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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552 야베스는 존귀한 자라

LNCK 2007. 2. 23. 23:26
 

◈야베스는 존귀한 자라        대상4:9~10



▲시중에 야베스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릅니다.

꿈을 주는 야베스의 기도, 다시 쓰는 야베스의 기도,

묵상을 위한 야베스의 기도, 청소년을 위한 야베스의 기도,

여성을 위한 야베스의 기도, 어린이를 위한 야베스의 기도,

학령 전 어린이를 위한 야베스의 기도까지 나옵니다.

이토록 많은 인기를 구가하는 책은 또 없을 듯싶습니다.


라디오를 틀면 '야베스의 기도' 찬양이 나옵니다.

안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왜 이토록야베스의 기도」가 인기를 끕니까?

이유는 단 하납니다.

기도응답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품는 기도의 양만큼 기도응답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의 양이 적어서, 적은 만큼밖에 응답 못 받았으니,

지경을 넓혀서 더 넓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럼 다 응답된다는 겁니다.


정말 그런지, 오늘 성경 본문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시간에 '야베스 기도'의 실체를 다시금 정확히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성경의 저자는 야베스의 인생을 단 두절로 기록한 것은  대상4:9~10

아마도 그에 관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야기를 썼을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야베스’는 남성 형이므로, 야베스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야베스’라고 불렀을까요?


▲‘야베스’의 뜻은 ‘고통’

그런데 야베스는 참 엉망으로 지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이 뜻은 수고로이 낳았다는 말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고통가운데서 낳았다는 이름입니다.

 

야베스(고통)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대상4:9


다시 말하면,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이라는 말을 변형시킨 이름입니다.

아니, 아이의 이름을 ‘고통’이라고 짓다니요!

아무리 힘들게 낳아도, 아들을 ‘고통’이라고 짓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김고통, 이괴롬, 박아픔이라고 이름지어서

평생 동안 부르게 만드는 것은, 부모의 올바른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을 정도인 것을 보면

이 아이가 정말 '죽을 고생해서 힘들게 낳은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이 아이를 키우는 일도 힘들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낳는 것과 키우는 것이 고통이었던,

그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 따르는 아이였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어머니만 나오고, 아버지가 거론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어머니 혼자 스스로 그 고통을 모두 감내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야베스는 중증 장애우?

야베스가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볼 때,

또한 그의 기도(10절)를 볼 때

그의 인생이 지독하게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왜 그런 어려운 상황이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인 장애인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만약 야베스가 장애인이었다면, 그것도 증세가 심한 장애인으로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도 고통스러웠지만,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고통스러웠던 것이 그의 기도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이 이해가 됩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아이도 힘들고,

그런 아이를 낳는 것도 힘들지만, 키우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기에

참 힘들었다는 것이 더더욱 이해가 갑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중증장애우를 둔 가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내용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①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②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③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④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10

 


①“주님께서 제게 복을 주신다면...”

그의 기도는 히브리어 문장으로 말끝을 흐리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라고 번역했습니다.


야베스는 “내게 복에 복(큰 복)을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복을 주셨으면...” 하고 말끝을 흐리며,

자기의 아픈 마음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기도 자체가 아픔에 휩싸여 있습니다.


②그리고 이어서 “당신이 내 영역을 넓혀 주시기만 한다면..” 하고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아마 육체의 장애(또는 다른 가시)로 인해, 넓게 활동할 수 없는데,

자기 영역을 넓혀 달라는 요청은, 장애를 극복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제 힘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제게 여러 가지 장애가 많기 때문인 거 아시죠?

나를 가로 막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이 장애물을 제거해 주세요.

그래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주세요.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하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나 야베스는 아픔을 가지고, 간절하게

연약한 사람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말을 흐려가면서 기도하듯이

그렇게 눈물로 아픔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③그리고 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 주님의 손이 나와 함께 해 달라는 뜻인데, 

손을 내밀어서 넘어진 나를 일으켜 달라는 뜻도 됩니다.


기진맥진한 채 땅에 얼굴을 파묻히고 있는 자신을 일으켜서 달라고,

정상적으로 다닐 수 있도록, 정상인으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④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벗어나게’ 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재난으로부터...해 주세요 ”입니다.


구원해(벗어나게 해)달라고 강하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할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절절한 아픔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근심을 없게 해달라는 것은 그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근심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아무 누구에게도 고통을 당하지 말게 해 주십시오' 라는 뜻도 됩니다.

 

(참고로, 여기뿐 아니라 모든 원어해석은 해석적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⑤하나님은 우리 신음에 귀 기울이십니다.

고통 속에 태어나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며,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 그가 바로 야베스입니다.


고통 덩어리, 누가 보아도 고통덩어리로만 보이는 짐스러운 사람,

지겨운 사람,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부담만을 언제나 주는 사람,

바로 야베스입니다.


