠을 못 이뤄 몸을 뒤척일 때, 무슨 욕심 때문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불타는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집어 던져 활활 불태우듯,

내 욕심 하나하나를 영적 불 아궁이에 던져 봅니다.


명예욕, 물욕을 위시한 자질구레한 욕심들을 하나하나 불구덩이에 던지는

모습을 내 마음속에 떠올리며 스르르 잠들게 됩니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자기들의 서러움과 한(恨)을 중얼대며

쇠죽 끓이는 부엌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집어던져 넣듯 말입니다.


▲좋은 것을 비우는 것 - 나눔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좋은 것은 어떻게 비워야하나요?

좋은 것을 비운다 함은 버림이 아니라 나눔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눔으로 비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동의 선순환이 작동됩니다. 비움과 나눔이 남을 채워주면,

감동의 파장이 일어나면서 채움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또 나눔을 통해 되갚거나

다른 남들에게 나눠줄 것입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회관계, 곧 평화의 관계가 들어서게 됩니다.

비움 → 나눔 → 채움 → 감동 파장 → 서로 채움

이렇게 평화 만들기 작업이 선순환으로 작동되지요.


▲아내를 치료해 주다가 내가 치료받다 

저는 이런 선순환의 힘을 제 아내와의 관계에서 느낍니다.

아내는 때때로 어깨와 등이 굳어지는 아픔을 하소연합니다.

파스 같은 현대 의약품으로도 쉽게 낫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등이나 어깨의 딱딱해진 부분을 지압하게 되면,

제 어깨가 아파오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아내가 가장 아픈 곳, 가장 딱딱하게 굳어버린 부분을 누를 때마다,

내 위는 격동합니다. 저절로 껄껄하는 위 용트림의 소리가 나오게 되지요.


아내는 내 위의 용트림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바로 그곳이 아파요. 그곳을 더 세게 눌러주세요!”하고 소리 지르지요.

한 10분 지압하고 나면, 내 손가락 끝은 빨갛게 변하는데,

그럴수록 내 위의 상태는 한결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내 힘을 비워 아내와 나누는 것이 따지고 보면 내 병을 고치는 일이 되지요.

이 때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아,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는 것이 극히 피곤 한 일이지만,

남을 낫게 하시므로 당신의 건강이 날로 더 좋아지겠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렇게 분주했음에도 그렇게 건강하실 수 있었구나.”


▲낮춤과 비움의 결과 - 서로 채움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마음의 효능을 깨닫게 됩니다.

낮춤과 나눔은 감동을 불러 일으켜 상대 채움과 서로 채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은 자아실현만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나음(치유와 건강)의 상태로 올라가는 효능을 낳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타실현(自他實現)의 효과이지요.


그리고 자기부정을 통해 남을 감동시키면서

서로 채움과 서로 살림의 효능을 낳지요.

이것이 바로 상생(相生)과 부활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듯 말입니다.

예수마음은 자기 비움자기 부정의 힘이지요.

그래서 남을 살리게 되는 생명의 힘이지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 같은 예수마음을 뜨겁게 깨닫고 받아들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나를 낮추고 비웠는데... 그도 살아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도리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3 - 초지일관의 철저함


▲악한 방법을 쓰려는 충동을 극복하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철저하게 낮춤비움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삶은 한두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고 나누고 비우는 긴 과정이었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계속 끝까지, 십자가 까지 철저했을까요?


선(善)이 악과 마주칠 때, 악의 방법을 활용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악한 방법을 쓰는 순간, 선은 악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주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철저하게 낮춤과 비움을 실천하신 까닭은

악의 방법, 악의 전술을 끝까지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끝까지 힘없이, 맥없이 체포당하시고, 구금당하시고, 재판받으시고,

수모를 겪으면서 골고다에서 처형당하는 길을 선택하셨지요.


그가 체포당하실 때, 그의 수제자는 적의 하수인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오히려 나무라시고,

자신은 그 칼의 세력에 의해 죽는 길, 십자가 처형 길로 의연히 나아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처절한 패배요, 철저한 패배였지요.


그러나 그 길이 바로 부활에 이르는 길이요,

최후 승리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기 힘든 길입니다.


▲주님의 도우시는 은총

그러나 가는 길에 놀라운 힘이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제 경험을 들려 드리는 것을 이해해 주신다면,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1980년 초여름 당시,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에서 갇혀 있었습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거의 2달 동안 지옥 심문을 받고 거의 초죽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때 몰래 훔쳐 읽었던 성서 말씀이 나에게 용기와 희망,

그리고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성서 읽기는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성서는 꿀맛같이 달다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겼던 저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사도행전 20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성서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은 자기가 3년간 공들여 섬겼던 예배소 교회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서 환난당할 것을 그들에게 알리고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것임을 알립니다. 20:36~3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끓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바울이 곧 죽을 것 같아서)

그들은 배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하였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는 순간, 나도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설교자가 당시 거기서 죽어서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바울과 동일시?)

저는 하염없이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수사 받는 신분이어서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열했지요.


내 몸은 비록 중앙정보부 지하2층 수사실에 갇혀 있었으나

내 마음은 바울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울면서 그 시간에 주님이 주시는 힘과 용기, 희망과 믿음으로

1980년, 그 긴 지옥의 나날을 이기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고난의 길에서

바울을 통해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뜨거운 힘으로, 저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同苦愛의 예수께서 십자가 길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와

자기의 힘을 비워 나눠주시면서 함께 걸어가는 同苦行의 벗이 되어 주시지요.


▲마치는 말 :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성탄절

이렇게 겸손하게 낮춤과 비움으로 철저하게 살았기에, 그리고 죽었기에,

마침내 예수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높이 영광을 받게 되셨지요,


그러나 그렇게 영광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셨다고 하여 주님은

증오와 진노의 신, 복수와 심판의 神으로 군림하시지 않습니다.

더욱 겸손하게 엠마오로 가는 길에 찾아오시어

실망과 좌절에 빠졌던 제자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깨달음을 주셨지요.


크리스마스를 맞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셨으나 저 높은 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낮춤과 비움으로 다정하게 다가오시어,

완고하게 닫혀있는 우리 마음의 문

조용히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만나야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 겸손에 변화 받아, 낮춤과 비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 예수 탄생의 뜻은 되살아납니다.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주의 몸된 교회임을 자랑하는 기독교가

예수의 마음을 이해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몸 된 교회’라는 뜻은 <마음된 교회>라는 뜻입니다.


낮춤과 비움을 죽기까지 실천하시어 마침내 부활에 이르게 되신

예수의 그 마음을 본받는 <마음된 교회>로 거듭나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