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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필드와 웨슬리 엡2:20 편집자/ 도서요약
J. C. Ryle「18세기 영국의 영적 거성들」중에서 읽고 편집.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0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1714-1770)와 존 웨슬리(1703-1791)는
같은 영국 사람이요, 동시대 사람이다.
웨슬리가 휫필드의 장례식에 조사를 할 정도였다.
두 사람은 18세기 당시 잠든 영국을 일깨우는 사명을 감당했는데,
그들 두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자 대조점은
휫필드는 주로 '설교'에 있었고,
웨슬리는 주로 '조직'에 있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조지 휫필드
▲노천 설교 방식 채택
휫필드는 노천 설교를 유행시킨 분으로 유명하다.
오늘날로 치면 광장이나 스타디움에서 모이는 방식이다.
그 이유는,
①기존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다.
국교회는 사람들의 술취함과 불경건함에 함구하고 있었다.
휫필드는 세례교인들도 거듭나야 한다고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광신자로 취급하며,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②주일날 마음놓고 교회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 부적응자들은 선뜻 교회 못간다.
휫필드는 산과 길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내집을 채우라는 말씀대로,
교회 가지 못하고 산과 길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을 노천 예배당에 불러모았다.
특히 당시에 무시 받던 사회 저변층 광부들에게,
휫필드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갔다.
③후에 그가 유명해지자, 수 천 명씩 모여드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어쩔 수없이 노천을 택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복음 전하는 자' evangelist
휫필드의 가장 큰 특색은 한 마디로 '복음전하는 자'였다. 엡4:11
이것은 웨슬리가 '사도'인 것과 대비된다.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에 휫필드가 찾아가지 않은 도시와 마을은 없었다.
국교회가 그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면, 그는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에게 교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는 노천에서 설교했다.
그는 34년 동안 약1만8천 번의 설교를 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하루에 약 2번씩 설교한 셈이 된다.
특히 당시의 여행수단(말)이나 도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그는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후11:26
물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13차례나 설교하러 떠났다.
한번은 아일랜드에 갔다가, 더블린에서 가톨릭 폭도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가 노천설교를 중단한 것은, 오직 겨울이라는 날씨 때문이었다.
▲조직하지 않은 휫필드
웨슬리가 '조직'의 대가인 반면, (그래서 감리교를 조직함)
휫필드는 자기 추종자들을 절대 조직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빌리 그레함 같은 복음전도자들은 조직하지 않는다.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지만, 결국에 사람들을 지역 교회로 인도한다.
칼빈이나 존 번연은 주로 '책으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반면에 휫필드에게는 그런 자신의 저서도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날 휫필드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렵다고 한다. 자료가 없다)
이 말은, 그가 오직 '복음 전도'에만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는 것이다.
'조직'도 하지 않고
'책'도 쓰지 않고
오직 '전도 설교' 하나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웅변speech의 은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그의 업적
①그는 16세기에 있었던 위대한 종교개혁의 불길을
18세기 영국에서 재 점화시킨 인물이다.
종교개혁이 2세기가 지나면서 그 사상과 진리의 중요성이 퇴색되어 갈 때
그는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그의 직접적인 설교를 통해 회심한 대중들보다도
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 목회자들이
영국에 새로운 종교개혁적 불길을 일으켰는데,
그들의 개혁적 신학적 주장은 바로 휫필드에게서 영향 받은 것이었다.
이런 그의 '간접'사역이, 대중전도라는 '직접'사역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②가식 없는 눈물을 가진 뜨거운 마음
그의 후반기 전도 여행에 수차례 동행했던 코넬리우스 윈터는
휫필드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설교를 마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설교에는 칼빈주의적인 논리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③초인적인 열정
이 점은 웨슬리와 또한 모든 대가들과 공통된 점이다.
보통 헌신자들이 1년에 걸쳐서 할 일을, 휫필드는 단 몇 주 만에 감당했다.
④자기 부인과 겸손
그는 개인적으로 쓰라고 들어온 7천 파운드를 거절한 적도 있었다.
