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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참된 부흥 분별 법 / 조나단 에드워즈의

LNCK 2007. 2. 3. 13:38

www.youtube.com/watch?v=ALgXfsa4tgo

조나단 에드워즈의「성령의 역사 분별 법」     마16:3        *출처:  백금산 목사 번역글 축약

에 나타난 참된 부흥 분별 법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16:3 

 

체험적 신앙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부흥은 본질상 많은 체험을 동반하게 된다.

체험적 신앙은 부흥 운동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경험하는 모든 체험을

참된 신앙 체험 혹은 부흥 체험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체험적 신앙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다.

즉 성령에 의한 체험일 수도 있고, 악령에 의한 체험일 수도 있다.

또는 인간 본성의 법칙(감정?)에 의한 자연적인 체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체험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체험가운데서 어떤 체험을

과연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1741년 발간된 조나단 에드워즈의「성령의 역사 분별 법」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답을 제시해주는 교회사의 명작이다.

 

 

◑1. 이 책이 발간된 역사적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살았던 18세기는

교회사적으로 위대한 부흥시대, 영적 대각성의 시대였다.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 등이 영국 출신이라면,

동시대에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이들이 18세기 대각성의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에드워즈는 미국 메사추세츠주 노스햄턴Northampton에서

약23년 간 목회 기간 중(1727-1750) 2번의 부흥을 경험했다.

 

에드워즈의 탁월한 점은 자신이 체험한 이러한 부흥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변호하는 부흥에 대한 일련의 중요한 저술들을 쏟아냄으로써

부흥신학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1737년,「놀라운 회심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1741년,「성령의 역사 분별 법」The Distinguishing Marks,

1742년, 「균형 잡힌 부흥론」Some Thought concerning the Revival,

1746년, 「신앙 감정론」The Religious Affections

등의 연속적인 부흥 신학 시리즈를 발간함으로써

교회사에서 최초로 부흥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구속사적 의미,

부흥 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체험의 범위와 깊이 등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했다.

 

▲1. 에드워즈의 1st 부흥 체험, 코네티컷 강변 마을 중심으로(1734~35)

에드워즈가 체험한 첫 번째 부흥은

1734~35년에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스햄턴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 근처에 흐르는 코네티컷 강변에 있는 마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경험한 이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에 대한 이야기를

1737년「놀라운 회심 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로 발간했다.

 

(이 책은 18세기 대부흥 운동과 관련된 공식적인 첫 번째 부흥문서가 되어

대서양  지역에서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불씨 역할을 했다.)

 

△에드워즈의 2nd 부흥 체험, 제1차 대각성 운동, (1740~42)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42년, 생애 두 번째로

오늘날 우리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 부르는 놀라운 부흥을 체험했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규모면에서 약4~5년 전의 코네티컷 부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부흥이었다.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은 말 그대로

코네티컷 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이라면,

‘1차 대각성 운동’은 식민지 13개 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 부흥이었고,

특히 뉴잉글랜드 전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조지 휫필드의 미국 순회집회 (1739.10.30~1741.1.16)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인물은 영국인 조지 휫필드였다.(1714~1771) 

1735년 부활절 몇 주 후에 일어난 21살 조지 휫필드의 회심은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미국 등 18세기 영국과 미국에

대 부흥의 신호탄이자 도화선이 되었다. 

 

휫필드는 회심이후 약 34년간 영국 전역과 웨일즈는 물론이고,

미국을 7번 방문, 스코틀랜드를 14번 방문하며

약1만8천여 회의 설교를 통해 영미 전체 지역 부흥의 불씨가 되었고,

활활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휫필드의 7번에 걸친 미국 방문 중에서

두 번째 미국 방문 기간(1739.10.30~1741.1.16, 25-27세) 중에 일어났다.

휫필드가 13개 미국 식민지 전체를 돌며 순회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다.

