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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611 종교가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롭다

LNCK 2007. 3. 29. 15:50
 

◈종교가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롭다    고후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고후10:1

 


아래 내용은 독자께서 꼭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종교간 평화가 있을 때, 세상이 평화롭다

누군가 앞으로 제3차 대전을 ‘종교전쟁’으로 예측하기도 했는데,

본의 아니게 걸프전, 이라크 전, 아프간 전쟁은 ‘종교전쟁’이 되고 있다.


특히 가슴 아픈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난 2천년 동안 꾸준히 내려온 ‘이라크의 전통 기독교’

최근에 이슬람 인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당하며, 국외로 망명하고 있다.

회교도들이 미국에 대한 화풀이로, 자국민 기독교인들에게 퍼붓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와 민족간 갈등의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인 것 같다.

그러므로 종교는 서로 간에 존중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래야 세상이 평화롭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종교 간에 서로 화목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서로 배타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데...


▲그리스, 러시아 정교 어떻게 볼 것인가?

동방정교회는 동서로마 분리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달하다가

15세기 투르크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무너진 이후로는

러시아로 옮겨가서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정교 orthodox(正)’ 라는 말의 뜻은 ‘정통’이라는 뜻이다.  

사도 정통, 교부 정통, 올바른 믿음, 올바른(正) 예배를 가리킨다.


정교회는 지금 동구라파와 러시아, 과거 러시아 식민지 지역에 널러 퍼져있다.

5세기에 콘스탄틴 황제가 동로마로 옮긴 이후에

서로마가 게르만에 망하면서 동방교회로 고착되어 지금까지 이르고있다. 


제 개인적 결론은, 정교회안에도 참된 신자가 있고, 가라지 신자가 있다는 것이다.

예배 양식과 강조점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거기에도 참 신자가 있다.

물론 바른 신학이 중요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 안에도 참 신자가 있고, 가라지 신자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신교회만 속한다고 모두 참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정교회 교인이 다 가라지는 아니다.)


그가 정교회에 속해 있다고 ‘정통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정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배타적으로 나갈 것이다. 그런 무식한 사람도 있다.

그러면 세상에 평화가 깨어지게 되고, 기독교 안에서마저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가톨릭, 어떻게 볼 것인가?

마찬가지다. 가톨릭에도 참 신자가 있고, 가라지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개신교회 안에도 참 신자가 있고, 가라지가 있는 것과 같다.


개신교가 가톨릭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는

마리아 숭배, 성상 숭배, 성찬의 해석 등에 관한 이유 등이다.

그러나 그 외 많은 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본다.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 같은 성령님을 믿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개신교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분파sect’로 본다.

합법적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개신교회는 법적 정통성은 부족하지만, 영적/신학적 정통성은 계승했다고 본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교부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신학계보를 잇고 있다. 


오늘도 어떤 나라의 가톨릭들은 개신교를 ‘교회church’로 인정하지 않고,

‘분파sect’로 부르면서 약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1962년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를 ‘형제, 자매’로 인정했다고 한다.

또한 ‘만인제사장론’과 비슷하게 사제가 아닌 평신도도 ‘왕, 제사장, 선지자’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교의헌장 4항) 


혹자는, 가톨릭이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으므로

‘정통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톨릭에 대해 배타적이다.

‘타종교의 구원’ 문제는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맨 아래, 보편구원론 참조)


저는 모든 가톨릭이 ‘자유주의신학’ 신봉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몇 해 전 선종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그의 설교와 행적을 살펴볼 때

‘탁월한 복음주의자’로 본다. 개인마다 신앙의 다양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누가 자유주의자라 하더라도 존중하고, 자기 스스로는 겸손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차이

이 입장 차이 때문에, 오늘날 장로교의 합동(총신)과 통합(장신)이 갈린 이후로

계속 내려져 오고 있다. 


제가 한 번은 미국에서 프린스턴 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친척이 그 프린스턴 동네에 살아서, 근처의 학교에 자주 놀러 갔다.

하루는 거기 신학교에서 우연히 ‘프린스턴 저널’이란 책을 빼서 읽어보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프린스턴은 ‘칼 바르트다, 신정통(정통과 자유주의의 중간)이다,

모세오경의 편집설을 믿는다’ 등 안 좋게 말하는 것만 잔뜩 들어왔었는데,

그 ‘저널’에 실린 설교문은 ‘정통’을 저리 가라할 정도로 신령하고 예리했다.


