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뇌를 이해하는 신앙인 눅22:44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인간이 가진 고뇌를 깊이 이해합니다.
저도 믿음이 더욱 깊어져서, 인간의 고뇌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너와 함께 있다
성전을 신축할 때 컨테이너 생활을 하였습니다.
냉난방 없이 여름과 겨울을 보냈고,
경추성 편두통으로 하루에 두통약을 10알 가까이 복용하며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하루에 잠이라고는 고작 3시간 정도 자는 게 전부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보는 광경은
제주도 전역을 도는 장애인 학교의 스쿨버스와
그 버스 안으로 자식을 밀어 넣으며 사라지는 안타까운 부모들의 고충이었습니다.
낮에는 시내버스 종점인 성당 근처에서 버스를 주차한 채
피곤에 절어 잠을 자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늦은 밤에는 성당 옆 운송회사를 찾는 농민들의 트럭 소리,
바닥까지 값이 떨어진 농산물을 운송하는 농민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세수는커녕 볼 일도 동네 공중화장실을 써야 했으며,
아침에는 신문지를 들고 그 앞에서 줄을 서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만 원짜리 버너에, 라면만 수두룩 쌓여 있던 컨테이너 사제관 생활,
곧 닥칠 병마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아파가던 젊은 신부의 미래,
그렇게 지쳐 있던 사제에게 매일같이 들려주던 용기와 위로는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허찬란 신부님의 글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주는 영화
어제「1번가의 기적」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괜찮은 영화일거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예상보다 더 괜찮았습니다.
웃음이 좋은 보약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어쩌면 일주일에 한 번도 통쾌하게 큰 소리로 웃기 어려운데,
그 영화를 보는 중에, 오랜만에 몇 번씩이나 통쾌하게 웃어보았습니다.
울음이 카타르시스(감정 정화)의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어쩌면 한 달에 한 번도 울기 어려운데,
그 영화를 보는 중에, 소리 없는 눈물도 몇 번 흘려야 했습니다.
영화는 달동네의 애환을 담고 있었는데,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부녀지간에(권투선수 아빠와 딸),
형제지간에(경상도에서 상경한 어린 오빠와 여동생)
이웃지간에(권투 코치와 권투 선수)
연인지간에(달동네 거주를 숨기는 자매와 자판기 사업주 남친)
눈물겨운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조폭(임창정 분)과 달동네 어린아이들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빠졌네요.
가난이 불편하지만, 인간관계를 진실하게 맺어준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영화 소재가 되지도 못할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은,
(가난한 달동네 스토리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감독의 대단한 ‘십자가 희생정신’을 엿보게 합니다.
아마 흥행과 관련 없이 만든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저런 좋은 영화를 보면, 제 최고의 찬사이며, 저만의 표현은
“설교보다 백 번 낫다!”입니다. (백 번은 과장법)
저런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오늘날 대형화 되어가는 교회가
저런 서민들의 아픔과 애환을 전혀 만져주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입니다.
실제로 얼마간 만져주고 있겠지요...
오늘날 교회가 서민들, 극빈층의 고충과 애환을 멀리한다면,
예수님은 그런 교회를 멀리 떠나 계실 것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고충 말고도,
정신적인 고충은 모든 계층이 두루 겪는 것이지만,
그래서 달동네만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가장 돕기 쉬운 (달동네의) 경제적인 고통도 관심밖에 멀리한다면,
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계층의) 정신적 고통은
피상적으로만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경제적인 고충에 관심가지다 보면,
사람들이 안고 있는 깊은 인간적 고뇌와 미로 같은 본질적 문제들에
심도있게 접근하게 되는 실마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저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글로 쓰지 말고,
저런 인간이 가진 고뇌와 미로 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더욱 깊이 다루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영화를 보면서, 해 보았습니다.
▲사실은 교회가 잠잠하니까
하나님은 영화감독을 선지자로 대신 세우셔서
오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계십니다.
‘너희는 진정 사회의 소외계층들을 돌보고 있느냐?’고
길에서 노숙자 예배를 시작한 이유는
‘노숙자들이 갈만한 마땅한 예배당이 없어서였다’라고 합니다.
절반은 맞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초현대식으로 나가면서
사회의 소외계층에게 무관심하고, (일부) 구청처럼 형식적인 관심만 갖고 있다면
그럼 도대체 무엇에, 어디에다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일까요?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주변에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도움으로써,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들과 함께 울면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그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리면서, 우리는 주님을 업고 달리는 체험을 합니다.
그들로부터 욕을 먹고 계속 배신을 당하면서,
내게 신실하신 주님을 계속 배신하는 나의 영혼의 모습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들의 완강한 태도를 보면서
주님 앞에서 저들처럼 똑같이 완강한 나의 영혼을 발견하고 움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돕는 것입니다.
나의 강퍅함과 완악함을 깨닫고 돌이키게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게 되며,
내 영혼의 부패를 막는 최선의 길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무관심한 성도는... 부패가 현재 진행 중인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 자발적으로 병자와 소외자들을 심방하며 돌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의 미로 같은 문제들을, 마치 자기 문제인 것처럼 안고 기도하며 고민합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김지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나머지는 나의 소관이 아닙니다. - 마더 테레사
◑아래는 교도소 전도를 하시는 분의 간증입니다.
그날은 특별히 교도소 내 ‘재소자 체육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가족들을 초청해서 교도소 운동장에서, 교도관들과 재소자들과 모두 함께
어울리는 즐거운 한 마당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배구, 축구 등 각종 경기에 몰두했습니다.
그 경기 중에 ‘어머니 업고 달리기’ 순서도 있었습니다.
재소자들은 어머니 또는 아버지를 업고 나와서 달리는데,
모두들 출발선상에서 몇 발짝 달리다 말고,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걸음은 점점 더 느려지고,
서로 양보하며 꼴찌를 하려고 야단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무거워서였을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달리기의 일등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을 붙이고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져보려고
그들은 점점 더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펀 글)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11173740
'분류 없음 > 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574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적 위기 (0) | 2007.03.07 |
---|---|
573 최후 심판의 기준 (0) | 2007.03.07 |
570 불변의 신앙 (0) | 2007.03.05 |
568 원수 = 또 다른 나 (0) | 2007.03.04 |
567 광야의 사람 (0) | 2007.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