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회복하려면... 삼하12:7~15
은혜를 알고 깨달은 신자도, 시간이 지나면,
은혜가 식어지고, 감격이 떨어지기도 한다.
구원을 얻고 영안이 떠지면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진다.
그것이 평생 지속되어지면 좋으련만,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식는 것이다.
은혜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은혜가 떨어지는 원인은 - 죄
우리는 은혜가 충만해서 산꼭대기 정점에 올라갔다가
다시 산골짜기 깊고 매 마른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사이클을 반복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찾아 적절히 대처해서
내게 은혜가 항상 충만하도록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자기 성격적 기질이나 신앙 체험의 깊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은혜가 충만하거나 매 마르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 원인은
→ 바로 내 속의 “죄”다.
우리가 무심코 짓는 죄들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떨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은혜를 회복하는 길, 그래서 뜨거운 은혜를 늘 유지하는 길도
→ 죄를 잘 처리하는 것이 그 관건이요, 비결이 된다.
▲죄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문제로, 우리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죄가 크고 중차대한 문제로 공격해 온다면, 우리는 경계하고 물리칠 것이다.
그런데 매우 사소한 문제로 우리에게 접근하므로, 자기도 모르게 뚫린다.
이렇게 은밀하게 들어온 죄는, 잘 발각도 안 될 뿐더러
그래서 내게서 잘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즉, 잘 회개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들어온 죄는,
우리 마음을 황폐화시키고,
열정을 식게 만들고,
구원의 감격을 떨어뜨린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결단했던 마음들을 다 허물어버린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한 번 살펴보자.
◑하나님은 "죄의 본질"을 지적하신다.
다윗은 범죄하고도, 어떤 면에서 잘 회복한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서,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빼앗긴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다윗의 죄를 책망하는데...
▲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것은 ‘죄를 지적’하는 것과 구분 되어야 한다.★
사람은 ‘죄를 지적’하지만,
하나님은 ‘죄의 본질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시고 죄를 언급하시지,
‘너 간음하는 마음 품었지?, 너 미워하는 마음 품었지?’ 하면서
어떤 수치와 모욕을 주려는 마음으로 접근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는데,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죄를 지적)
우리가 은혜를 회복한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다.
그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낳는다.
다윗은 한 동안 완전범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야의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줬을 것이고,
밧세바를 데려와서 결혼식도 올렸다.
다윗이 얼마나 잔혹한지, 또한 그것을 얼마나 잘 포장하고 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듯이 보였다. 다윗은 안심했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절대 권력으로 자기의 범죄를 은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힘이 있을수록 조심해야 한다.
누구든지 어떤 힘을 가지면, 뭣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가 곧 법이고 절대 권력자라는 잘못된 생각이 싹트면,
사람은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다윗이 그랬던 것이다.
최근에 모 재벌 회장도 그랬다.
그렇게 마귀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힘이 있을수록, 극히 조심해야한다.
▲다윗 죄의 본질 - 1.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
다윗이 간음한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육체의 정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아내가 많이 있었고, 그때는 다윗이 피 끓는 20대 청춘도 아니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한 책망을 귀담아 들어보자.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헷사람 우리야를 치되 암몬 사람의 칼로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영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12:9~10
하나님이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시면서,
마음에 가장 섭섭한 생각을 가지신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업신여기고” 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의 죄의 본질을 지적하고 계신다.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었다.
한 순간의 정욕이 다윗으로 실수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죄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죄의 본질이었고,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그것을 지적해 주셨다.
‘이 정도는 내 마음대로(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인지, 아닌지... 곰곰이 되짚어봐야 한다.
일단 마귀의 미혹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지지만...
▲2. 가진 자의 횡포
보통 다윗의 범죄를 말할 때, ‘다윗의 간음사건’이라고 우리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윗의 일생에 그 간음죄가 가장 심각하고 무거운 죄라고
규정한다.
‘아니 다윗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보장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 간음죄를 범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선입견일 수 있다.
만약에, 하나님도, 다윗이 범한 죄 중에 ‘간음’이 가장 큰 죄로 여기셨다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 그 비유가 ‘간음과 관련된 비유’여야 했다.
