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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 예언자 예레미야

LNCK 2007. 4. 27. 23:58
 

◈예언자 예레미야                                 렘1:1~19



*출처: http://blog.naver.com/kslofs/40018491460  > 예언자 시리즈 7, 예레미야

 

  

오늘 우리 시대에도 훌륭한 성경적 예언자가 많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1. 예레미야의 예언자 취임 (렘1장)


▲보잘 것 없는 변방, 아나돗 출신

예레미야는 아나돗 땅의 제사장 출신이었다. 렘1:1

‘아나돗’이라는 마을에는 보잘것없는 성소가 하나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성전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성소였다.

*아나돗 - http://blog.empas.com/ahnjh42/19446471

 

그같이 보잘것없는 성소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그다지 큰 자부심을 느끼거나

포부를 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이 거행하는 제사도 그렇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작은 도시니까...)


따라서 단순히 인간적인 척도로 판단해서는 예레미야가

위대한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을 만한 ‘외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겠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결정은 평범한 예상을 벗어나는 결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예레미야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사업에 협력하도록 하신다.

(엘리야 선지자도 ‘디셉’ 출신이었는데, 역시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예정된 소명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1:5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자신감을 가지기는커녕,

그 소명 앞에 전전긍긍한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통감한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1:6


야훼께서는 끝끝내 당신의 부르심을 철회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가 주님의 권세로 말할 때는,

그의 말은 이미 더듬거리는 이런 아이의 말이 아니다.


너는 아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  1:7~8


▲선지자 임직식의 표 sign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적마다 늘 그랬듯이,

예레미야가 받은 사명도 일정한 행동에 의하여 상징되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세라핌 천사가 벌겋게 달은 숯불로

자기의 입술을 문지르는 것을 보았고,


에스겔에게는 하나님께서 두루마리를 먹게 하셨다.


예레미야에게 있어 그 상징적 행동은 보다 단순하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입술을 만지는 손을 보고,

그 손이 자기 입 속에 말씀을 집어넣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렘1:9,


→이때부터 예레미야가 선언하는 말은

더 이상 그 자신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그가 떠맡은 사명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백성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선지자의 권세=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대리인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1:10

 

예레미야는 파괴하고 또 건설하라는 이중적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먼저 강조된 ‘파괴하라’는 것은 어려운 사명이었다.


그리고 훨씬 뒤에, 하나님께서는 장차 도래할 구원을 예고하신다.


그 마음의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31:33


그래서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예언자임을 '임직식' 후에 당장 체험한다.


▲살구나무 환상, 깨어 지키는 자  1:11~12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시자,

그는 살구나무 가지가 보인다고 대답한다.

늘 보아온 대로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살구나무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아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잘 보았다. 이것은 내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제 그 살구나무는 특별한 메시지를 띠고 나타난다.

히브리어에서 살구는 ‘깨어 지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살구나무는 하나님께서 ‘깨어 지키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명 역시, 하나님께 위임 받은 바

‘깨어 지키는’ 사명이었다. (에스겔 역시 파수꾼으로 깨어 지키는 사명)


▲끓는 가마솥 환상, 재앙이 닥칠 것이다.  1:13~16

곧 이어, 예레미야는 부글부글 끊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음을 본다. 그 물은 쏟아져 길을 가득 넘쳐흐른다.


이러한 장면 역시 예레미야가 전에 흔히 목격해온 바이지만,

이제 예언자로서 그는 그 광경이 북쪽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려

예루살렘 위로 넘치리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레미야가 받게 될 반대, 고난에 대한 예언  1:17~19

동시에 하나님은, 예례미야가 받게될 고난에 대해서도 미리 가르쳐 주신다.

큰 고난이 있을 것이지만, 큰 보호가 아울러 있을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제사장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성벽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  1:18~19



◑2. 의기소침한 예언자

 

어떻게 보면,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평생 불운한 비운의 예언자로

선택받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세상에 행복한 예언자는 없다.

