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성전관 행7:44~53
▲사도행전 7장은 제게 항상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종종 연설이나 글의 내용이 길면,
그 주제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길어서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7장을 읽을 때마다, 갑갑한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너무 길어서... 도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지
그 주제를 선명하게 파악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설교를 듣고서, 행7장 스데반의 설교의 주제가 이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녹색은 편집자 삽입글)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선 이유 - 성전을 헐려고 했다는데...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산헤드린 법정에서 행한 설교(자기 진술)이다.
스데반은 유대권력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다.
그것은, 본의 아니게,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유대권력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자 유대권력은 그를 없애버리기 위해, 거짓증인까지 동원하면서,
예수님을 죽였던 산헤드린 법정에, 똑같이 스데반을 고소해서 세웠다.
행6:13~14는 그 고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스데반이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성전을 헐어버리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율법)을 고쳐야한다고 전했는데,
스데반이 그 예수와 똑같은 주장을 전파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행6:14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등 성전이 건축된 이후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 성전 안에 가두어 두었고
그 성전을 하나님과 동일시 해왔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성전을 절대시한 만큼
그 성전을 헐려고 했던 예수님이나,
그 예수와 똑같은 주장을 펴는 스데반은,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들이 1천5백 년 동안이나 금과옥조로 삼아왔던
모세의 규례(율법)마저 부정한 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성전의 참된 의미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헐려고 하셨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직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다.
그곳에서 장사꾼들을 다 쫓아내신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19
(아마 이 말씀이 예수님이 마치 성전을 직접 허무시려는 것처럼 오해되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즉각 반발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어졌거늘, 네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느냐? 요2:20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의 의미’는 그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전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었더라 요2:21~22
여기서 예수님은 ‘성전’을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르치신다.
사흘 후에 일으키신다는 말씀은,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의 무용론을 말씀하신 것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상,
참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이셨다.
▲유대인의 그릇된 성전관
인간에 의해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였다.
그것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에 불과했다.
유대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누구든지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참된 성전’이셨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상,
인간들은 더 이상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죄를 속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삼아
우리 인간의 죄값을 속하는 영원한 제사를 드려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된 성전의 의미와, 제사의 의미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엔, 대신에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모든 성도의 마음속에 임재 해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성전으로 회복되게 되었다.
성전이란,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신 곳(하나님의 집, 성전)인데,
성령님이 오신 이후로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 해 계신다.
그러니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다.
구약 성전 → 예수님의 몸(공생애) → 우리 몸(성령시대)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성전을 가리켜
이것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예언하셨다.
더 이상 구약성전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자기들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한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백해무익한 장벽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을 우상화하는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
참 성전인 자기 자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른 믿음을 회복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유대인들은 참된 성전인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죽여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산헤드린 법정에서
스데반을 똑같이 심문해서 죽이고 있다.
▲스데반의 질타
이런 연유에서, 스데반은 자기 면전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그들이 갖고 있는 그릇된 성전관을 질타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은 거기서 그와 함께 하셨고, 7:2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가나안에 계셨고 7:8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 이집트에서 그와 함께 계셨고, 7:9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를 건지셔서 그와 함께 이집트 왕궁에 계셨고 7:21~22
광야의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 모세와 함께 계셨고 7:30
80세 노인인 모세를 도구로 삼아 자기 백성을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시키셨고,
해방된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홍해 한 가운데에 함께 계셨고, 7:36
그들이 광야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마다
하나님은 장막으로 그들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이 계신 곳, 즉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등이 이미 '성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특정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스데반이 강조했다.
스데반은 또 하나님께서 광야의 모세에게 하나님 당신의 임재의 상징으로 만들게
하신 것은 붙박이 성전이 아니라, 이동식 장막임을 분명히 밝혔다.
사람들이 어디든지 옮겨 다닐 수 있는 이동식 장막이야말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잘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상징물이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할 때
그 장막을 메고 들어갔으며,
그 이후 솔로몬 성전 짓기 까지 480년 동안,
그 장막은 이스라엘 신앙의 구심점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절대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그리고 스데반은 다윗과 솔로몬이 붙박이 성전을 건축했던 동기도 설파했다.
