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자궁의 힘 눅6: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눅6:36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사회에서 핍박을 받을 때는 괜찮았지만,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사회에서 어떤 주류를 형성하게 될 때,
종종 교회는 본래 기독교적 사명과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쓰는 방법과 똑같이 힘, 물량, 숫자로 밀어붙이려고 했습니다.
아래 설교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면서,
오늘날 기독교가 그 본질에서 이탈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서문 : 하나님나라의 현대적 의미
나이가 먹을수록 모르는 영역이 자꾸 더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꼭 더 잘 알고 싶은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원래적 소명의식과
그의 열정적 아젠다(agenda, 현안)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초지일관하셨던 비전과 꿈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나라와 그 나라의 선포가
오늘 여기 우리 상황에서 갖는 의미의 문제일 것입니다.
◑당시 팽배했던 유대인의 종말론적 하나님나라 사상
▲이집트, 바벨론 노예생활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다.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라는 예수선포와 예수실천에 대한
해석학적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과 선민의식이 예수 당시에도
사람들의 삶 속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겼습니다.
또한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당신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약속한 계율을 어길 경우
하나님은 혹독한 징벌을 가하신다는 믿음도 널리 번져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바빌론에서 포로의 삶을 살게 된 것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야훼의 심판이라 믿었습니다.
▲‘종말론적 열망’을 절망적 현실에 대한 탈출구로 열망하다.
바빌론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땅으로 귀환했습니다.
이것은 제2의 출애굽 사건이기도 하지만, 귀환 후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 강국들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야훼께서 친히 메시야로 오시어
외세를 몰아내고, 모든 악의 세력을 패배시켜야 한다는 열망이
민족과 개개인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한(恨)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종말론적 열망이었습니다.
부패하고 수탈적인 내세(內勢)와
혹독하고 강압적인 외세(外勢)에 의해 시달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종말론적 신앙과 갈망으로
안으로는 일부 보수적인 사제집단(司祭集團)을 비판했으며,
밖으로는 로마지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망이 무참히 깨어지다.
이른바 제2성전시기(聖傳, 바빌론 귀환부터 주후 132년간, 종말론적 묵시록 유행)
이 같은 종말론에 근거한 크고 작은 무력 항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로마의 폭력 진압으로 이스라엘의 반로마 무력 항쟁은
처참하게 실패했지요.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10세쯤 되셨을 때
갈릴리의 유다가 로마에 대해 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당시 그 같은 사건 배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말론적 열망과 좌절을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예수 부활사건 이후 30여 년간 지난 때 일어난 반로마 무력 항쟁으로
예루살렘은 초토화되기도 했지요.
주후 132년에는 벤 코시바(Simon ben-Kosiba) 랍비가 또 메시야처럼 나타나
로마 지배에 대해 무력 저항했으나 그 역시 비참하게 패배 당했습니다.
갈릴리의 유다나 벤 코시바 모두 야훼의 지배를,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무력 앞에 무참하게 무릎을 꿇고 말았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비극들을...
당시의 ‘종말론적 열망’ 속에서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참된 의미 : 자비 (↔종말론적 열망)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했을 때,
과연 그의 뜻과 꿈은 당시의 유행하던 (종말론적) 메시야 사상과 어떻게 다르며,
그 다른 점이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 줄까요?
▲친근한 아빠 하나님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 봅시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과연 당시 팽배했던
‘유대 종말론의 하나님’(전쟁의 승리자)과 같은 분이었을까요?
선민사상에 근거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며,
억압적 외세를 무력으로 몰아내라고 부추기는 신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당시의 정치적 메시아사상이 내세웠던 신,
곧 왕으로 군림하시는 신과는 달랐습니다.
