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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간에 울려퍼졌던 두 함성

LNCK 2007. 4. 3. 19:44

 

◈종려주간에 울려퍼졌던 두 함성       막11:8~11, 15:6~15

 

 

★[주제 요약]

2천년 전 종려주간 당시 ‘무리’(제자 포함?)들은 상반된 두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주님이 입성할 때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며 열렬히 환영했다가

며칠 후에는 돌변해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질러댔다.

 

불과 나흘사이에 왜 그렇게 돌변했을까?

예수는 자기들이 원하던 방식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많은 ‘무리’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그리스도 상’이 있다. 아마 복주는 그리스도이리라!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때,

무리들은 언제나 돌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속물인 ‘무리’들이다.

 

오늘날 그런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는 영생을 얻는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전략)

 

종려주간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행적은

무리의 함성(1st)으로 시작하여, 무리의 함성(2nd)으로 끝납니다.  

 

 

◑1. 예루살렘에 울려 퍼졌던 첫 번째 함성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막11:10

그 첫 함성은 유월절 축제를 앞둔 때, 일어났습니다.

유월절 축제 동안 예루살렘은 순례 객들로 북적입니다.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65년 유월절에 3백만 순례 객이 예루살렘을 찾았고,

70년 예루살렘 함락 시 그곳에서 희생당한 이는 110만 명에 달한다고 썼지만,

그래서 예루살렘이 마치 로마시대 메트로폴리스였던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아주 과장된 표현입니다.

 

고고학적 근거로 볼 때 당시 예루살렘은 오늘날 옛 성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86헥타르, 약 55만평의 크기입니다.

사방둘레가 6km를 넘지 않는 작은 마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올림픽 공원, 서울대보다 약간 큰 수준입니다.

인구는 8만 정도, 많아야 10만 명을 넘지 않았을 거라고 하고

유월절 순례 객들이 넘쳐났을 때에도 기껏해야 20만 정도였을 거라고 합니다.

 

예수의 생애를 다루는 영화들을 보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은 굉장합니다.

수많은 군중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나귀 타고 오는 예수 앞에

자신들의 옷을 카펫삼아 깔면서 환호하며 야단법석을 떱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온 도시가 들떠서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들 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1:10). 사실 그랬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칠 때 아마 '크지 않은' 도시 예루살렘 주민들과

순례객들은 거의 그 함성 소리를 들었고,

무슨 일인가 내다보다 알아보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환영한 ‘무리’들

각 복음서는 여기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많은 사람들’(마가복음),

‘큰 무리’(마태복음),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요한복음)

좀 더 구체적으로 ‘제자의 온 무리’(누가복음)

그 무엇이든지,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는 분명 소수가 아니라

‘무리’라고 불리는 다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무리들의 외침은 ‘강력한 다윗왕국의 회복’

아니 도대체 왜 그들은 이렇게까지 예수를 환영한 것일까요?

이것은 분명 야단스럽게 행차하는 자를 바라보는 호기심의 차원이 아닙니다.

거기에 함께 한 자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외칩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우리를 구하라’라는 탄원을 뜻합니다.

이 외침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단순히 수사적인 환영의 소리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위험천만한 외침입니다.

유대인들의 열망, 즉 다윗이 이루었던 강대국을 다시 한 번 회복하자는

그 열망의 표출입니다. 즉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 해방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의지의 외침입니다.

일제시대 삼일 만세 때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이 소리는 대속의 그리스도 선포로 여기는 기독교적 해석은

맥락을 벗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교 참조, 눅19:40)

 

▲긴장한 당국자들

그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 자들이냐를 넘어서

그 외침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유월절에 혹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로마 군인들,

그리고 로마 세력에 빌붙어 부와 명예를 누렸던 지도자계급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면(많은 무리의 함성이었다면 듣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혹 이 무리들이 폭도로 돌변하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무력 경계태세를 갖췄을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언젠가 다윗왕국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가진 민중들에게 이 외침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2. 나흘 뒤 두 번째 함성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막15:13

그 후 나흘 뒤 또 한 번의 함성이 예루살렘을 뒤흔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단순히 ‘무리’라고 나오지만,

마태복음은 ‘온 백성’(27:25)이라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대제사장,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23:13)이었다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일반적으로 ‘유대사람들’(19:14)이라고 명명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사형할만한 죄를 못 찾은 빌라도

유대의 지도자들에 의해 고발당한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지만

사실상 사형할 만한 죄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죄를 저질렀고

그것은 죽어 마땅한 ‘죄’라고 하지만,

로마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그 민족 내부 갈등의 문제일 뿐

사형 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도 그 허점을 알기에 빌라도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고발하지만

객관적인 재판의 과정을 이끄는 빌라도의 눈에 예수의 행적은

그저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에 들어와 보여준 예수의 행적은

다윗 국가를 회복시켜줄 ‘호산나’ 찬송의 대상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기도 했습니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쫒는 행위는

그 이권을 틀어 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문제일 뿐이며,

그는 더 이상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가도 아니었고,

게다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라’고 말하면서(막12:17)

순응하는 식민백성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

빌라도는 사실 사형 언도 장면을 보면 아주 수동적 인물로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회자되는 빌라도가 좀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에 맞춰 유대인들을 달래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죄인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빌라도의 의도와는 달리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십자가 처형에 대한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성서가 친절하게 그 '무리'들은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것이며

스스로 주체적인 결정에서 비롯한 외침이 아니었다라고 설명한다 해도

그 외침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리’ ≠ 똑똑한 ‘민중’

‘무리’는 그리스어 오클로스의 번역이며 

특히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함의로 해석되곤 했습니다.