비록 모세오경의 편집설을 믿어도, 문서편집설을 (일부) 믿어도,

신앙이 뜨거울 수 있고, (물론 매마를 수 있다.)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을 믿고, 문서편집설을 배격해도

신앙이 매마를 수 있다. (물론 뜨거울 수 있다.)


미묘한 신학적 입장 차이보다

그것을 믿든지/배격하든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뜨거운 신앙과 순수한 믿음’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수(주의 신학교)는 보수만 모여 있고(배타적)

*자유(주의 신학교)는 자유만 모여 있는 게 아니라,

보수와 자유 등 모두에게 ‘학문’의 문을 열어놓는다고 말했다.(학문의 개방적)


가령 예를 들면, 하바드 든지 무슨 신학교라면

거기에 꼭 ‘자유’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 ‘보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문을 개방한다는 것이다.

(보수, 자유의 정의를 일단 무시하고...)

‘학문’으로서 (↔신앙) 당신의 의견에 경청하겠다는 자세다.


같은 맥락에서, WCC가 제3세계 반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그래서 WCC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만 WCC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교회일치’를 위해서 모두 다 협력하자는 것이

WCC의 명분이다.


(저는 여기에 누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제 주장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대의를 위해 서로 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종교가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롭다

종교끼리 서로 으르렁거리며 갈등하면, 세상에 평화가 반드시 깨어진다.


그런데 기독교는 생태적으로 ‘진리는 오직 하나이다. 두 개는 진리일 수 없다.’

배타적이 되기 쉽다.


물론 진리는 하나다.

그러나 비록 불교, 회교 등 타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친절해야 한다.

그들도 인간이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타종교인을 배척한다면, 타종교 때문이 아니라, 실상은 자기 속의 죄성이다.


기독교안에서도 정교든지, 가톨릭이든지, 자유주의든지,

(상대주의relativism를 인정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신학적 입장과 신념이 서로 달라도,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것이 참 종교인의 자세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개신교 신앙이 아직 어린 사람은, 유럽의 가톨릭이라 그러면 다 자유주의로 알고

남미의 가톨릭이라 그러면 다 혼합종교, 해방신학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래서 그를 무시한다면... 그는 정말 겸손해져야 한다.


911이후 미국의 거리에서 회교도가 가끔 폭행을 당하거나,

중동에서 기독교인이 핍박을 당한다는 뉴스는

정말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김지윤

 

저는 '개인적으로' 어거스틴-캘빈-휫필드-개혁주의 전통의

은혜, 선택, 예정, 하나님의 주권, 성도의 견인 등의 신학적 흐름이

가장 오류가 적고 '정통적인' 신학 사조라 믿고 따르고 싶다. 

그러나 다른 입장을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

 

이 글을 쓰다보니 갑자기 소천하신 이중표 목사님의 일화가 생각난다.(저는 설교로 들었음)

목사님이 하루는 반포 고속터미널 앞에서 노방전도를 하시는데,

마침 거기서 목탁을 두드리는 승려 옆에서 나란히 하시게 되었다.(아마 승려가 나중에 왔음)

그러자 길 가던 사람들이 승려의 시주함에 시주(헌금)를 드리기도 하고,

목사님께 헌금을 드리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 목사님은 무슨 감동을 받으셨는지

당신 앞에 들어온 헌금을 몽땅 털어서 시주함에 가뿐히 시주하시고 그 자리를 뜨셨다고 한다.

(한편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그 분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제가 상상하면, 승려를 그렇게 해서라도 전도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또 다른 뜻도 있겠지만...   

 


▣ 보편구원론


20세기 후반기부터 신학적 동향과 유행이 일각에서 보편구원론(=종교다원론)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의 주장을 알 필요는 있다.



◑보편구원론(=종교다원론)의 발전 과정


▲1. 교회 바깥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개념

이들이 그리스도와 교회 바깥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①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은 사실은 분명하다.

교회의 설립자를 그리스도, 성령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교회도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에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아직 없었지만 구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구약 성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교회 바깥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으로 치면 고려, 조선시대, 즉 기독교 복음이 아직 전파되기 전에

그들은 모두 지옥에 갔다는 것인가? 라며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②고넬료-그는 복음을 접하기 이전,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 인정받았다.

교회 밖에 있으면서 비록 복음을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었다.

이렇게 의로운 사람들은 광범위하게 그리스도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는 입장.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고 본다(칼 라너 가 말한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


혹자는 이런 고넬료 그룹에 광범위하게 아래 사람들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구약에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발람 선지자(그는 나중에 구원을 잃고 말았지만

그의 초기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선지자였다.)