엉뚱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의 하나님은
어린 아기에게 어버이와 같이 인자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아기가 불안과 공포에 떨 때 반드시 엄마와 아빠를 찾듯,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근한 아빠로 부르셨고, 인자한 아빠처럼 모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기 직전,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 드렸을 때,
예수님은 야훼를 아빠(abba)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람어의 토속적 표현 속에는 사랑과 신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 ‘아빠의 사랑이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이것은 당시 배타적 민족의식으로 무장된 무력항쟁이나
유혈혁명으로 실현될 수 있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과 제사장들의 지배질서도, 헤롯왕의 질서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로마 황제를 숭배했던 지배질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질서는 폭력과 위선, 탐욕과 독선주의에 입각한 지배질서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
곧 아빠의 사랑이 지배하고, 정의와 평화가 그 열매로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자비(자궁)의 사랑의 하나님
지금은 5월입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어버이의 달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갖는 감동적인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아빠, 그의 신이 지극히 모성적(母性的) 존재라는
역설 같은 진실입니다.
눅6:36은 하나님을 자비로 표현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눅6:36
영어로 자비compassionate란 ‘함께 아파한다’(com+passionate)는 뜻도 되는데,
‘자비의 하나님’이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 됩니다만
‘자비’는 예수 당시 쓰던 아람어(Aramaic)나 히브리어로 ‘자궁’을 뜻합니다.
‘자비’(compassion)의 복수명사가 엄마의 ‘자궁’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고백은
‘하나님은 곧 자궁이시다’ 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남성 아버지와 여성 엄마의 자궁은 전혀 함께 갈수 없는 속성 같고,
이 같은 표현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궁이 갖는 사회 심리적 함의(담긴 뜻)
▲자궁은 가장 안전한 곳, 가장 평안한 곳, 가장 평화스러운 곳과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아기에게는 그러합니다.
모든 고통과 스트레스로부터 보호받는 안전지대입니다.
모든 유토피아가 갖는 아름다운 평안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상지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깊숙한 곳에는 자궁회귀욕구가 잠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뜻에서 프로이드(Freud)의 자궁선망 콤플렉스(womb-envy complex)는
정말 날카롭고 탁월한 통찰력입니다.
그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살부殺父욕구)와 견주어 보면,
자궁이 갖는 장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기가 자궁에서 벗어날 때 안전지대를 떠나는 불안으로,
또 그 괴로움으로 울음을 터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아기에게는 제2의 자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젖가슴이지요.
따뜻하게 품고 보듬어 주는 엄마의 젖과 엄마의 가슴이
제2의 자궁역할을 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아기와 엄마자궁(엄마가슴)간의 관계가
사랑과 신뢰의 관계임을 대번에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평화의 원래 모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아빠와 우리 인간 사이에도
그러한 관계가 이뤄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아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지요. 그것은 자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이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명하신 것은,
하나님이 자궁이듯 너희들도 자궁스러워야(wombish) 한다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엄마의 젖을 빨며 자는 아기의 표정을 자세히 보세요.
자궁스러움이 주는 아름다운 힘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나라의 참 모습을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하나님나라의 주인이요, 아빠의 상속인이기도 합니다.
(롬8:15, 갈 4:6 -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나라는 자궁스러운 속성
유니온 신학교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 교수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바로 자궁스러움이다!” 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은 인간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고, 생명을 주며,
아기를 보듬고 보호해주는 아빠(abba)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 힘에서 비로소 하나님나라는 자라나게 되는 것이지요.★
▲남성(하나님)은, 여성은 아니지만, 모성적일 수는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다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성은 약하나, 모성은 강합니다.
여성은 깍쟁이이고 인색할 수 있으나, 엄마는 너그럽고 퍼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남자도, 여자 못지않게 모성적일 수 있습니다.
마치 탕자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탕자 아들이 멀리 도시를 떠났으나, 언제나 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탕자가 저 멀리 지평선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버선발로 엄마처럼 뛰어가고 싶어 하는 아버지가 바로 모성적 아빠입니다.
요즘 자기 자식을 엄마처럼 돌보고 보듬어주는 아빠들,
곧 모성적 아버지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기를 자기 자궁에서 10달 동안 키워본 엄마체험을 해본 여성들은
대체로 아빠 하나님의 본성을 존재론적으로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엄마 됨의 신학적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엄마 여러분들에게 주님 안에서 축하드립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에서 보듯이
하나님나라는 회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회개해야 하나님나라가 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힘의 논리를 회개하라, 자궁의 정신을 되찾으라!’ 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궁과 같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이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의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라는 선포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회개할 사람은 어린 아기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히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은 어른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성인(成人)이 된다는 것은 영악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회화(socialization)를 통해 어린이는
무대 위에서 연기 잘하는 연기자로 변질되고 위장됩니다.
