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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동행의 은혜

LNCK 2007. 4. 27. 15:56

◈동행의 은혜              눅24:13~35



◑1. 동행의 은혜


▲혼란스러운 제자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지금 머리 속이 무척 혼란스럽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생각했던 그 분이,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리라고 기대했던 그 분이,

너무 무능하고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 버리셨다.

아니, 그 참혹함과 공포는 끔찍스러웠다. 그것이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였다.


더욱 황당한 것은, 사흘이 지나서 그 분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

거기 계속 머물다가는, 더 황당한 얘기를 듣고 더 실망할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두 제자는 자기 짐을 정리해서 조용히 엠마오, 아마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신다.



▲1. 실망하고 낙심한 자들에게도 함께 동행 해 계신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시는 두 제자에게 동행하셨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5~16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했다.

→ 내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예수님은 나와 동행해 주신다.


특히 실망하고 낙심할 때, 더 가까이 오시는 것은

자녀가 병들면 부모가 더 가까이 보살펴 주는 이치와 같다.



▲2. 배반하고 파는 자들에게도... 함께 계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기까지 한 사람들도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기들과 같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주님은 배반하는 저들이 알지 못해도,

저들을 사랑하시고, 저들을 용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배반자 같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등산의 예

온 가족이 함께 등산할 때, 어린 자녀가 위험한 낭떠러지 근처의 길을 갈 때

분명히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간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아버지는, 항상 모든 위험에 대처하면서 걸어간다.

아이는 몰라도, 아버지는 그 위험한 순간에 더더욱 그 아이와 같이 하고 있다.

우리가 몰라도, 주님은 모든 순간에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뜻이다.



▲3.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도... 함께 계신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 등은 무덤에 가긴 했지만

부활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신에 향을 바르려고 갔던 것이다.


그런 믿음 없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나타나시고 그들과 함께 해 주셨다.


▲몸서리치는 귀향의 경험 (설교자 개인 간증)

제가 군대에 갔는데, 거기서 신체검사를 받아보니 폐결핵 3기로 판정 나서,

혼자 다시 밤 기차를 타고 귀향하게 되었다.


참으로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고, 그 때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머리는 이미 빡빡 깎았고, 고향의 8촌 형님 집까지 다 인사하고

송별금까지 걷어서 이미 다 써버렸는데, 다시 갚아줄 돈도 없고,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괴로움은 계속되었다.

내 친구들은 일병 상병 계급장 달 때(옛날에는 동네 친구들이랑 같이 입대했다)

나는 폐결핵 요양소에서 지냈다. 거기서 나는 영적인 훈련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제대하고 직장을 잡을 때,

나는 신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았고, 지금은 이렇게 목회를 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순간에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몰랐어도, 깨닫지 못했어도,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동행하고 계셨다.



▲4. 동행을 요청하지 않아도... 동행해 주신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동행해 주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요청한 것도 아니었다.


두 제자가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낯 뜨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몇 해 전에 예수의 제자로 고향을 떠날 때는

뭔가 금의환향할 줄로 기대하며,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내로라며 당당하게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무 지위나 업적을 성취하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귀향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어찌 편안하랴!



▲5. 예수님은 (특히)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동행해 주신다.

이런 제자들의 낙심된 마음을 아셨는지,

우리 주님은, 당신 스스로, 그 제자들에게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해 주셨다.


참으로 양떼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는,

그래서 상처 입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친히 길을 떠나시는

참된 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엠마오 도상에서, 우리는 느끼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이시다.

그런데 왜 나를 찾지 아니하시겠는가!

왜 홀로 내버려두시겠는가!


▲사랑하므로 진다

남편과 아내가 말다툼하다가, 초신자 남편이 강수를 띠운다. 

‘나, 주일날에 교회 안 가 버릴거야!’

그러면, 부인이 다소곳이 죽게 된다.


‘그래, 가지 마라! 당신 잘 되는가 보자!’

이렇게 나오는 아내는 거의 없다.

그래도 남편과 가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화가 많이 나면

‘나 오늘, 학교 안 가 버릴거야!’ 하고 나동그라질 때가 있다.