비참함과 슬픔과 아픔과 고통으로 인생이 점철되어진 인생입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야하고, 그렇게 불리며 살아야 했던 사람,

바로 야베스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기도합니다.

‘내게 복을 주시고, 지경을 넓혀주시고, 주의 손으로 도우사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주기만 한다면...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경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눈물 가운데 간절하게 구한 것들이 직접 다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열심히 했기에

그 모든 고통이 제거되고 환경과 한계를 모두 극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야베스는 존귀한 자라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대상4:9, 개역.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대상4:9, 표준새번역



▲야베스는 존귀한 자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봅시다.

오늘 야베스를 성경 저자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도의 사람, 기도를 이룬 기도의 사람이라고 기억합니까?

오히려 존귀한 자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서 자기의 목적만 달성했던 자라면

존귀한 자라고 여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 문제만을 가지고 기도해서 그 기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기도의 사람으로는 기억될지 몰라도

존귀한 자라고 여김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존경과 우러러볼만한 인생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존귀한 자’가 야베스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키포인트입니다.

아파도 아픈 사람으로 여김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장애인인데, 장애인을 뛰어 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장애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존귀한 자라고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인생을 넘어서 고통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몸이 나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고통이 있지만, 고통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야베스는 역경의 처지에서도, 눈물겹게 꿋꿋이 살아감으로써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살아간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인생,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눈물겹게 살아갑니까?

어제 실패했다고 오늘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지는 않으셨습니까?


어제도 실패했지만 오늘도 실패했지만 그래도 내일은 성공하기위해

고통스런 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야베스가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

일본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팔과 다리는 10cm에 불가했습니다.

아니, 10cm에 불과한 팔 다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굼벵이처럼 몸둥이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남들과는 다른 초개성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난 또 다른 개성을 가졌는데

초개성적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뺨과 어깨사이에 연필을 끼워 글을 썼습니다.

가위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다른 쪽을 어깨로 누른 채 얼굴을 돌려가며

종이를 잘랐습니다.

양쪽 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볼 했습니다,

겨드랑이로 철봉을 껴 앉고 하는 턱걸이를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주눅 들기는커녕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휠체어의 왕자, 나폴레옹이라 별명 지워 졌습니다.


그는 출판 6개월간 260만여 부의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을 쓴

오토다케 히로타다입니다.

오토다케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부모님과 주위의 배려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지가 없는 아이를 출산 후 한 달 만에 본 어머니의 첫마디는

“아, 귀여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존재를 알리려 일부러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갔습니다.

초등학교 은사 다카기 선생은 자원해서 4년간 담임을 맡아주었습니다.

이런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한 의지와 눈물겨운 노력과 함께 주위의 도움이었습니다.


▲존귀한 자=영광스러운 자

‘존귀한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영광이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부분 하나님께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며, 상당한 힘을 가졌을 때 사용되는 단어로,

보통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수식어로 쓰여지는 단어가 ‘영광’입니다.

단순히 직위가 놓은 사람이 아니라,

야베스가 ‘존경받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베스 생각하면 ‘영광이다!’ 이런 말입니다.

아마 성경의 저자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야베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존귀한 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러러 보이는 남자’,

‘영광스럽게 여겨지던 사람’, 저자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대상4:9~10절의 뉘앙스는, 야베스가 고통 중에 태어났지만,(9절)

그가 계속 고통 중에 살았음을 말해줍니다.(10절)

물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했지만(10절),

그의 육체(또는 어떤 문제)가 완전히 치료 되었다기보다는,

그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어떤 ‘사는 법, 극복하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몸(만약 장애우가 아니라면 삶의 여건)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 더 이상 육신(여건)은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오히려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그는 영광이었다!’고 인정되는 인물입니다.(↔고통)

오늘의 본문은 기도를 주제로한 본문이 아닙니다.

열정적인 인생을 주제로 하는 본문입니다.

열광적으로 살아갔던 한 인간의 애절한 삶의 간증입니다.


단순히 복에 복을 더 받아 챙기는 기도가 아니라,

고통의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준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존귀한 자다. 영광이다!’ 말하는 겁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각자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고

또 어떤 아픔을 지금 겪고 있는지요?

그러나 야베스는 그것을 극복해 나갑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아픔을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주님께 한탄하고, 주님을 저주하며,

왜 이런 인생을 만들었느냐고 부정하지 마십시오.

왜 이 모양 이 꼴로 나를 만들었습니까?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난 겁니까?

왜 나의 형편은 이러합니까?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그렇게만 살아가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주님이 우리 편이신 것을 아시고,

눈물이 나서 앞을 가려도 이겨나가십시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영광스런 사람 야베스처럼,

마치 영웅적인 인생을 살아갔던 야베스처럼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원문 출처 : http://blog.naver.com/kaikk/70012928209

 

 

[주제별 분류] 고난의 신학 http://blog.daum.net/bible3/1096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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