일정한 사회적 배역을 맡아 연기를 잘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성숙한 성인으로,
때로는 성공한 존재로 갈채를 받습니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 자기의 <속사람>, <참 나>를 교묘하게 잘 숨겨야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기자들이 율법주의에 매몰되면
참된 인간성(humanity)은 훼손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연기자들은 <참 나>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전폭적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되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회개 촉구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문제에 관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이나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회개가 삶의 근본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리라는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는 것도 회개의 실천입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마저 벗어주라는 명령도 회개의 명령이지요.
확실히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이 모든 회개의 정점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 회개 실천사항이지요.
회개가 결코 추상적이거나 종교적 중얼거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회개 촉구가 보복의 논리, 힘의 논리,
격파와 승리주의 논리를 완전히 뒤집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의(義)로운 전쟁이라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 하더라도,
무력으로 승리를 도모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오히려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력에 의한 모든 십자군적 모험(Crusade)으로
하나님나라를 결코 이룩할 수 없습니다.
총과 칼의 힘으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당장에는 지더라도, 억눌린 고난을 당하더라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사랑과 용서의 힘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나라의 주인들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나님나라’
예수님은 당시 팽배하던 ‘종말론적 열망’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고,
그것을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직접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기쁜 소식이었으나
유대지배세력, 로마지배세력에게는 충격적으로 불온한 소식이요, 사건이었습니다.
두 가지만 살펴봅시다.
▲1. 병고침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선포
하나는 예수님께서 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중환자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면서, 그들의 믿음이 나음의 비결임을 강조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환자에게
새로운 존재의 능력을 불어 넣어주셨지요.
(네가 병자가 된 것은 네 죄 때문이며, 네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 믿음으로 낫게 된 너는 의로운 믿음의 사람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죄가 사함 받았다라는 충격적인 선포까지 하셨습니다.
당시 죄를 사해주는 힘은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속죄가 허락되었지요.
여기에 부패와 수탈이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의 선포를 생각해 보십시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고,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주님의 선포는
바로 사제계급과 당시 지배구조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습니다.
혁명적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물리적 힘에 의한 유혈혁명은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폭탄 같은 것이지요.
예루살렘의 성전 세력이 독점했던 속죄행위와 그 능력을
예수님은 거리로, 계곡으로, 언덕으로, 호수가로 해방시켰고 확장시켰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이요 구체적 실천이었습니다.
환자를, 특히 중환자들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영적)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들이 갈릴리의 골목길에서 들판과 산위에서 터져 나온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나라 도래의 사건이었지요.
▲2. 소외계층 통합을 통한 하나님나라 선포
또 하나는 밥상공동체 운동이지요.
죄인들을, 잡인(雜人)들을, 더럽다고 낙인찍힌 자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주인으로 환영했습니다.
한 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아빠 하나님의 동등한 아들과 딸들이었습니다.
죄인도, 세리도, 창녀도, 상놈도, 이방인도,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습니다.
아빠의 소중한 자녀들이요, 아빠의 당당한 상속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의 공간적 계급차별 현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계급적으로 그 내부 공간이 분할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 여성의 뜰, 남성평신도들의 뜰, 사제들의 뜰로 각각 분할되었지요.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 야훼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곳,
바로 그 지성소는 대제사장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지요.
허나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는 모두가 한 상에 둘러 앉아
아빠 하나님의 사랑을 평등하게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같이 열린 밥상 공동체를 당시 지배세력은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지요.
희생제를 통해 유지되었던 성전체제는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을
불온하고, 불결한 움직임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부당한 온갖 고통, 곧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사회적 따돌림으로부터 오는 고통, 나아가 정신적 정죄로 인한 아픔,
이 모든 고통을 원천적으로 덜어주고 해소해주시려 했으나,
전통적 종교세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나라 가르침을 실천해 보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선과 독선의 유대지배체제와 달리,
강압과 착취의 로마체제와 달리,
지더라도 아빠 사랑으로 패배의 쓴 잔을 마시면서
그리고 고통당하더라도 아빠의 자궁사랑으로 꼴찌들을 보듬어 주고
원수들을 용서하시면서 골고다까지 가신 분이 예수님이셨지요.