재산을 모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자녀가 없어서, 큰 재산도 필요 없었다.
한참 루터가 활동할 때, 교황은 그에 대해
"이 독일 동물은 금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휫필드 역시 그런 청빈한 루터를 본 받았다.
잘 알려진 일화로, 어떤 신학교수가 그에게
"당신은 천국에서 웨슬리를 볼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묻자
(당시 휫필드는 칼빈주의, 웨슬리는 그 반대를 전파한다고 소문났었다.)
'천국에서 웨슬리는 주님 가까이에 있고,
저는 웨슬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마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할 만큼 겸손했다.
◑존 웨슬리
▲조직의 대가(좋은 뜻)
그는 학창시절부터 '홀리 클럽'을 만들어서 학생신앙운동을 전개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각자에게 다르다.
휫필드의 주무기가 '설교'였다면,
웨슬리의 주무기는 '조직'이었다.
웨슬리가 설교를 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실한 마음의 설교가 늘 전달되었지만
웨슬리가 영향을 끼친 것은 설교보다는 '조직'을 통해서였다.
우리에게는 그가 말을 타고 수 십만 마일을 여행하며 설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휫필드와 다른 점은
그는 여행하면서 조직을 만들고 정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관리와 운영'은 웨슬리의 탁월한 점이었다. '조직의 대가'였다.
(웨슬리가 극심한 반대를 받은 것은 이런 조직력 때문이 가장 컸다.
국교회가 자기 세력을 점점 빼앗기니까, 그를 극렬히 비난했다.)
그는 추종자들을 묶고 그들 가운데 지도자를 세우고
그들의 은사를 발견해서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인도하고
특히 그는 '자기 은사에 집중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당시에는 흔치 않던 말이었다.
(이런 은사는 '사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휫필드가 '복음전하는 자'인 반면, 웨슬리는 '사도'였던 것이다.
동시대에 하나님은 여러 은사자들을 부르신다.
번연이나 칼빈은 주로 저서로 활동했는데, '선지자'로 볼 수 있다. 엡4:11)
(그래서 웨스리의 설교는 매우 '단순'했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만을 전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설교시간에 너무 소리를 지르지 말 것을 늘 당부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사42:2절을 단골로 인용했다고 한다.)
▲알미니안 이라는 비난
이것은 한 마디로 '오해'이다.
그가 자유의지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휫필드의 칼빈주의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다 믿고, 거기에다 자유의지를 하나 더 보태서 전파한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주의가 약간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에도 여러 주장의 좋은 점들을 모두 수용하는 '종합 신학' 자세를
유지하는 분들이 있는데, 올바른 자세라고 본다.)
▲메쏘디즘 전파
그가 조직의 대가라는 점은, '메쏘디즘' Methodism에서도 잘 드러난다.
메쏘디즘 즉, '감리'한다는 말은 '방법론'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목회방법론(메뉴얼)을 간결하게 정리해서 제시했다.
쉽게 말하면, 전도의 원칙 10가지, 목회자의 기본 정신 몇 가지,
신자의 의무 몇 가지 등등 모든 분야에 대해 방법론(메뉴얼)을 만들어서
달달 암기시켰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도록 훈련시켰다.
그냥 '구역을 인도해라'가 아니고,
실제로 구역을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매뉴얼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웨슬리가 체계화시킨 메쏘디즘이다.
확실히 휫필드가 칼빈주의적 '원리'에 충실했다면
웨슬리는 그 모든 신학을 종합해서 '실천화, 실제화' 시켰다.
평신도 제자훈련과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이 감리교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마치는 말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을 부르셔서 다양하게 쓰신다.
'사도', '복음전하는자', '선지자' 은사를 한 몸에 모두 가질 수는 없다.
설교도 잘하고, 조직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나온 적이 없다고 본다.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휫필드가 신학, 원리적 측면에 강했던 반면에
웨슬리는 실천, 적용적 측면에 강했다.
휫필드가 설교에 강했던 반면,
웨슬리는 조직에 강했다.
우리 각자도 자기가 부르심 받은 대로 살면 된다.
모든 분야를 다 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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