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적 위기 롬1:7~12 출처
- Prof. Dr. Michael Welker
위 글을 ‘나름대로’ 이해해서 재 작성 했음/편.
한 마디로, <내가 어떤 방식으로 믿든지, 내가 크리스천인 것은 분명하고,
내 신앙 방식은 당신의 신앙 방식과 엄연히 다르니까,
내 신앙 방식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오늘날 독일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한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보편적으로 주관주의로 흐르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 역사적 뿌리를 밝히고 있다.
◑서론 : 독일교회의 익명화 물결
통일 이후 독일 국민의 거의 80%가 기독교회에 속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존재하기를 원하며, 소위 교회세tax를 내고,
교회가 행하는 큰 사회 봉사적 영향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원하며,
어떤 형태건 기독교 교육을 받는 것을 좋게 생각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교회에 출석하며,
특히 성탄 전야와 세례식, 견신례, 혼인식 등 특별한 때에 교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목사가 집례하는 장례식을 원한다.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의 밀도 깊은 종교적 교제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말하거나
종교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일종의 금기(taboo)이다.
오늘날 독일교회 안에는 ‘익명의 크리스천’들이 무척 많이 있다.
자신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믿지만,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하고,
신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이 원인은 단순히,
*세속주의의 잘못된 정신사조의 영향,
*교회 지도자들의 무능력이나,
*신앙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게으름, 완악함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 독일 교인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는 것은
신학과 교회의 가르침의 오랜 전통 (즉 자유와 평등 사상)
때문이라고 나는 논의하고 싶다. (이 글의 주제, 그래서 자유와 평등을 비판함)
원래 자유와 평등사상은 좋은 것이었다.
이것은 구교에서 탈피해서, 개신교 태동의 모체가 되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이 한편으로는 (약도 너무 많이 쓰면 독이 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독일교회의 조용한 세속화의 원인이 되게 했다.
한국도, 독일처럼, 이런 물결에 타격을 입을 수 있기에
이것이 여러분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 개신교의 깃발 : 자유와 평등
▲개신교는 자유의 종교
독일과 서구사회에서 개신교(protestantism)는
그 자체를 "자유의 종교"(religion of freedom)로 이해하고,
그렇게 나타내기를 애호해 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 말고 어떤 인간적 중보자(사제)도 필요 없다.
만인제사장설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자유롭게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는 자동적으로 ‘평등’을 가져온다.
하나님과의 이런 직접적 자유의 관계는
모든 인간의 평등의 근거를 이끌어 낸다.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갖고 있다.
개신교는, 이 개념이 모든 이성적 판단과,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초가 된다.
바로 이것들이 현대주의 개신교의 큰 이상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이다.
현대주의 개신교는 이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신앙의 영역을 넘어서
문화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독일사회(또는 개신교를 주축으로 하는 나라)를
다원화 사회로 변모시켰고,
그 폐해 중의 한 가지가, 익명의 그리스도인화 된 것이다.
자유와 평등 사상이 도가 지나쳐서, 모든 권위를 부정하게 된 것이다.
이 사상은 종교적 권위를 비롯해, 그 어떤 것도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2. 사회 역시 ‘자유와 평등’으로 발전하다
▲1. 사회체제의 분화
사회학자들은 이런 발전 과정을 ‘사회 체제의 분화’
(the differentiation of the societal systems)라고 명명 한 바 있다.
①사회체제가 제각기 자유롭게 발전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정치, 법, 학계, 종교, 교육, 가정, 언론계 등이 점점 더 자율적이 되고 있다.
정치, 법, 경제, 과학, 종교, 교육, 언론매체와 같은 사회 시스탬들이
그들 나름의 합리성을 개발하고, 그들 나름의 형태를 가지며,
그들 나름대로의 과정을 개발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다른 체제들이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다른 체제들과 투쟁하기 시작했다. (나쁘게 보면 집단 이기주의)
그리하여 사법계는 정치에 의해 오염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과학계는 시장의 관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종교는 다른 사회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유와 평등사상을 토대로, 각 사회 체제의 자율성이 엄격히 존중되면서
각각 자유롭게 발전해 갔다.
②기준을 상실한 상대주의 사회가 되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사회 체제들 안에서는
각기 다른 합리성과 다른 도덕이 발전되어 갔다. (폐해)
그래서 ‘상대주의적 이념’이 자연적으로 발전해갔다.
어떤 절대적 기준이 사회적으로 점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의 체제(정치, 종교 같은)가 사회 전체를 주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사회에 떠오르는 가장 강력한 단체는 ‘시장, 경제세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체제가 너무 강력해지고 주도적이게 될까봐 우려한다.
③분열, 견제와 균형이 어쩔 수 없는 대안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런 ‘사회 체제의 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세력의 분화(분열) 와 견제와 균형을 높이 사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다체제적 구조(multi-systemic structure)로 발전해 왔다.
자유와 평등사상의 필연적 결과이다.
▲2. 정당, 시민단체들의 봇물
이런 다원적 사회에서 (*다원적 : 중심이 여러 개란 뜻)
이 체제social system를 형성하고 재형성하기를 원하는 많은
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이 발달되어 왔다.
