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관한 글 모음 눅23:34
◑용서의 위치 변동
용서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주제의 글.
우리는 자주 누구누구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더구나 그 용서할 수 없음이 우리를 가장 괴롭히고,
영적 자유의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용서는 절대로 내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과 타인의 잘못을 내어 맡길 따름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그토록 끔찍하게 처형하는 자들을
용서하시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눅23:34
내가 용서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이란 확신이 설 때,
내 자신은 이제껏 가졌던 용서의 칼자루를 감히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겸손이 있을 때, 용서의 위치 변동이 있을 때, 진정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길고 어두운 미움과 증오,
분노와 복수의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함은
첫째,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둘째,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선과 악에 대해 심판자가 될 수 없음을,
셋째, 그 어떤 죄도 하나님께 용서를 청하고 회개하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음을 마18:35, 기억해야 합니다.(펀 글)
◑원수 갚는다고 후련해지지 않는다.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의 연방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테러 사건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커다란 참사였습니다.
이 사건의 범죄자(티모시 맥베이)는 붙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희생자들의 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언론에서는 사형이 집행된 이후
이 장면을 지켜본 희생자들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희생자들 부모와 가족들은 한결같이
무엇인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느낌과 허무한 마음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면 안타까웠던 마음이 한편으로 후련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상처의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나 처벌이
자신이 받은 상처의 치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원수 갚음이 아니라,
오직 용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할 것입니다.(펀 글)
◑남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
영국의 어느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인은 신선한 빵을 구우려고, 버터를 매일 아침마다 농부에게서 배달받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버터가 정량에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저울에 달아 보니 역시 버터의 양이 부족하였습니다.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자신을 속인 농부를 고소했고,
농부는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뒤집어쓰고 망신을 당한 쪽은
농부가 아닌 빵집 주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농부에게는 젖소 몇 마리는 있었지만 너무 가난하여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는 배달할 버터의 양을 정하는 데
매일 자신이 납품하는 빵집에서 갖다 먹는 빵의 무게를 기준으로
버터를 잘랐던 것입니다.
결국 빵집 주인의 얄팍한 상술과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을 판단한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판단 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펀 글)
◑아미쉬 공동체의 용서
이메일로 온 “전태일 통신”에서 읽은 사건입니다.
아미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카스터에 있는데,
현대과학과 물질문명을 철저히 거부하고 옛날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연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며 사는 기독교의 대안 공동체입니다.
2006년 10월 2일 이 마을의 학교에서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찰스 로버츠(32살)라는 트럭 운전사가 교실에 침입해
11명의 여학생을 쏴서 결국 5명을 숨지게 하고 스스로 자살해버렸습니다.
단순한 삶을 통해 예수님에게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아미쉬 마을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이었고,
너무나도 비참하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저에게 뭉클한 감동과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은 사건 당시
교실에 침입한 찰스가 선생님과 남자 아이들을 내보내고
여자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려고 할 때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나서서 다른 아이들을 살리려고
“나를 먼저 쏘라”고 말하고 그 아이가 희생되고,
다음으로 나이 많은 아이도 똑같이 그렇게 말하고 희생당했다고 합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또 하나는 그 끔직한 일이 있었던 날 저녁,
희생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총을 쏘고 자살한
찰스의 미망인과 아이 셋이 사는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버지가 저지른 끔직한 일 때문에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는
비탄한 처지에 빠져 있을 미망인과 아이들을 위로하면서
“용서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요?
내 아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절망감과 슬픔과 분노에 아무 생각도 못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며칠 후 찰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 반 이상이
아미쉬 희생자 가족들이었으며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미쉬 공동체는 지역 은행에다 찰스의 남겨진 가족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만드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슴 벅찬 이 따뜻한 이야기에 감동을 하면서도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을까 하고
자문을 해 봅니다.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물론이고,
가해자(가족)의 마음속에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죄책감까지 염두에 두는
아미쉬 공동체의 선행은
정말 그리스도의 마음을 엿보게 합니다. (펀 글)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리빙 http://blog.daum.net/bible3/11423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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