그러면 ‘그래, 가지 마라! 어디 너 잘 되나 보자!’ 라고 할 엄마는 없다.

그래도 자녀를 사랑하므로, 웬만하면 그 투정을 들어주며 달래서 학교로 보낸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자가 낙심하고 괴로우면

그를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 또한 심히 편치 않으시다. 위 엄마처럼!


▲똑같이 가슴 아파 하신다.

지금 엠마오로 귀향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신 주님 또한 그런 심정이시다.

주님은, 그 제자들과 똑같이 아픈 마음으로, 지금 그들과 동행하시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혼자 갈 때, 어디 잘 되는가 한 번 두고보자!' 하지 않으신다.

 

▲어렵고 힘들 때도, 나와 함께 하신다.

우리 생각에는, 내가 잘 나가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 것 같고,

내가 잘 안 되고 힘들면, 하나님이 나를 떠나 계신 것 같지만,


그러나 요셉이 잘 안 풀릴 때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39:2, 21


사람은 내가 잘 안 풀리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낙심, 좌절, 실망, 실패했을 때에도, 언제나 함께 동행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와 함께 계신다.

나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함께 동행 하신다. 성령을 통해서...



◑2. 사울과 동행하신 예수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행9:5


예수님은 사울을 땅바닥에 쓰러뜨리시고 그 눈을 멀게 해 버리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두 번 호칭은 강조 어법)


예수님은 오늘도 비슷한 일을 행하심을 당신은 믿으시는가?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에게 사울처럼 직접 찾아가셔서

그를 쓰러뜨리시고 만나주신다. 


어떤 크리스천은,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그 분이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심’을 믿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그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여기에 here and now 나와 함께 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런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큰 의미가 없게 된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동행 해) 계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마28:20


지금 우리가 이 글을 읽을 때에도, 내 어깨 너머로 예수님이 함께 읽고 계신다.

예수님은, 어떤 중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나와 함께 계신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만약 ‘아나니아의 순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청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간증도 결코 못 들어볼 뻔 했다. 행9:17 

(청년 사울은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13:8

그분은 부활하셨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나 보이신다. 성령으로!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공중 어느 곳에 있듯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산소가 내 주위 어느 곳에 있듯이,

주님은 성령으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오늘날에도 다메섹 도상의 사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시고,

그들을 불러주신다.

그러나 아나니아 같은 사람의 동역도 꼭 필요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내 양떼를 치리라! 내가 그들에게 평강을 주리라 겔34: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

겔34:15, 개역



◑3. 유턴의 은혜


예수님은 그들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실망한 우리들을, 다시 사명의 길로 돌려주신다.


‘하나님, 저를 써 주시옵소서!’

이런 소망과 소명을 갖게 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롬11;29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시고 구원하신 자녀는, 사명을 다 감당케 하시고

반드시 천국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

 

구원을 - 죽어서 천당가는 것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젊어서 안 믿다가, 죽기 전에 믿고서 천당 가려 한다.


구원이란, 죽어서 천당가는 것 말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

이 모든 것을 '구원'이라 말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07.04.15.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결정적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변화되어서 그렇겠지만,

아래 설명은, 이색적인 이유를 들고 있는데,

‘지식’으로 한번 쯤 읽어볼 만 합니다. (번역 생략)

 

We shall never know why Mary Magdalene or the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failed to recognize Jesus.   

Perhaps the answer may be simple:  

When a devout Jew set out on a special mission,

he would often take a Nazirite vow.  

According to this vow, he would drink no wine or strong drink,

and he would not shave until the completion of the vow. 

(See Numbers 6.)  


St. Paul, for example, had such a vow  in Acts 18:18.   

Normally, Jews of the time of Jesus were clean shaven.  

Assume, however, that Jesus took a Nazirite vow

when he left Galilee for his journey up to Jerusalem

for his Exodus, his Passover, his death and resurrection. 


His beard and hair would have grown long.  

After he died and rose from the dead,

his vow was completed and he could be clean shaven again!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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