이들은 모두 구속사(아브라함-다윗-그리스도) 바깥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③반론 : 만약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착하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적 오류에 필연적으로 빠지게 된다. 회개와 믿음의 복음전파도 필요 없게 된다.


④부분 긍정적 입장

단지 이런 주장이 나름대로 유익을 주는 것은 ‘불신자를 쳐다보는 눈’이다.

무조건 어둠과 멸망의 자식으로 보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독선이 되고 만다.


불신자나 타종교인들을 바라 볼 때, 고넬료처럼 하나님께 크게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

또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란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는 시각도 매우 필요하다.


(물론 멸망당할 ‘전적타락’한 존재로 바라보는 종래의 시각을 계속 유지한 채)

선교는 타종교인과 대화, 그들이 이미 살고 있는 방식들을 존중하면서 해야 된다는 시각.



▲2. 타 종교들도 타당하다고 인정


①세계적으로 공인된 타 종교에도 윤리적으로 이성적이며 덕스러운 행동을 요청하는

신적 계시가 깔려있다고 인정한다. 위 ▲1. 보다 좀 더 발전된 입장이다.


②혹자는, 타 종교들은 기독교를 향한 준비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인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근접한 종교’, 또는 ‘전前 기독교’로 본다.


③성경에도 대자연의 ‘일반 계시’ 및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들 타종교들도 기독교 하나님을 인식하고 찾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입장.


④반대 입장

백보 양보해서 기독교에 ‘근접한 종교’는 될지언정 구원의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본다.


위의 입장은 특별 계시(성경)와 자연 계시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본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특별계시가 빠진 자연계시를 통한 구원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⑤부분 긍정적 입장

타종교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버리자는 것이다.

기독교와 특별계시의 유일성을 인정하지만, 타종교를 ‘근접한 종교’로 인정해 줌이

선교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본다. 그들도 하나님의 큰 섭리 아래 있다고 본다.

최근에 더욱 세계 평화를 위해서 ‘종교간 관용’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를 통해서 상당 부분 이런 사안의 중대성을 인정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못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3. 종교다원주의(▲2보다 더 발전된 입장)


이들의 기본 출발점은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잡는데,

세부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예수님의 복음 설교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였지,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된 주장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행 4:12)은 기독교 안에서만 한정되는 조건으로 본다.

타종교는 다른 방식의 구원 조건이 있다는 식이다.


②‘그리스도 중심’의 과거 구원론에서 →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보았다.(신학자 ‘힉’, 1973)


세상 모든 민족은 그리스도는 안 믿어도 대부분 ‘하나님’을 믿으므로,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다.


③이것은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신화화했다’는 주장이 뒷받침 되었다.

그래서 ‘비신화화’=‘역사의 예수로의 회귀’를 통해, 그리스도론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에 이르게 된다.

구약을 보더라도 “하나님 중심”이 더 구원론에 더 맞다고 주장한다.


④하나님은 아가페이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도 아가페적 사랑이다.

삼위일체 개념은 보편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낸 ‘신화’일 뿐으로 본다.

하나님의 아가페는 예수를 통해서 나타났지만,

다른 방식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⑤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란 다양한 종교들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중재자들을

그리스도로 부른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한 민족 또는 한 종교의 그리스도일 뿐이다.

‘진정 그리스도라면, 역사와 모든 민족에 초월하는 무수한 이름의

보편적 그리스도일 것이다’ 라고 본다.


예수는 그리스도지만, 다른 종교에도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적 그리스도론을 배타적, 편협한 것으로 치부한다.


⑥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

대다수 인간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기독교)만을 마련했다고 보기 어렵다.


⑦세상에 복음을 접촉하지 못해서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꼭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면, 그 사람들이 지옥 간다면 과연 “누구 탓”인가?


⑧민족간 화해, 종교간 화해,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기독교의 배타성은 버려야 한다.


⑨반론

이것은 지난 세월의 사상적, 신학적 (잘못된) 발전 과정의 소산물이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다원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전통 개신교의 입장


▲1.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리스도 한 분 만이 ‘유일한 중보자’, ‘구원의 길’(구교는 ‘교회 안에서’까지를 더 보탬)

임을 믿는다.


그리스도 성육신의 유일성을 믿으며(요일 2:23, 요이 1:7 등)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으며, 일신교를 이단으로 여긴다.