 

1740년 가을에는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 6개 지역의 통칭) 지방을

73일 동안 8백 마일을 여행하면서 130회에 걸쳐 설교를 했다.

 

휫필드의 이 뉴잉글랜드 순회 설교 기간 중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옮겨 붙기 시작했고,

1740. 10. 7일부터 4일간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스햄턴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노스햄턴은

다시금 옛날 1734~35년의 부흥 때와 같은 은혜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휫필드는  뉴헤이븐New Haven에 있는 예일 대학에서도 설교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큰 감화를 받았다.

이 때 휫필드의 설교로 큰 감화를 받은 학생중의 한 명이

후에 유명한 인디언 선교사가 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였다.

이후 휫필드는 1741년 1월 16일, 미국 2차 방문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3. 길버트 티넌트의 순회 설교와 反부흥주의 발생

휫필드의 뒤를 이어 뉴잉글랜드 지방에 부흥의 불길을

계속해서 부채질한 사람은 길버트 티넌트(1703~64)였다.

 

길버트 티넌트는, 휫필드가 1740년 10월에 뉴잉글랜드 지방에 붙여놓은

부흥의 불길을 1740년 12월부터 약 3개월 동안

강력한 설교를 통하여 더욱 활활 타게 만들었다.

 

길버트 티넌트의 사역은 많은 회심자를 얻는 결실을 가져왔고,

부흥의 열기를 더 한층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환상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등의

열광주의적인 반응으로 인한 부작용도 생겨나면서

사람들 속에 휫필드의 순회설교 때 싹텄던 反부흥주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절정기 : 1741년

이렇게 휫필드와 길버트 티넌트 등의 사역으로 불붙기 시작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흥은 여러 지역 목회자들에 의해

1741년 4월에는 20여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여름에는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중 에드워즈는 여러 지역으로 순회설교를 다니게 되었고,

특히 1741년 7월 8일 엔필드에서 행한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는

이후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1741년8~9월에 부흥은 최고봉에 이르렀다.

 

▲4. 데이븐포터의 극단적 사역이 反부흥주의를 발전시킴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친 열광주의로 인해 오히려 부흥에 찬물을 끼얹고

反부흥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사건이 생겨났다.

 

이러한 열광주의를 일으킨 대표적인 사람이 제임스 데이븐포트

(James Davenport, 1716-57)였다.

 

데이븐포트는 1732년 16살에 예일 대를 졸업하여, 

1738년 22살 때 목사안수를 받았다.

 

1740년 휫필드의  놀라운 성공 소식에 깊은 열등감을 가진 그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24시간 연속집회를 가졌다.

여기서부터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데이븐포트는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형제’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웃’들이라 불렀다.(극단적이다.) 

이후 인근마을들을 돌며 설교하기 시작했다.

 

1741년 여름, 하나님이 자신을 더 큰 일을 위하여

목회지를 떠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그는 코네티컷 지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여러 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데이븐포트는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며 회심여부를 판단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들에 대해서(대부분이 그랬다)

공개적으로 회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회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사를 무시하며,

교회에서 떠나서 나올 것을 촉구했다.

데이븐포트의 이런 극단적 설교는 많은 안티 부흥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9월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역사 분별 법」을 설교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에드워즈는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부흥 시 발생하는 강력한 체험,

특히 부흥에 대한 열광주의적인 극단으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현상들을 보고

부흥 자체까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증거를 살펴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부흥임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교에 대해 예일대 학생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나

교수진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후 부흥운동에 대한 친부흥파와 반부흥파의 분열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법」은

바로 이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보스턴에서 발간된 초판은 다음과 같은 긴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 분별 법: 특히 부흥에 동반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여

최근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타났던 비범한 일에 적용함」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Applied to That Uncommon Operation That Has Lately Appeared

on the Minds of Many of People of this Land:

With a Particular Consideration of the Extraordinary Circumstances

with Which This Work Is Attended

 

 

◑2.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할 수 없는 기준 9가지 (책 내용)

 

이 9가지는 당시 反부흥주의자들이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근거로 제시한 기준들이었다.