그런데 나단의 비유는, 간음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비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럼 무슨 비유인가? - ‘가진 자의 횡포’라는 제목이 적절한 것이다.
물론 다윗이 간음죄를 지었지만, 그 이면에 ‘가진 자의 횡포’가 있었다.
가진 자 일수록 없는 자를 업신여기기 쉽다.
힘과 권력을 가진 다윗은, 못 가진 자 우리야 하나쯤은 없앨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횡포가 끔찍한 결과를 부른 것이었다.
▲3.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
나단의 비유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온다.
부자는 양과 소를 심히 많이 가지고 있었고,
가난한 자는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었다.
그런데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그 손님을 대접하려고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빼앗아 요리를 해서 대접하고 말았다.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외쳤다.
“내가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건데, 이 일을 행한 자는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에게 왕으로서 권력이 있는데,
자기 나라에서 이런 일을 행한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다윗의 이면에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라는 교만이 깔려있다.
그런 확신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런 사람을 처단하겠노라고 큰소리 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여간해서, 자기 죄를 스스로 잘 못 본다.
우리는 지금 ‘나는 다윗 같은 사람이 아니야!’ 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다윗처럼, ‘남은 엄중히 심판하면서도, 자기도 엄히 심판받아야 할 존재’
임을 까마득히 깨닫지 못하고 살기 쉽다.
◑ 적 용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기 죄를 못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우리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하시는데...
다윗은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말씀하셨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다윗은 충격적으로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나단의 지적이, 내게 대한 지적임을 내 스스로 ‘인정’할 때
하나님과의 은혜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줄 믿는다. (‘아멘!’이 적네요!)
▲오늘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다윗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자기는 간음한 적도 없고, 살인도, 도적질 한 적도 없다고 한다.
어쩌다가 어렸을 때, 담배 한 가치 집어본 경험 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성령의 지적을 들어야 한다.
물론 그가 외적으로는 그런 중죄를 안 저질렀는지 몰라도,
그렇다면 마음으로도 간음, 살인(미움), 탐심을 품은 적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랑할 만큼 스스로 떳떳하고 깨끗한가?
예수님이 그런 ‘자기 의로움’을 과연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것인가?
자고로 교회는, ‘나는 깨끗합니다. 나는 떳떳합니다!’ 이렇게 자랑하기 보다는,
‘나는 억만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아서 깨끗해졌습니다!’
이런 간증이 나와야 옳지 않겠는가! <이 녹색 부분, 최ㄴㅅ목사님 설교에서 인용.
▲나는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가?
신기한 것은, 성령충만 할수록
자기 내면을 심도 있게 깊이 발견하게 된다.
자기 내면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 중 한 가지가,
내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게 하신다.
이런 사람이 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범한 죄의 본질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고 지적하셨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는 것이다.
다윗은, 자기 마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잠시 사라져야 한다, 없어져 줘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악한 마음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똑같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 없이,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해 보려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벗어나면, 이전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했던 죄의 본질도,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단이 지적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이었다.
간음도, 살인도, 탐욕도, 그 죄의 본질은
사실은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결과이다.
▲나의 하나님 앞에 감춰진 영역은?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영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내 보이기 싫은 부분’
‘이 일 만큼은, 하나님이 눈을 감아주셨으면... 하는 분야’
‘이 정도는, 하나님도 양해하실 거야! 하며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부분‘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오늘 이 설교를 통해 건드리기 원하신다.
그것 때문에, 나와 관계가 멀어졌으니,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키고, 나와 관계를 회복하자고 오늘 이 시간 말씀하신다.
오늘도 나는,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나는, 그런 사실조차도 모르고,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다윗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권력, 아내들, 군대, 부귀영화!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감춰진 어떤 자기 영역을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감춰진 자기 영역을 만들기 원한다.
하나님이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개인적인 영역!
하나님이 안 보이는 곳에서 잠시나마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다윗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 많은 것들을 받았다.
구원, 가정, 자녀, 집, 건강, 직장, 부모형제, 친구, 안정된 나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 몰래, 하나님을 떠나,
어떤 자기만의 영역을 갖기 원한다.
그래서 엄청난 죄의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부흥을 원한다면...