정부 주변에 많은 시민단체,
교육계 주변에 많은 시민단체,
심지어 종교계 주변에도 각종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정치와 종교를 더 강하게 연관시켜 보려는 정당도 있으며,
정치와 종교를 더 분리해 보려는 단체들도 생겼다.
또 시장과 정치의 연관성을 증진시키려는 압력 집단들도 생겼고,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에 저항하는 압력 집단들도 생겼다.
▲3. 사회적 다원주의
사회 체제들(▲1)과 시민단체(▲2)가 섞인
이 복잡한 구조를 사회적 다원주의 (societal pluralism)라고 부른다.
①부패 방지하려면 힘을 나눠라
처음 보기에 사회적 다원주의는 사람들에게 좀 복잡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다원주의는 분명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다원주의는 개혁파 전통이 항상 중시해 온 구조,
즉 세력 분화의 구조(the structure of the division of powers)를 가져온다.
근대 민주주의의 스승들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세력을 분열 시키는 일에 힘써 왔다.
그들은 세력을 분열시키고 상호 통제를 해야만
사회를 죄의 부패로 타락하는데서 구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②힘을 나누다 보니, 자꾸 분열됨
사회적 다원주의는 단체의 분화와 분리를 증가시키고 증진시켰다.
(발제자는 개신교 종교개혁의 기치였던 ‘자유와 평등’ 사상이 좋은 결과도 낳았지만,
그것이 가져온 부작용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다.)
◑3. 주관주의적 신앙 - 그 역기능
▲개신교 신앙사상의 계보
자유와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할 때,
신앙은 필연적으로 주관주의적으로 빠지게 된다.
(좋게 표현하면 자율적, 안 좋게 표현하면 제 멋대로 이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주님을 자율적 신앙으로 믿고 섬기되,
‘자기 주관적 판단’에 오염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주관적 신앙의 예를 들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와 찬양도
‘나에게’ 은혜가 되어야 좋은 것이고,
‘나에게’ 은혜가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태도,
이런 주관주의는, 사실 신앙생활에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위험하다.
이런 주관주의는 철학적으로 실존주의라 하는데, 키에르케고르가 선구자인데,
서구철학사조가 그 계보를 오늘날까지 이어오면서,
자유와 평등→주관주의(실존주의)에 이어서→오늘날의 상대주의에 이른 것이다.
상대주의relativism로 각자의 판단이 모두 제 각기 옳으니
다원주의pluralism가 자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그래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오늘 세대의 최고의 유행 사조이며,
신앙관에 있어서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제 멋대로' 믿는 신앙이 서구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주관주의, 주관적 체험 신앙의 위험성 비판
①자기 개인적으로 초월적(초자연적)으로 은혜 체험을 하는 분들이 있다.
좋게 말하면, 성령체험이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화해서 전적으로 의지하면 반드시 타락한다.
끊임없이 성경에 조명하여 보고, 성숙한 타인의 조율을 받아가면서
겸손히 자기부인의 원리로 나가야 한다.
바울은 부득불 자기의 삼층천 체험을 단 한 번 간증했다. 고후12:1
그런 비밀은 자기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고, 자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발설하다보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 타락한다.
신앙의 신비적 체험은 필요하되, 그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비밀로 간직하라.
②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은, 지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
지식(신학)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검증된 내용이다.
주관적 체험이 올바른 신학 지식과 분리되면... 오류에 빠진다.
③주관적(=개인적) 신앙은 자기 혼자의 아집이 되기 쉽다.
그런 아집을 깨뜨리려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교제해야 한다.
예언하는 자의 영이 다른 예언하는 자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고전14:32
④이런 신비적 개인 체험 말고도,
이성적이며 철학적인 주관적 신앙도 마찬가지다...
자기 아집, 바른 신학 무시로 나아가면 안 된다.
▲발제자의 대안1 - 종교개혁으로 돌아가라
종교 개혁의 4가지 ‘오직’(sola)은 개신교의 방향성이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신앙 (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a).
현대 정신이 주관주의적 신앙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려면,
이 4가지와 연관된 종교 개혁적 통찰이 존중되고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해석 되어져야만 한다.
자유라는 미명 아래, 제 마음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안2 : 교제의 중요성
이런 개신교가 그 문장emblem인 자유와 평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타락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대안은
오래전부터 ‘교제’에 두고 있다.
비록 서로 자유를 인정해주지만, 서로 교제하는 것이다.
교제하면서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지켜주고, 서로 교정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회중들에게 너희 신앙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고 했다. 롬1:8
그는 로마교인들의 신앙을 기뻐하고, 그곳에 방문해서 더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피차 격려mutually encouraged를 받기 원했다. 롬1:12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첫 장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살전1:8
바울은 또한 그들에게
너희 믿음을 굳게 하고.... 너희 믿음을 알아보려고
디모데를 보내었다고 말하고 있다. 살전3:2,5
그리고 '너희 믿음...의 기쁜 소식'에 대해 기뻐한다고 말한다. 살전1:6~9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데살로니가 후서와 히브리서에서도
공동체의 신앙이 공적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언급하는 말들이
나타난다. (골 1:4, 엡 1:15, 살후 1:3, 히 13:1 참조).
빌레몬서와 디모데후서에서도 ‘알려진’ 개인들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몬1:5, 딤후1:5 참조
오늘날 개신교회에서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알려지고, 교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계속 계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 http://blog.daum.net/bible3/1027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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