 

▲2. 그리스도 계시의 유일성

성경의 특별계시의 유일성을 믿는다.


그 외에도 다른 여러 변증들이 있겠지만 여기선 종교다원론 이해에 주력하므로 생략함.


복잡한 질문들이 파생될 수 있는데, 간접 대답은 고전 13:12, “지금은 희미하나...”이다.



▲3. 마치는 말; 전통 개신교 입장을 고수하되


①(신념은 고수하되, 태도에 있어서) 우월성은 안 된다.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타종교에 대한 교만, 우월성으로 비쳐진다면 곤란하다.

사실 태도의 우월성이 있었다고 본다.


‘모든 민족의 하나님’,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전제로

불신자, 이교도(이 말을 쓰면 안 됨)에 대한 선민, 차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잘못하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타민족, 타종교인을 ‘개’ 나 ‘종’으로 취급할 수 있다.

역사상 종종 그랬었다.


②종교간 존중, 평화를 위한 일치 필요;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에 반대하는 공통의 목표 아래

종교들은 일치하고 상호 존중해야 한다. 물론 우상숭배 해서는 안 될 것임.


오늘날 교황이 석탄일에 불교계에 축전을 보낸다.

시대적 신학 조류에 따라 가톨릭은 옷을 갈아입었다.

(원리는 같지만 적용 및 가치 평가는 사람의 기질에 따라 다를 수 있음)


③강요는 안 됨;

기독교 복음 선교는 결코 강요나 강압에 의해서 전파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결코 강압적인 방법으로 “쉽게” 복음전하지 않으셨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선전포고할 때, 그들의 신앙 방식을 “존중”한다고 발언했다.

그런 인정과 존중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방식이 비록 더디겠지만 나중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독교로 회심하게 될 것이다.


일례로, 한 집안 내에서 고부간, 형제간에 다른 종교로 인해 심각한 불행이 올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인이 타종교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을 요한다.


▶마지막 때는 지식이 증가, 갈팡질팡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

여기서 “빨리 왕래하며”는 오역이며, “이리 저리 갈팡질팡 다닌다”로 바꾸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쳐 잘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갈팡질팡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공동번역)


“Many shall run to and pro 많은 사람들이 이리 저리 다닐 것이며

and knowledge shall be increased"(KJV) 지식이 더하리라


말세는 지식이 증가하며, 사람들은 갈팡질팡한다.

지식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워서 그렇고, 또한 옳은 지식을 구하려고 갈팡질팡 한다.

일부러 역행해서 좁은 지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참고도서 :「선교학」엘로이 부에노 델라 푸엔테 저, 생활성서출판, pp.337-375.

최초 정리, 03.05.01. 김지윤.


 

 

 

▣ 볼테르의관용 tolerance         

 


▶종교적 관용 vs 종교적 광신

종교에 있어서, 관용이 빠지면 광신(狂信, fanatic)에 빠지게 된다.

관용이란,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 신앙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비록 상대방이 틀렸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


사실 ‘종교적 불관용’만큼 세상에 무서운 것도 없다.

그래서 유럽은 구교와 신교도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과 반목과 비참한 희생으로

얼룩졌다. 종교적 불관용은 다시 말해서 ‘광신’이다.

기독교는 순교자 대열에 서며, 처형자 대열에 가담하지 않는다. 



▶회교도에 대한 ‘종교적 불관용’을 경계함

911 테러사태 이후에, 기독교계에서 회교에 대한

‘종교적 불관용’ 망령이 살아날까 두렵다.

‘알카에다=회교’로 보거나, 회교도를 싸잡아 색안경 끼고 보는 것은

위험한 수준의 ‘종교적 불관용’이다. 만약 그렇다면,

히틀러=기독교이고, 나찌 집단=기독교 집단으로 봄과 같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10억이 더 되는 회교 인구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던져서는 안 된다.

염려되는 것은 독실하다는(?) 기독교인일수록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똑같이 광신적 회교도들은 ‘대테러전쟁’=기독교로 본다.

알카에다 만행의 뿌리는 회교이기 이전에 인간의 죄성이며,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 물론 기독교인에게도 있다.   


볼테르(1694-1778)는 일찍「관용론」을 써서,

당시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만연하던 “종교적 광신”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함으로써

당시 종교 분쟁의 피로 얼룩진 유럽사회를 구해냈다.


문명충돌을 염려하는 오늘날, 볼테르의 관용론의 부활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볼테르「관용론」, 한길사에서 번역 출판했는데,

읽으면 종교적 극단을 피하는데 도움된다.