이스라엘 사람 치고 어느 누가 ‘나는 행복한 예언자를 만나보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거짓 예언자라면 행복한 예언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 점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오늘날에도 누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예언자라면,

우리는 그를 마치 성자처럼 여기겠지만,

그와 반대로 성서는 예언자들이 자기네들에게 맡기신 사명으로 인해서

심한 갈등을 느끼고 짓눌림을 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네 백성의 온갖 비참을 뼈아프게 감지하고 있으면서

대부분 불신과 오해를 받았다.

 

엘리야도 온갖 희망의 빛이 사리진 듯한 실의에 빠져드는 순간순간들을 체험한다.

모든 노력과 투쟁이 수포로 돌아가고,

남은 것은 오직 실패와 패배임을 깨닫는다.


그런 순간에 엘리야는 무릎을 꿇고 자기의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왕상19:4).


그러나 예언자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이 상하고 갈기갈기 찢어진 예언자는

틀림없이 예레미야였을 것이다.  예레미야애가3:1~19 참조. 


▲듣기 싫은 소리를 발하니까 미움만 받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역시

거짓스런 안정(安定)과 안보를 단죄해야 했으며,

자기 백성의 죄악들을 낱낱이 들춰내고,

음흉한 정치적 책략들의 가면을 벗겨내야 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신 것은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기” 위해서였다(1:10).


그렇지만 그가 자기 백성에게 전해야 할 무시무시한 말씀들과 위협들은

우선 먼저 예레미야 자신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가 예고해야 했던 말씀들과 위협들은 먼저 그의 마음을 예리한 칼로 찔렀다.


보아라, 야훼의 분노가 폭풍처럼 터져 나온다.

태풍처럼 악인들의 머리 위를 휘몰아친다(30:23).


그러니, 사람들이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너는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느냐고 타박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거짓 예언자들은 한사코 희망적인 아첨 섞인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폭력과 강포를 휘두르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20:8).

 

▲너무 괴로운 나머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거의 반항에 가까운 말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해가 되는 사명과 임무를 지우셨다고 항의하듯이 말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20:7).


사막에 머물 만한 으슥한 데라도 있다면 내 백성을 버리고 그리로 떠나가련만,

나를 배신하고 간음하는 무리들,

한번 혀를 놀렸다 하면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진실은 스러지고 거짓만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9:1).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기의 출생을 한탄한다. 마치 욥처럼...

저주받을 날이여, 내가 세상에 테어나던 날이여,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여...(20:14).

 

▲그렇지만 예언 안 하면 견딜 수 없는 예레미야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항복하고) 맙니다”(20:9).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예레미야

예레미야가 겪는 고통은 먼저 자기 나라의 고통이다.

그는 자기 나라가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러기에 그 사실을 선포한다.


재앙이 미구에 들이닥치리라고 선포한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에게 그 이유를 제공한다.

그는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불충실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백성이요,

그 백성이 당한 수난과 고통은 자기 부모형제와

자기 자신이 받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배야.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터집니다”(4:19).

“가슴은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습니다”(8:18).

“나의 염통이 터지고 뼈마디 마디가 떨리는 구나”(23:9).


▲고독한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수난은 또한 그의 고독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파견된 사람으로 알려지고 존중되기도 했지만,

“므깃도”의 재앙 이후로 사람들은 그를 기피하고 경원시하고

그의 친척들마저도 그를 피해버렸다.


(므깃도의 재앙 - 유다 왕 요시야가 애굽의 바로느고와 전투에서 전사한 곳,

왕하23:29, 주전 609년경. 모든 상황이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처럼 전개되므로)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20:10).


예레미아는 외롭게 혼자서 고독을 되씹는다.

그는 야훼의 말씀 때문에 아내도 얻지 못하고 아들딸도 두지 못한다(16:1~4).

그는 고통과 수난을 당해도 따뜻하게 위안해줄 자가 없다.