 

 

에드워즈는 반부흥운동 지지자들이 제시한 9가지 기준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주장대로 그것들이 '참 성령의 부흥의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참 성령의 부흥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음을 변론한 것이다.

 

그래서 9가지 이러한 기준들은 '중립적'이다.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이러한 일들은 9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만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또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를 구분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1.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

이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 때 일어나는 비범하고 특별한 일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옛날에 없었던 일이라고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새로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다.

 

성경의 계시 역사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등은

모두 이전에 비해 비범하고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2. 몸에 특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

즉 눈물을 펑펑 쏟고,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하는 것 등인데,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 때 발생하는 이런 몸의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법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충격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람은 너무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실실할 수 있다.

또한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실신할 수도 있다.

따라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면 몸에도 영향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지옥을 체험했을 때,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체험했을 때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몸에 어떤 특별한 현상이 생겼다고 해서

이것만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혹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3. 기독교에 대한 이슈가 사회에 공론화되는 것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 때 일어난 현상으로

사회가 온통 '소란스럽게 된다'는 것을 들어서

지금의 부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잘못된 것이다.

부흥으로 인해 교회는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초대교회 때도 그랬다. 교회가 변화될 때,

교회의 변화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오히려 정상적인 것 아닌가?

부흥이 일어나면 사회에도 이슈가 된다.

 

(그러나 이슈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부흥이 일어난 증거는 아니다.

여기 9가지 기준은 모두 ‘중립적’인 판단이다.

이런 판단을 통해 꼭 부흥이다/아니다를 분별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아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이렇게 반박한 것이다)

 

▲4. 상상력에 큰 영향을 받는 것. 즉 환상을 보거나 하는 것

인간의 마음은 어떤 강력한 영향을 받을 때, 상상력이 크게 자극된다.

 

따라서 상상력이 크게 자극받아 심상에 어떤 강력한 인상이 새겨지고

때로는 환상을 보는 것을 두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인지에 대한 분별 기준을 삼을 수 없다.

 

▲5. 다른 사람을 보고 따라 하는 것

부흥을 반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부흥 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기 때문에(방언, 환상 등)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일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를 부인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영향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는 것만 가지고서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되지 못한다.

 

성경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을 적극 권면하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모범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행동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6. 때로 지혜롭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

사람들 속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여 있다.

또한 구원받은 한 개인 안에도 여전히 죄의 세력은 잔존하고 있다.

 

따라서 부흥 때 어떤 사람이 때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고,

때로 실수를 한다고 해서

부흥의 모든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베드로 사도까지 실수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또한 고린도 교회 안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 않았는가?

 

▲7.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분별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실수하는 것을 보니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데, 아니다.

은혜 받은 사람도 잘못할 수 있다. 그것만 가지고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은혜와 죄가 공존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8.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가룟 유다를 보라. 초대교회의 니골라를 보라.

때로 부흥운동의 지도자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거나

이단으로 변질되는 사태가 있다고 해서,

전체 부흥운동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

 

▲9. 많은 목회자들이 율법설교, 지옥설교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지옥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무덤덤하게 지옥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지옥이 있다면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을 피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불타는 집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 때,

어떻게 말해줄 것인가?

 

이것은 물론 율법만 설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 죄와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이상 9가지의 에드워즈의 중립적 증거는

부흥반대주의자와 부흥열광주의자의 양극단에 대한

효과적 방어책이었다.

 

▲당시 열광주의자들은 위의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 것을 (인위적으로) 촉구했다.

 

이에 대해 주로 지성적인 사람들은, 그런 부흥운동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에드워즈는, 위의 9가지 기준들은

꼭 부흥운동의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꼭 부흥운동의 증거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며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3.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들

혹은 5가지 바른 분별기준 (책 내용)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바른 기준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5가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반드시 동반되는 일이다.