자궁의 힘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힘이지요.
칼을 쓰는 자는 칼의 힘으로 망한다는 진리를 상기시켰지요.
그래서 예루살렘이 곧 로마의 무력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경고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절규하셨지요.
특히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했던 율법주의자를 향해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마23:37.
▲십자가는 자궁의 산고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아빠 하나님의 산고(産苦)라 해도 좋겠습니다.
새 생명으로 우리가 거듭날 수 있도록 우리 대신 고통당하시고(代苦)
속죄양으로 돌아가셨지요(代贖).
그것이 바로 자궁스러운 결단이요, 실천이며,
거기서 우리는 새사람으로 거듭나면서 하나님 사랑을 뜨겁게 확인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그 자궁스러움의 실천에서 드러납니다.
▲마치는 말
'아빠자궁'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모순되는 듯한 표현 같지만,
자궁의 힘은 남성과 여성을 초월해서 작동하는 그 '모성적 힘'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세상의 아빠들이 엄마 못지않게 자궁스러워지는 오늘 일부 세태를 보면서
나는 그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엄마 같은 모든 믿음의 아빠들에게 축하드립니다.
우리 모두, 아빠들과 엄마들 그리고 어린 자식들은 힘을 모아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종말론적 꿈(새하늘과 새땅↓)을
우리의 현실로 바꿀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따르미들은 그 비전을 실천하려고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아빠 하나님의 다스림(하나님나라)은 저기 하늘에서만 아니라
이곳 땅에서도 이뤄질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임을 상기하면서
요한계시록의 꿈(↓)을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깊이 되새겨 봅시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3-4)
<인터넷 설교 스크랩, 07.05.13. *원제목 : 아빠 자궁의 힘, 눅6:36
◑예수님의 대표적 성품
▲예수님의 삶에 도덕성이 있었지만, 도덕성이 가장 대표적 성품은 아니었다.
예수님 삶 속에 근면이 있었지만, 근면이 가장 대표적 성품은 아니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생성되는데,
그 대표적 성품이 바로 ‘아가페 사랑’의 성품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아가페 사랑’이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검증해 보면 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면서 “죽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흐름이 단절되었다.
즉 사랑이 흘러나와야 되는데, 그 흐름이 단절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인은 '아가페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고 할 때
‘자기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유교적, 율법적 의지를 강화하는 종교가 아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면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과 생명의 흐름이 회복된 사람은,
위에서 흘러내리는 아가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키우고 확대할 수 있는데...
◑아가페 사랑을 내 속에서 더욱 키우려면
▲1. 사랑하려면 말씀을 경청하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말씀)이라” 요일3:11.
요한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 말씀의 중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3:12
성경말씀에는 이런 반면교사도 나온다.
말씀을 경청할 때, 진면교사와 반면교사를 통해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아... 우리는 늘 사랑에 머무르게 된다.
▲2. 세상이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 3:13
사랑을 키우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가 오해받고 미움을 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당연히 수용하라는 것이다.
내가 견디기 제일 힘든 것은 오해받는 것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정당한지 늘 입증하려고 한다.
내가 정당한 권리를 내가 지켜야 되겠다는 오기가 발동한다.
크리스천의 유일한 권리는 오직 한 가지,
즉 내 권리를 포기give up하는 권리다.
내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매 맞고 돌아올 때,
그것을 견디고 용서할 때,
그 때 예수님의 사랑이 내 속에서 더욱 커간다.
▲3. 형제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마땅히 여겨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6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에 봉사하는 것이 -아가페 사랑-인지 알아보려면,
'진정 희생하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해 보면 된다.
자기 만족을 하고 있으면... 아가페 사랑이 아니다.
누가 나를 안 알아주면 그렇게 서운하다.
그렇지만, 남이 안 알아주더라도 그 봉사를 희생적으로 계속 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에서 우러 나오는 봉사이기 때문이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것인데,
형제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가져야지,
도리어 형제를 죽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거니와
하물며 물질을 버리는 것이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3:1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3:18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0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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