저는 웃으며 깔깔대는 자들과

한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손에 잡힌 몸으로

이렇게 울화가 치밀어 올라

홀로 앉아 있습니다.

이 괴로움은 왜 끝이 없습니까?

마음의 상처는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15:17~18)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폭력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는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20:8).


더욱이 그가 불행을 예고하고 성전이 파괴되리라고 외치며

백성들은 포로로 붙들려 가리라고 소리 지른다 해서,

사람들은 그를 마치 배반자처럼, 나라의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오로지 자기 백성을 위해 살고,

자기 백성의 안위를 위해 조마조마하고 하나님께 간구해 마지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를 미워하였다(7:16. 11:14. 14:11. 18:20).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신 대로 이 사람은 이 성전이 망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26:11).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 함정을 파놓고, 그를 때려잡을 음모를 꾸미고,

그를 죽여 없애려고 애쓴다.

그럴 때마다 공포와 실망이 그를 엄습하고,

급기야 그는 하나님께 다가 가 엎디어 눈물로 하소연하고 호소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야훼여, 주께서는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버리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저를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15:15).



◑3.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선지자


마지막, 그가 가장 괴롭게 겪는 수난은 ‘칠흑 같은 밤’ 중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어내는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 대하여 충실하시고 자애로우시다고 확신하는 그는,

이스라엘이 비록 멸망한 뒤끝일지라도,

놀라운 장래가 마련되어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42:10~12 등


그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붙잡혀간 사람들에게 자기의 희망을 건다.

비참한 귀양살이를 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백성이 움터 나오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에,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배 상태로부터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표징으로서 법적 권리를 행사하여 아나돗에 있는 사촌의 땅을 샀다. (32:6~15)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매매’였다.

스룹바벨과 함께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첫 집단 가운데

아나돗 사람들이 128명 있었다.

사람들이 다시 거주하게 된 성읍들 가운데 아나돗이 포함됨으로써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에스라 2:23, 느헤미야 7:27, 11:32.

 

모든 선지자들이 똑같이, 절망을 예언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예언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최후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백성들을 다시 규합하려 애쓰지 않는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그는 팔레스티나에 그냥 남아 있기로 작정하고,

그달랴가 살해당하자, 아마도 본의 아니게 에집트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는 이역 땅 에집트에서,

자기가 생명을 바쳐서 위하던 백성들과 멀리 떨어져서,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 백성들과 멀리 떨어져서 죽는다.

예레미야가 겪은 어둔 밤은 새롭게 터져 나오는 여명을 끝내 맛보지 못한다.


<1994년 3월, [생활성서] 통권7호 김수복 편역, 김지윤 축약.



◑성경의 예언과 무당의 예언의 차이점


▲1. 역사성

성경의 예언은 역사성이 있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많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에 대해 예언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구속사)의 관점으로 예언한다.


그러나 무당은 역사성이 없다.

그저 한 개인의 흥망성쇠에만 관심이 많다.


▲2. 연속성

대부분 무당들은 후대에 무슨 말을 남겼는가?

그들의 말은 잠시 몇 년 몇 개월 있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대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시대와 시대를 흘러내려간다.

영원적으로 내려간다.

예언자와 다음 세대의 예언자가 사슬로 묶어져서 시대 시대로 흘러 내려간다.

예언자와 예언자끼리 계보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예언이, 전체 예언의 일부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발람도, 훌륭한 계시를 갖고 있었지만,

어떤 역사성, 연속성이 없었다. (참 예언자가 아니라는 뜻)


▲3. 무당은 신일합일, 예언자는 자기 인격적.

무당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의 이름을 빌어서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말한다.


무당은 신인합일에서 인간성이 와해되고 신이 그를 접수해서 활동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비인격적이지 않다. 분명한 자기 개성을 갖고 있다. <박철수 목사님 설교에서 

 

 


[주제별 분류] 선지자론  http://blog.daum.net/bible3/11575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