사탄은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긍정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러한 5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다.

 

▲1. 성령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높인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다.

예수님 충만하지 않은 성령 충만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성령운동이 일어날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나 체험에만 몰두하고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사역이 강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예수충만이다.

 

▲2. 성령은 성경을 높여준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말씀을 사랑하게 해 준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다.

 

만일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말씀을 등한시하는 영이 있다면

그는 분명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성경이외의 다른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만드는

각종 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비주의가 바로 이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반드시 말씀충만 임을 명심하자.

성령과 성경은 언제나 함께 간다.

 

▲3.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즉 교리와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성경 속에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간다.

 

만일 어떠한 운동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무시하게 만든다면,

또한 기본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시킨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보기 힘들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종교개혁시기와 부흥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신앙고백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진리충만이요, 교리충만이요, 신학충만이라 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4.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로 이끈다.

그리고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한다.

 

성령은 우리가 깨달은 진리, 성경, 예수님을 통하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한다. 하나님을 닮도록 한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운동이나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더욱 성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회개충만, 거룩충만이라 할 수 있다.

 

▲5.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한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사랑의 역사로 이어진다.

성령 충만은 곧 사랑충만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역사인 '사랑 충만'만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관심 없는 종교중독자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인간만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본주의도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필수 요소들이 모두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예수님 충만, 성경 충만, 진리 충만,

거룩 충만, 사랑 충만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운동이나 현상도

우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분별할 수 있다.

 

 

◑4. 세 부류 사람들에 대해 권고

 

당시에 일어난 어떤 열광적 움직임(1차 대각성 운동)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제대로 된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해서

*부흥운동에 찬성하는 사람들,

*부흥운동에 부정적인 사람들,

*부흥운동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로 나눠져 있었다.

 

에드워즈는 이 책을 통해, 당시 부흥운동이 위 5가기 근거에 의해

성령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각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권고했다.

 

▲1. 부흥운동에 반대하는(부정적인) 사람들에게 권고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반대사유는

부흥 때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죄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지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졌을 때,

이런 외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실수를 문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만을 가지고 부흥 전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목욕물이 더럽다고 버리려고 하다가,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부흥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고

에드워즈는 중립파에 대해서,

그들이 찬성과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함을 경고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해온 역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유대인들이 거부했다.

 

따라서 현재의 부흥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침묵하고 있는 것도, 곧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걸림돌(부정적 측면)만 보고 듣게 될 것이다.

 

사실은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것에 대해 부지런히 조사하지는 않고 있다.

이렇게 중립을 표방한 것은, 사실상의 거부나 마찬가지다 라고 주장했다.

 

▲3. 부흥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고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권고한다.

 

부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특별히 3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①내적 충동이나 직통계시나 예언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은사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은혜다.

은사는 은혜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은사는 무익하다.

 

은사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

은사를 통해서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면,

그 외적인 은사의 나타남만으로는 성령충만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외적 은사의 나타남은 반드시

내적 인격의 열매와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

외적 은사에만 집착하는 성령운동은, 시일이 지나면 반드시 실패한다. 

 

②두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목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되었지, 공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이들에게 공부시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는 주장과 같다.

 

4살짜리 아이와 30살짜리 교육을 잘 받은 성인이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 사역에 더 유용한 사람이 되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받은 성인이다.

 

공부와 교육이란 그런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크게 사용된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목사가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어느 사람이 성도를 가르치고 세우는데 유용하게 쓰임 받겠는가?

 

이런 면에서 독서와 공부가 없는 목회자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은 거의 모두가

독서와 공부의 대가들이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되지, 공부는 왜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신앙적인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되었지 설교준비는 왜 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다. 

 

③세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이다.

상대방이 구원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지를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만이 하시는 권한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또는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의 회심여부를 손쉽게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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