그것은 결코 두 왕이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 두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왕이 된 다윗은
자기는 아름다운 왕궁에 사는데,
자기 왕궁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을 모시려는
순수한 동기에서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은 절대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신 것을
봉헌 때부터 이렇게 선언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8:27
이사야 선지자는 솔로몬의 이 기도내용을 이사야서 66:1에서 인용했고,
바로 그 말씀을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데반의 진술내용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7:51
하나님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 광야생활을 할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인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면서도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영적 교만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세는 신10:16을 통해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너희 목을 더 이상 곧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할례 자체가 나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단의 예식인 만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할례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스데반은 모세의 그 말을 인용해서
너희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지적했다. 행7:51
그들이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려고 했다면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잘 깨달았겠지만,
그들은 완고함을 돌이키지 않았다. 행7:52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참된 성전이신 예수를 못 박아 죽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참신앙을 지키는 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겉포장은 성전이요, 하나님 신앙이었지만,
사실 그 본질은 자기들의 관습, 욕망, 이기심, 기득권일 뿐이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진실을 듣기 싫어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산헤드린 공회는 스데반을 죽이기로 가결하고 돌로 쳐 죽여 버렸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설교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편집자 삽입글)
그것은 유대인의 성전지상주의처럼
오늘날 21세기 한국에는 개교회지상주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것이 덜합니다.
왜냐하면 교구제가 되어있어서
한 사제가 어떤 교회(교구)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은 천주교회 전체 또는 하나님나라 전체를 위한 일이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동’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각 교회가 거의 독립해 있기 때문에
개교회지상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제도는 장단점이 있으며, 개교회주의가 갖는 상대적인 장점도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 개신교의 과거 찬란한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그런 노력들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무슨 전도대회를 한다든지, 교인 체육대회를 한다든지, 뭘 하든지
따지고 보면 자기교회를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참된 기독교의 본질은 점점 무시되면서, 교회론, 교회성장방편만 기형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전체교회가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행7장의 유대교처럼,
교회(성전)도 우상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겉포장은 교회성장,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속 내용은 자기 탐욕 및 과시, 이기심, 기득권 및 관습 수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교회 프로그램, 각종 행사로 성도들을 지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 열심인 사람이 '믿음 좋은 크리스천'으로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 입니다.
실제로 믿음 좋은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교회'에 사람들을 가급적 오랜 시간 붙들어 매두려는 시도가
기독교를 어둡게 합니다. 교회에서는 충전하고, 세상에 나가서 활약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앞으로는 자기 교회를 어떻게 부흥성장 시키는 걸출한 목회자, 장로보다
한국 교회 전체를 부흥성장 시키고, 나아가 세계교회를 선교하고 섬기는,
그런 겸허한 분들이 더 많이 나올 줄 믿습니다.
지금 그런 노력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이 글은 '교회지상주의'를 공박한 것이지, '무교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님.
이 내용은 설교자의 원래 주제와 다를 수 있음. 삽입글 끝)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온 모 선교사의 편지를 소개해 드린다.(원래 설교문으로 복귀)
저는 지난 1년간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주위 환경과 분위기에 동요되어
제 가치관이 그토록 흔들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안락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크리스천들의 무뎌진 신앙과
허무하리만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을 보면서
진정 구원받은 크리스천답게 살아가기에는
아프리카가 오지가 아니라,
한국이 오지 중의 오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가 드라마에 밀려나고,
육체의 건강은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챙기면서도,
영적 건강은 초기 암 환자처럼 자각증세도 없고,
정년퇴직 후 불과 2~30년에 불과할 노후대책에는 놀랄 만큼 계산적이지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영혼의 대책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크리스천들이
한국에 어쩌면 그리도 많은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 땅 한 평, 집 한 채 없는 저희 부부는
열린 하늘과 하나님만 노후 대책인 이곳 아프리카가
고향처럼 더욱 푸근하기만 합니다.(편지 끝)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가리켜 오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크리스천이 살기에는 한국이 오지 중의 오지라고 말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지적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교회가 세속에 물들대로 물들어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것들을 지키느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여유도, 겨를도 상실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그동안 무엇을 애쓰며 지켜왔는가?
우리가 지금 지키려고 그토록 애쓰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재산은 지켰는데, 가정이 깨어진 것은 아닌가?
건강은 지켰는데, 영적으로 중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주일은 꼬박꼬박 지켰는데,
교회 밖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살지는 않는가...?
<07.05.13.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편집 원제목: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행7: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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