▶오류와 편견, 주관적인 인간

종교가 불관용이 가장 심한 속성을 가지지만,

불관용 정신은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자!

모든 인간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

- 그래서 관용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 변기 속에 벽돌을 넣었던 독재자는

천문학적인 통치 자금 조성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며,

십 년이 넘도록 구두 한 켤레로 절약했던 재벌 회장은

직원들이 이면지를 활용하지 않는다고 불같이 화를 낸다.

그렇게 하면서도 유명인과 하룻밤 성적 만족을 위해서는

엄청난 액수의 수표를 끊어도 전혀 아깝지 않다.


미국인은 여름철 바깥에 외출할 때 실내 에어컨을 켜 두어

수 백 달러의 전기세를 물고도, 시장에서 옷 한 벌 사 입는 데는 대단히 인색하다.

반면 한국인은 부엌에서 도마질할 때 전등을 켜지 않아 손을 베면서도,

백화점에 가서는 비싼 옷을 아낌없이 사 입는다.

(서로를 사치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미국인이 애완견 키우는 돈이면 세계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국인이 보양식에 들이는 돈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 관점”, 편견, 오류가 있다.

그래서 관용의 정신이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관한 보고서

(볼테르의 「관용론」제19장 요약, 실제 상황에 기초한 이야기로 짐작된다.)


중국 강희 황제 때, 광둥의 한 관리가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사연인즉 덴마크 신부, 네델란드 신부, 예수회 신부가 서로 언성 높여 다투었다.

관리는 세 신부(선교사)를 불러서, 다과를 대접하며

무슨 일로 다투는지 물어보았다;


예수회 신부: “나는 항상 옳기 때문에 언제나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참으로 괴롭습니다.

처음에는 자제심을 가지고 논쟁했으나, 결국 참지 못하겠군요.”


관리: “논쟁할 때도 예의가 필요하며,

중국에서는 의견 차가 있어도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벌이는 논쟁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회 신부: “대감, 이 두 신부는 트리엔트 공의회 결정에 복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관리: “내 생각에는 큰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견해를 존중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내린 결정이니 만큼 두 분이 존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았을 때 더 지혜롭다고 공자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덴마크 신부: “우리는 공희회 결정을 존중합니다. 마땅히 그래야죠.

그러나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앞서 열렸던 여러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존중하고 전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관리; “그럼 네델란드 신부님도 같은 의견이신가요?”

(종교개혁 후 네델란드는 칼빈의 영향, 덴마크는 루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예수회는 천주교 자체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탄생한 단체임. 편집자)


네델란드 신부; “이 덴마크 신부의 생각은

예수회 신부의 생각만큼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회 신부는  대감을 대하는 이 자리에서는 아주 점잖은 척하고 있군요...”


관리: “여러분들을 이해하기 힘들군요. 세 분 모두 그리스도교인이 아닙니까?

세 분 모두 기독교를 가르치러 중국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세 분이 각기 다르군요”

 

세 신부는 관리 앞에서 각자 자기 주장의 정당함을 길게 설명하고,

다른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해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그 자리에서도 언성을 높이며 계속 다투었다.

결국 예수회 신부는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미니쿠스 수도사(제 4의 인물)를 만났다.


예수회 신부: “저는 방금 심한 논쟁에서 승리했으며,

거야 진실이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죠!”


도미니쿠스 수도사: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이기지 못했을 것이요.

나는 당신이 거짓말쟁이 우상숭배자임을 내가 입증해 보였을 것이요.”


이 두 사람은 싸움이 격해져서 길에서 서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웠다.

관리는 두 사람을 모두 감옥에 넣어버렸다.


부하: “대감은 언제까지 저들을 가두어두실 생각이십니까?”

  

관리: “그들이 서로의 견해에 동의할 때까지다.”


부하: “그렇다면 감옥에서 풀려나기는 영영 어렵겠는데요...”


지금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선교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관용의 정신이란 - 자기가 아무리 옳더라도, 상대방을 마땅히 존중하는 정신이다.

볼테르는 「관용론」12장에서 성경에 나타난 관용의 예를 길게 설명하는데,

각자 참고 바람. 주석상 논란이 클 것 같아서 인용하지 않았음.♥

 

 

타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종교다원주의와는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통일 문제나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이지

신앙문제를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 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저입니다.

저는 보다 겸허한 자세로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더 충성스럽게 섬기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명혁 목사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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