 

바울 서신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를 따르던, 혹은 예수와 연관된 집단을 명명하는 단어로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게 해석되곤 합니다.

 

안병무 박사는 마가복음을 통해 ‘무리’ 즉 오클로스는

경제, 정치, 종교,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이며

예수와 함께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민중’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민중신학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분명 식민백성으로서 경제, 정치, 종교 그리고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이며,

예수의 사형에 있어서 역사적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의 ‘무리’는 아무리 보아도

자각과 저항을 통한 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성’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리 = 대중(아무 생각 없는 무리)

ThWNT(신약신학사전)에 나오는 해석의 오클로스는

“그저 예수 주변에 맴돌다 그의 활동에 배경구실을 한 존재”라고 해석하면서

가치중립적으로 “사람들의 무리”로서,

아니 더 나아가 사회 지도층들에 의해 조종당하는

자발성이 없고 수동적인 집단으로 정의되는 ‘대중’인 것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변별력이 없다는 점에서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외침의 주체임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쉽게도 그 '무리'들은 변절자가 되었습니다.

 

‘호산나’ 하던 많은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무리들과는 전혀 다른 자들이 아니냐구요?

이것은 ‘호산나’ 외침의 정치적 함의를 고려한다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비슷하게 ‘무리’였다.

누가복음은 유일하게 ‘제자의 온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정치적 메시아를 대망하는 것은

그 당시 온 이스라엘 민족의 공통적 신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그 함성은 바뀔 수 있는 여지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제자라는 자들의 변절도 끝이 없습니다.

유다는 정치 혁명을 꿈꾸다 결국 예수를 팔아버리는 주역이 되었고,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잡아갈 때, 한 젊은이(마가 or 베드로라고 함)는

맨몸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합니다. 막14:52

 

그런가 하면 베드로는 결정적으로 예수를 3번 부인하기도 합니다.

도망가고 숨기에 급급하고,

누군가 혹 자신들을 알아볼까 철저히 위장하는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무리 속에 전혀 속해 있지 않았을까요? 

혹 숨어 예수를 바라보다 함께 소리 지르기를 강요하는 무리들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더 크게 외치지는 않았을까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무리로 인한 예수님의 절망

홀로 하나님의 뜻을 오로지 따르며 그 모든 것을 감내해 나가는 예수라 하지만

철저히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아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경험은

어쩌면 분노할 힘마저 빼앗고 마는 절대적 절망이었을 겁니다.

 

절망의 끝에서 그는 외칩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그 어떤 고상한 탄식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이 외침은 정말 버림받고 마는 것은 아닌가라는

마지막 절망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3. 내가 변절자가 될 수 있다!

 

예수를 따른다고요! 이 나흘간에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가질 수 있는 허상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제자들도 ‘무리’에 가담했다?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 반 동안 기적 사건을 통해,

한 밥상에서 먹는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가르침을 통해 예수를 잘 알고, 따른다고 단언했던 그 무리들은

자신들이 미리 상상해 놓은 ‘하나님 나라’의 허상이 깨졌을 때

곧바로 돌변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합니다. (그럴 개연성 있음)

‘호산나!’ 외침이 →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바뀌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나는?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생각과 그림 속에서 따르고 있습니까?

혹 내가 설정해 놓은 틀 안에 예수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 틀이 깨질 경우, 언제든지 예수까지도 버릴 준비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 때 그 무리들처럼 말입니다. 

 

▲부활 후에 거듭난 제자들

물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경험 안에서 변화하는 이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깨고,

예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조삼모사 변개하는 무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적용 : 내가 ‘변절했던 무리 또는 제자’ 일 수 있다.

이제 이 고난 주간 동안 그 때 울려 퍼졌던 두 번의 함성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변절의 외침 한 가운데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반당해야만 했던

예수를 묵상하기 바랍니다.

 

혹 지금도 우리가 그와 같은 외침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를 말하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허상을 쫒고 진정 예수는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솔하게 되돌아보는 가운데 부활로 다가오는 예수 안에서

변화 받는 기쁨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07.04.01. 인터넷 설교 발췌 요약   *원제목 : 무리의 외치는 소리

 

 

오늘날 교회에 '무리'가 많습니다.'무리'는 천국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나는 이 문제를 스스로 심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아무리 성도가 많이 넘쳐도, 그들이 만약 '무리'라면, 그렇게 넘치는 것이 오히려 재앙이요, 최후심판에서 책임추궁이 될 수 있습니다.이런 무리들이 끊임없는 말씀의 공급과 성령의 번개를 맞고... 참 제자가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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