▲오늘날 은혜가 줄어든 이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데 누구나 공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성령님)의 음성에
우리가 귀를 닫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적)
이 시대에 우리에게 좋고 유익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교회에서 굳이 듣지 않아도,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우리 귀에 들려지고 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음성을,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해야 할까?
우리 마음에 와 닿은 좋은 얘기도...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회복시키시려고 몸부림치시는 그 음성,
우리에게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그 음성을 귀담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참 부모라면, 자기 자식이 빗나갈 때 그것을 돌이키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자기 자식과의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눈물도 흘릴 것이다.
지금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
만약 내가, 그런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에 귀를 닫고 살고 있다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지적을 듣고, 우리는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참된 부흥이란?
우리 모두 부흥을 꿈꾸지만,
부흥이란 - ‘죄의 본질’을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지적하실 때,
우리 마음이 그것을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설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죄의 본질’을 지적하지 않고, 그것에서 돌이키지 않는 부흥은
가짜 부흥이요, 거짓 회심이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내 내면의 세밀한 부분까지 관찰하게 하시고,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부흥은 뜨거움 가운데 임할 수도 있겠지만,
말씀 가운데 세밀하게 내 마음을 살피게 하셔서,
민감하게 죄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서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교회로, 우리 사회로 퍼져나갈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이런 경험이 수년 째 한 순간도 없었다면, 참 불행한 일이다.
눈물 흘리면서 애통해야 한다.
이 밤(금요철야)이 나 자신에게 그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자기 죄를 시인한 다윗
죄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윗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즉시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삼하12:13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왕으로서 자기 수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기꺼이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해 주셨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셨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라. 삼하12:13~14
여기에 은혜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매를 대지 않고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부모 역시, 자기 자식을 죽도록 때리기를 원치 않는다.
▲밧세바 사이에 난 아들을 죽이신 이유
나단은, 다윗의 범죄가 사단에게 크게 비방할 거리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기꺼이 다윗을 용서하고자 하는데,
사단이 끊임없이 그것을 방해(비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 다윗을 참소하고, 그에 대해 따질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롤 거론하며, 다윗을 공의로 처벌하시라고 고소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어째서 다윗은 아무 대가도 없이 용서하시려나이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공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사단이 그렇게 따질 수 있는 빌미를, 다윗이 제공했다는 것이다.
다윗을 사랑으로 덮어줄 것인가?
아니면 공의로 대가를 물을 것인가?
이 심각한 난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여러분, 여기에 복음이 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의 아들은 죄값을 지불하는 제물이 되었다.
죄 용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속물이 필요하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바로 그 대속물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을 병으로 치셨다.
다윗은, 아들이 무슨 잘못이냐고 밤새도록 금식하며 기도했다.
신하들이 몸을 헤친다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다윗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한 모습을 보면,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애쓰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다윗은 아마 ‘자신을 대신 죽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 아기는 7일 만에 죽었다. 다윗에게도 힘들고, 하나님께도 힘든 기간이었다.
자식이 간절히 7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는데도,
그것을 들어줄 수 없는 아버지도 괴롭기 짝이 없다...
그 7일간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의 시간임과 동시에
다윗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돌이키는 시간이었다.
다윗은 자기 옷이 아니라, 자기 가슴을 찢었을 것이다.
그런 다윗의 기도를 보시고, 그의 간구를 들어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셨을 것이다.
▲죽은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예표
그러나 은혜는, 반드시 이런 ‘은혜의 대가’를 지불한 후에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신약적, 복음적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죽은 다윗의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다윗의 아들처럼, 고통 가운데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다윗보다 더 간절하게,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버려 두신다.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
자기 아들이 대속의 피를 흘리지 않고는, 인간의 죄가 사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죄를 회개하고 대속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불은 ‘충분한’ 지불이다.
행위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십자가를 믿음으로 거저 얻게 된다.
우리에게 양심이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양심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비껴나갈 수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복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철면피 같더라도,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을 꼭 붙드시기 바란다.
(이 설교문을 통해 자꾸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자기 자신'만 깊이 돌아보는 것이 올바른 적용입니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7.05.11. *원제목 : 은혜의 회복, 삼하12:7~15
[주제별 분류] 죄, 복된 회개 http://blog.daum.net/bible3/11786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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